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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혼을 도와주십시오 (29/46)


#29. 이혼을 도와주십시오
2023.05.29.


쉽게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열었다. 그렇게 쉬어놓고도 아직도 피로한지 눈 안이 제법 뻑뻑했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 클로에가 종을 울렸다. 이윽고 수많은 발소리가 뒤따랐다.

채비를 도울 하녀들이 줄지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들의 안내에 따라 방 안에 따로 분리된 파우더 룸으로 향했다.

“어쩜! 머리카락이 꼭 비단 같아요.”

“백옥 같은 피부는 또 어떻고요? 이토록 맑고 하얀 피부는 처음 보아요.”

머리 손질과 분칠을 담당하던 하녀들이 연달아 그녀의 미모를 칭찬했다.

수차례 쏟아지는 칭찬 세례는 그녀를 쑥스럽게 만들었지만, 여백 없이 빽빽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지루할 틈이 없어 좋았다.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돋보이게 꾸며드리는 건 어떨까?”

“아냐. 그것도 무척 예쁘시겠지만, 우아한 쪽이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은걸?”

그 무렵, 옷을 고르는 하녀들과 화장을 돕는 하녀들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두 개가 잘 어우러져야 괴리감이 들지 않는데, 그걸 정하는 데서 의견이 분분하게 갈린 것이었다.

“부인께서는 어떤 걸 원하세요?”

“예?”

“아무래도 부인께서 원하시는 거로 해야 할 것 같아요.”

좁혀지지 않는 주장들에 결정권이 그녀에게까지 넘어갔다.

‘내가…… 직접 입으로 말하라고?’

사랑스러움과 우아함. 제게 무엇이 더 잘 어울릴지 클로에는 스스로 생각해야만 했다.

사실 그녀는 어떤 차림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기대에 뭉친 시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보니, 선택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우아하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고작 말 한마디에 두 무리의 희비가 교차했다.

“당연하죠! 맡겨만 주세요!”

클로에를 아주 예쁘게 꾸며주겠다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내는 시녀들이 퍽 귀여웠다.

그녀가 황제의 손님이기 때문인지, 하녀들은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게 굴었다.

왕궁에서의 삶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그때도 이렇게 행복했지.’

행복했던 추억이 과거에만 남은 향수가 되었다. 이제 더는 왕궁 사람들의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공작가에서도, 왕궁에서도 나란히 버림받은 그녀가 기댈 곳은 없었다.

그리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졌다. 클로에는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채비에 집중했다.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이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 하녀의 들뜬 목소리가 클로에를 깨웠다.

사방에 놓인 거울이 클로에의 얼굴을 다양한 방향으로 비추고 있었다.

살결에 광채가 도니 맑고 하얀 피부가 더 도드라졌다. 옅은 색조끼리 조화를 이루니, 이목구비가 묻히지 않고 외려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들은 클로에가 가진 외양적 장점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꾸며주었다.

“워낙 아름다우시니 뭘 해도 예쁘겠지만, 이렇게 꾸미면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요! 마음에 드실까요?”

하녀의 말에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긍정을 표했다. 곧이어 그들은 대단한 찬사를 받은 것처럼 눈에 띄게 기뻐했다.

드레스는 머메이드 스타일로 흰 빛이 살짝 감도는 바이올렛 색이었다. 위는 다소 밋밋할지라도 밑단이 러플 형식으로 되어 있어 우아함을 자아냈다.

슬리브가 없어 훤히 드러난 팔과 목은 화려한 장신구로 대체해 균형을 맞췄다.

그녀가 연회에 갈 때도 이렇게 공들여 꾸민 적은 없었는데, 어색하다가도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대들도요. 정말 고마웠어요.”

치장을 마친 클로에는 자신을 마중 나온 시녀의 안내에 따라 식사실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첫날 클로에가 모두와 식사했던 장소와 사뭇 달랐다. 그곳과 비교해 크기는 협소하나 훨씬 아름답고 화려했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용도가 아닌,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곳처럼.

“왔군. 공주.”

예컨대 이 궁의 주인을 위해서 말이다.

교만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주인으로 제격인 남자가 보였다.

시녀는 그의 옆자리로 클로에를 앉혀 주었다. 이윽고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체한 뒤 방을 나갔다.

마침내 내부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좋은 점심이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왕국의 태양을 뵙지. 앉도록.”

인사치레를 위한 간단한 안부가 오갔다.

쿤은 발론트 국왕에게도 잘 붙이지 않던 호칭을 입에 올렸다.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담긴 호칭에 클로에는 뜸을 들이다가, 넘어갔다.

잠시 후 셰프들의 요리로 테이블이 채워져 나갔다. 갖가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의 향연이었다.

“이만 들까.”

“감사히 먹겠습니다.”

클로에는 자신의 앞에 있는 빵을 가져온 후 사과잼을 발라 먹었다.

“기분은 좀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미안하게 되었어. 유감을 표하지.”

“아닙니다. 굳이 잘잘못을 가리자면 공작과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멍청한 왕실의 잘못이겠지요.”

클로에가 더는 그럴 필요 없다며 비난의 화살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어차피 종전할 것이었는데도 굳이 설득당한 체를 하던 황제.

종전 소식을 가지고 온 칼리스가 정말로 황제를 설득했다고 생각해 추켜세우던 왕실.

변명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주어진 권력에 눈이 멀어 진실을 고하지 않은 칼리스.

누가 죄인인지는 번거로이 판별할 필요도 없이 확연했다.

“그리 말해주니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군. 그래도 나 또한 전적으로 그대를 도우도록 하지. 아니, 돕도록 해줘.”

스테이크를 썰던 클로에의 손짓이 더뎌졌다.

예의를 위한 빈말이라기엔 황제의 반응이 격했다.

저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심이라면, 황제는 정말로 클로에를 도울 생각인 걸까?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계획을 떠올렸다.

‘이혼…….’

왕실과 신전에 의해 묵살당했던 자신의 염원. 현재로선 단 한 사람만이 도울 수 있는 계획.

‘혹시 함정은 아닐까?’

냉큼 좋다며 입을 떠벌려야 정상이지만, 이미 수차례 당해본 클로에는 조심스러워졌다.

황제가 이까짓 일로 죄책감이 들 건 무엇인가. 누군가의 목을 베는 것에 스스럼없는 주제에 고작 이까짓 일로 클로에를 염려할 건 또 무엇이고.

아무래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물잔을 든 그녀가 목을 축이는 척 시간을 벌었다.

황제를 힐끗 바라보는데, 쿤 또한 그녀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클로에는 심연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가면 너머의 붉은 눈. 섬뜩하다던 그 두 눈.

더없이 강렬한 붉은색은 그녀의 것과 정반대였다. 마찬가지로 클로에의 유일한 친구의 것과도.

그런데 돌연 ‘쿤’이 떠올랐다.

황제의 눈 너머로 보이는 무언의 감정이 그녀의 진실한 친우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면…….”

친우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주겠다던 딱딱한 필체. 그곳에서 묻어나오던 진심.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제가 공작과 이혼하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런 그와 같은 이름을 한 남자.

그 순수한 사실 때문에 클로에는 또다시 사람을 믿게 된다.

***

황제로부터 받은 긍정에 클로에는 마음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물론 황제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치 않았다.

식사 이후 쿤은 이혼을 위한 절차를 검토해 보겠다며 집무실로 올라갔다.

클로에는 다음 일정을 위해 회의실로 향했다. 황제가 저들을 부른 원초적인 이유인 만큼 축제에 신경 써야만 했다.

회의실 안에는 칼리스뿐만이 아니라 헬레나 또한 앉아 있었다.

“오셨군요. 부인!”

헬레나가 반갑게 클로에를 맞이했다. 회의실 안에 앉아 있는 황궁의 신하들을 의식해서인지, 평소와 다른 태도였다.

“늦었어. 부인. 중대한 일에 지각을 해서 쓰나.”

칼리스 또한 그들을 의식하며 애꿎은 클로에를 질책했다. 신하들이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길 바라는 눈치였다.

저들의 사정에 맞춰 시간대를 멋대로 바꾼 주제에 제대로 고지하지 않는 파렴치한이 누구인데.

“미안하군. 황제 폐하와 점심 만찬을 갖느라 본의 아니게 늦게 되었어. 식사하고 계시는 폐하를 등지고 나올 수는 없잖나.”

여기서 구차하게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지.

클로에는 딱 한 번만 황제의 권력을 빌려보기로 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양해를 구해도 될까. 공작.”

그를 방패 삼으니, 예상대로 칼리스는 보기 좋게 입을 닫았다. 거만하던 표정 또한 굳어져 있었다.

“다른 분들께도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이만 회의를 시작할까요?”

그때를 기회 삼아 클로에는 주도권을 제 쪽으로 가져왔다.

장차 네 시진 동안이나 불타오르던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축제는 제국과 왕국을 둘 다 섞은 퓨전식으로 가기로 했다. 결이 비슷하다가도 추구하는 방향성이 전혀 다른 두 국가의 전통과 분위기가 잘 어우러질 것이 분명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이와 관련된 보고서를 써 오기로 했다.

‘가서 보고서부터 작성해야겠어.’

왕국 사람들을 제국으로 초청해 회의까지 거칠 정도면 이번 축제를 제법 장대하게 열 셈인 거다.

여기서 공을 쌓아 나쁠 건 없을 테다. 특히 황제에게 잘 보여야 하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클로에는 자신의 보고서가 최종안으로 채택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임하기로 했다.

홀로 회의실에 남은 클로에가 회의 시간 중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회의록을 꼼꼼하게 정리해놓으면 추후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회의록 작성을 마치고 복도를 나서는데, 앙칼진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공주님.”

그녀를 공주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둘밖에 없다.

그리고 공주란 호칭에 부정적인 감정을 실은 자는 단 하나다.

구태여 그녀를 상대할 필요는 없으리라.

클로에가 대꾸하지 않고 다시 발길을 돌릴 참이었다.

“대단하신 공주님께서는 세기의 영웅에 이어, 이제는 제국의 황제까지 탐내시는 건가요? 주제도 모르고 탐욕스러우시기는.”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복도에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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