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든든한 뒷배 (30/46)


#30. 든든한 뒷배
2023.05.30.


뜬금없는 말에 클로에는 자신의 고막을 의심해야 했다.

그녀는 악의가 가득한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로 헬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물어뜯을 심산으로 공격하던 여자는, 고작 싸늘한 시선 하나에 움츠러들었다.

“……무, 무슨 대단한 감정인 것처럼 구시더니!”

그러곤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더한 악의를 표출했다.

“대단한 감정?”

“그, 그래!”

“대체 어떤 걸 말하고 싶은 거지?”

마침내 클로에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 온갖 고고한 척을 다 하더니 결국 그쪽도 속물인 거잖아. 왕국의 영웅에서 황제로 옮겨간 걸 보니,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거 아냐?”

헬레나는 지금 클로에와 황제가 이성적인 교감을 하고 있노라 오해하는 듯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얕은 호의를 사랑으로 착각하기는.

아무리 설명해보았자 변명으로나 치부할 테다. 또한, 상대방에게 정성을 쏟아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허점을 들키기 두려워하지. 그래서 제 결점을 가리기 위해 상대방을 희롱한다던가.”

“……뭐?”

“제 허점을 상대방의 결점인 것처럼 꾸며내서 말이지. 자네도 그런가?”

황제를 제 편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헬레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너, 너……! 말이면 다야?”

“언성을 낮추고, 단어 선택은 신중히 하도록. 보는 눈이 많으니까.”

엄숙한 말에 헬레나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따금 돌아다니는 황궁의 고용인들이 두 사람을 주시한 채였다.

문득 마주친 시녀 한 명이 헬레나를 무례한 사람 보듯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짧게 스친 시선 속의 경멸이 헬레나를 괴롭혔다. 공작가에서 받지 못한 냉대를 현실에서 맞닥뜨리자 수치심이 몰려왔다.

“닥쳐! 나한테 조언하지 마!”

“이걸 악의적으로 받아들이면 이 이상 해줄 말이 없군.”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한 거야? 왜 아직도 네가 잘난 줄 아는 것처럼 구냐고! 이제 네 곁엔 아무도 없어. 그 코흘리개 하녀도 네게 돌아갈 수 없다고!”

코흘리개 하녀?

제인을 일컫는 듯한 멸칭에 클로에가 내내 유지하고 있던 평온을 잃었다.

헬레나의 말이 묘하게 이상했다.

단순히 제인이 공작저를 떠났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결연에 찬 듯한 말이었다.

마치 제인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다고 믿는 것처럼.

“제인이 내게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뭐?”

“제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말하는구나. 헬레나.”

헬레나가 의심된 클로에가 콕 집어 지적하자, 상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을 들켰다는 듯이.

“……헬레나. 너 정말 뭐라도 아는 건가?”

“……뭐, 뭘!”

“제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깟 년 내가 알 게 뭐야! 몰라. 모르니까 다가오지 마. 너……!”

클로에가 거리를 좁힐 때마다 헬레나가 질겁했다.

두려움에 잠식된 헬레나가 가까이 다가오는 클로에를 있는 힘껏 밀칠 때였다.

“뭐 하는 거야!”

불청객이 난입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클로에는 밀쳐져 아릿해진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여린 살 위로 붉은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반대로 헬레나는 망가진 태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의 가해자는 자신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날에 클로에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해는 마. 물을 게 있어 질문했을 뿐이니까.”

“공주란 작자들은 원래 으르대며 질문하나 보지?”

“은밀하게 대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랬을 뿐인데. 공작이란 작자들은 원래 비약이 심한가 보군.”

칼리스의 입을 거친 비난이 이젠 클로에의 소유가 되었다.

그가 생각 없이 던진 말을 손수 읊으며 되돌려주자, 칼리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어갔다.

말이 안 되니 힘으로 밀어붙일 셈인지 우악스러운 손길이 클로에의 손목을 붙들었다. 팔이 뒤틀린 채로 손목이 잡히니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클로에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지레 찌푸리자, 칼리스는 금세 자신감을 되찾았다.

“당장 헬레나에게 사과해.”

그의 의기양양한 턱짓이 이어졌다.

“사과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 감히 명령하지 마.”

“아직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군.”

“왜. 이번엔 손목을 부러뜨릴 건가? 여기서 분란을 일으켜 좋을 건 없을 텐데.”

“분란을 일으켜 좋을 게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어차피 입방아에 오르는 건 너만이 될 거거든.”

칼리스는 제 연인과 달리 타인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자신은 지탄으로부터 보호받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일개 왕국의 공주와 세기의 영웅은 다르니까. 내가 받는 것이 존경이라면, 넌 멸시뿐일걸.”

모든 사람이 오로지 신분만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진 않을 텐데.

그러나 얕은 가치관보다도 클로에를 웃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영웅?”

스스로를 지칭하는 단어.

세기의 영웅.

클로에는 조소를 머금은 채로 되물었다.

“처음 알았어. 세기의 영웅이 일개 왕국의 공주에게 팔려올 수도 있다는 것을.”

“…….”

“그것참 대단한 영웅 나오셨군.”

클로에를 수도 없이 괴롭히던 뾰족한 말들. 이번엔 그녀가 직접 칼자루를 쥐어 상대에게 넘겼다.

그리 당당하다면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책임을 떠넘겨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부흥을 막기 위해 왕실이 멋대로 결혼을 추진했노라, 라면서.

하지만 칼리스는 더없이 잠잠했다.

인정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부정하자니 계약으로 얽힌 이야기가 있으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비로소 잠잠해진 상대들에 흡족했다. 차분해진 멍청이들을 향해 조소를 흘려준 뒤, 자리를 떴다.

쭉 걷다가 모퉁이를 돌자 주위에선 어쩐지 익숙한 향이 났다.

***

저녁 식사 때도 그녀는 황제의 개인 식사실에 불려 갔다.

“회의를 잘 마쳤다고 하더군.”

“네. 다행히 제일 큰 뿌리는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대의 공이 커. 고맙다고 인사하지.”

“영광입니다.”

회의 성공의 축복을 선두로 두 사람은 식전주를 건배했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줄 것이 있지.”

식도 너머로 씁쓰름한 향이 밸 때쯤이었다. 품을 살피던 쿤이 그녀에게 봉투를 건넸다. 친우 쿤이 답신을 보낼 때마다 동봉하는 봉투였다.

그날 밤, 클로에로부터 받은 편지를 수신인에게 전달한 뒤 금세 답신까지 받아온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편지가 이리 빨리 오고 가는 거지?’

공작가로 보내달라 부탁한 게 하루 반나절밖에 안 됐다.

공작가로 가는 시간과 공작가에서 친우에게 가는 시간. 그리고 친우가 답장하고 다시 공작가로 오는 시간…….

모든 걸 고려하면 이리 빠르게 도착할 수가 없는데.

‘다들 편지 놀음에 많은 돈을 투자하나 보는군.’

하지만 자신의 친우를 의심할 생각조차 없던 클로에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친우의 답신이로군요. 감사합니다. 폐하 덕분에 이곳에서도 친우와 소통할 수 있어 행복해집니다.”

“그것참 다행이로군. 참,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인데, 혹 그대 또한 위험한 만남을 즐기고 있는 건가?”

“……예?”

클로에가 놀라 반문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사람의 편지에 큰 노력이 들어간다. 단순 친우끼리의 서신이라기엔 번거로울 정도로.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럴 리가요. 정말 친한 친우일 뿐입니다. 소중한…… 하나뿐인 제 편이지요.”

그녀는 한 마디 더 보태며 완강하게 못을 박았다. 그쯤 되니 쿤도 이 이야기에 관해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물 흐르듯 노련하게 주제를 바꿔 서신 쪽으로 중점을 맞췄다.

“편지는 꺼내 보지 않을 건가?”

“지금, 말입니까?”

“소중한 친우가 보낸 편지는 빠르게 확인해야지. 그래야 답신할 내용도 미리 생각해두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지금은 /폐하와의 식사에 집중하겠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다른 이와의 식사 자리에서 편지를 열어 볼 정도로 푼수는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내가 궁금하거든.”

그러자 쿤은 배려할 필요 없다며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무엇이 말입니까?”

“편안한 사람과 함께 하는 공주의 반응.”

마치 클로에가 황제의 앞에서는 불편한 사람을 대하는 듯 군다는 말 같았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클로에는 부정 없이 말을 아꼈다.

“……알겠습니다. 열어보도록 하겠습니까. 혹 읽어드려야 합니까?”

“예의도 없이, 사생활까지 침범할 생각은 없지.”

충분히 사생활을 침범하고 있건만, 지금은 선을 지키고 있다는 듯 우쭐거렸다.

여전히 클로에는 말을 아낀 채로 편지를 뜯었다.

편지를 뜯자마자 씁쓰름한 향이 클로에의 코를 찔렀다. 온갖 음식 냄새가 난무하는데도 독보적일 정도로 향이 짙게 풍겼다.

상석에 앉은 황제의 체취와도 엇비슷했다. 그의 품에 있더니 자연스레 밴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원체 편지에서 풍기던 냄새다. 그러면 반대로 황제가 편지의 향에 밴 것인가 보았다.

아둔하게 잡념의 마무리를 지은 클로에가 편지를 읽었다. 내용은 그녀가 일전 보냈던 것과 크게 벗어날 게 없었다.

현 황제의 이름을 안다며, 그와 이용이 같아 영광스럽다는 답변.

그리고 안부를 물으며, 전에 나누었던 클로에의 도움 요청에 관해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다 읽은 서신지를 테이블 한구석에 올려다두니, 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웃는군.”

“네?”

“그 편지를 읽을 때, 그대는 웃고 있다고.”

그의 말에 클로에는 손을 입가 쪽으로 옮겼다. 더듬거린 입꼬리 부근이 설핏 올라가 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친우께서는 뭐라던가?”

“대부분 전 편지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우스갯소리라든가 자잘한 안부 등이요. 아, 그리고 일전에 부탁한 게 있었는데 다시 묻더군요.”

도움을 요청한 지는 시간이 좀 흐르기도 했고, 그녀가 제국으로 오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흐지부지되었는데.

친우는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부탁이라.”

“어여쁜 마음이지요? 하지만 이번엔 거절하려고 합니다.”

“그새 마음이 바뀌었군.”

“든든한 뒷배가 생겼으니까요.”

클로에가 편지를 다시금 봉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직 온전히 신뢰할 순 없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제국의 황제보다 든든한 뒷배는 없을 것이다.

“그 믿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군. 안 그래도 내가 그대의 이혼을 허락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왔다.”

황제의 말에 클로에가 바짝 긴장했다.

“제국과 발론트 왕국이 동맹국인지라 다행히도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듯하더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럼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기는 언제쯤으로 생각하나? 필요한 절차들을 미리 준비해두도록 하지.”

솔직한 심정으론 한시라도 빨리 칼리스와 이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 년이었다. 그에게 농락당한 시간이 무려 일 년이란 말이다.

당장의 이혼이 칼리스를 물 먹일 순 있어도 몰락시킬 순 없으리라.

클로에는 그보다 궁극적인 것을 원했다.

“서로에게 너무나도 기쁜 날인, 종전 기념일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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