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너와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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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너와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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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너와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2023.06.02.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 강렬한 햇볕.
갓 피기 시작한 꽃들은 가을의 햇살에 만개하고 있는데, 정작 꽃이라 불리는 헬레나는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오늘도 헬레나 님께서 회의에 참석해주시면 됩니다.’
점심때까지만 하더라도 신이 나 있었던 그녀는, 황제의 뜻을 전하러 온 보좌관의 말에 곧장 절망했다.
어제부터 헬레나가 클로에 대신 회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참여하게 된 회의에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한창이었다.
축제의 큰 틀을 정했으니 이젠 세부적인 것들을 정해야만 한다며, 회의에 참석한 자들은 축제 때 쓰일 축사, 혹은 크게 열 축제 행사 같은 것을 논의했다.
‘헬레나 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예?’
‘이번 축제에 있을 축사 말입니다. 폐하께서 어떤 말을 하셔야 좋을 것 같습니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던 헬레나에게 회의장이 물었다.
그 말에 헬레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덕담이요…….’ 따위의 지극히도 평범한 대답을 꺼냈다.
애초부터 그들은 기대한 것도 없었는지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데, 그 태도가 더욱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칼리스만 회의에 들어가 홀로 남게 되는 게 싫었건만, 지금은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 게 훨씬 싫었다.
“나 회의에 들어가기 싫어!”
헬레나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킨 그녀에게 신하들은 가정교사가 숙제 주듯 아이디어를 생각해오라 요구했다.
일단 알겠노라 했지만, 크게 떠오르는 수가 없어 막막했다.
변명이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다.
큰 축제에 가본 적도 없는데, 체험해본 적도 없는 곳을 직접 주최해보라니. 분수에 맞지 않은 임무였다.
자신의 연인을 측은한 시선으로 훑던 칼리스는 이윽고 상냥한 손길로 헬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쩌겠어. 폐하의 명인걸.”
“그냥 공주를 부르면 안 되는 거야?”
“나도 그걸 건의해보았지만, 의장부터가 안 된다 거절하던걸. 다 사정이 있나 봐.”
“왜 공주가 할 일을 내게 떠넘기는 건데? 그 여자만 편애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 체해도 클로에가 영 부러웠던 것인지, 그리 말하는 헬레나의 입이 댓 발 나왔다.
“그래도 이번 회의를 성황리에 끝내야 내가 폐하께 우리의 결혼식을 부탁할 면목이 있지.”
“결혼……?”
생각만 해도 벅차오르는 단어.
순간 축 처져 있던 헬레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뒤이어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세상에, 결혼식을 하는 정부라니!
만일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다면, 헬레나는 정부가 아니라 두 번째 부인으로 인정받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오늘 발표할 게 없어…….”
“저런, 그럼 오늘은 쉴까?”
“정말? 그래도 돼?”
“오늘은 네가 자료 조사를 하러 갔다고 할게. 대신 내일 회의에는 꼭 기발한 것을 생각해 와야 해. 알겠지?”
“응!”
해맑아진 그녀가 여느 때처럼 귀여운 미소로 화답했다.
칼리스를 배웅한 뒤, 헬레나는 시녀의 도움을 받아 황궁 도서관으로 향했다.
‘신문……. 신문…….’
도서관에서 과거 출간된 신문을 읽으면 도움이 될 거란 칼리스의 조언을 따라 헬레나는 가장 먼저 신문을 찾아보았다.
제국에서 열린 축제 날짜를 전부 기억해두었으니, 그날 출간된 신문을 찾으면 되었다.
현황제 때 열렸던 큰 축제로는 그의 즉위식과 각종 승전 기념식이 있었다.
헬레나는 신문사마다 발매했던 신문들을 모조리 가져와 읽었다.
대략 두 시진 동안이나 헬레나는 그것들을 정독했다.
이해가 안 되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았고, 신문에서 그럴싸한 주제가 나오면 또 다른 신문사의 신문을 읽으며 보충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지식이 늘었다고 해서 곧바로 영감이 떠오를 리 없다.
“꼭 오늘 안에 해가야 하는데!”
일이 풀리지 않아 심통이 난 헬레나가 메모지 위로 펜을 마구 끄적였다.
칼리스의 뜻대로 되려면 주어진 일이라도 잘해야 헬레나 또한 내세울 게 생길 텐데.
게다가 신하들이 묘하게 자신을 클로에와 비교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 체면이 서질 않았다.
그 의지로 버텨왔건만, 막상 되는 게 없다 보니 객기마저도 한풀 꺾였다.
침울해진 헬레나가 씩씩대며 책장 안에 신문을 던지다시피 꽂았다. 애꿎은 물건에 분풀이하니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
잠시 명상이라도 하면 나아지겠거니, 그녀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갔다.
‘어?’
그때, 한 자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제국과 왕국의 종전 기념일 축제?’
친숙한 단어에 헬레나는 홀린 듯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그녀의 손엔 테이블 위 서류가 들려 있었다.
정갈한 글씨로 쓰여 있는 제목.
가만히 읽어 보니 지금 헬레나에게 딱 필요한 거였다. 아마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닐까 싶었다.
‘읽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읽어봐도 되려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헬레나가 종이를 가지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왜인지 이것만큼은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집중해 종이를 읽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이거 지금 회의 이야기 같은데?’
세세한 내용까지 전부 겹치는 게 단순 우연의 일치일 리 없다. 혹시나 하고 맨 뒷장을 살펴보니, 작성일이 최근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제국 축제와 관련된 자료이리라.
보고서 안에는 글쓴이의 적나라한 생각들이 적혀 있었다.
축제의 주제와 그 주제에 어울릴 수 있는 놀이, 그리고 이번 축제가 불러일으킬 나비효과 등.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좋다!’
완벽하게 정리된 보고서 덕분에 활자 읽기를 싫어하던 헬레나도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집중해 읽을 수 있었다.
‘다시 제자리에…….’
덕분에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지 느낌이 왔다, 이제 윤곽이 잡혔으니, 헬레나 또한 글쓴이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가면 된다.
‘놓을 필요가 있나?’
하지만, 헬레나가 읽은 이 보고서만큼 뛰어나진 않겠지.
헬레나는 제 품에 고스란히 안긴 종이를 쳐다보았다. 그다음으론 종이가 놓여 있던 자리를 주시했다.
읽는 데 한 시진이나 걸렸지만,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써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이것만 있다면, 내일 있을 발표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겠지.
헬레나는 혹여나 주인이 되돌아올까 조급해져 쫓기듯 도서관을 나섰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보고서를 다시금 정독했다. 그녀의 옆엔 내일 발표 내용을 적을 노트가 함께했다.
간략하게 발표 계획서를 작성한 후엔 차차 보고서를 베꼈다.
‘다 썼다!’
보고서의 내용이 워낙 길어서인지 베끼는 데에만 한 시진이 넘게 걸렸다. 페이지도 무려 여섯 페이지가 넘었다.
온전한 제 것도 아닌데, 그게 제 업적처럼 느껴졌다. 헬레나는 알고도 남는 내용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빼 먹은 건 없겠지?”
어느덧 칼리스가 회의에서 돌아올 시각이었다.
헬레나는 자신의 능력을 그에게 뽐내고 싶었다. 보고서를 읽고 눈이 휘둥그레진 연인이 내어줄 다정한 손길도 무척 기대됐다.
“제목 바꿨고―.”
미래가 기대된 헬레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종이를 검토했다.
“글씨체도 마음에 들고―.”
작성자의 글씨가 워낙 예쁜 탓인지, 필사하는 헬레나도 영향을 받아 글씨체가 더욱 예뻐졌다.
원래는 삐뚤빼뚤 어린아이 그림처럼 보기 싫었는데, 지금은 고상한 귀족들의 것 같아 마음에 쏙 들었다.
“안 쓰여 있는 부분은 전부 내가 채웠고―.”
뒷부분이라 해보았자 문장의 끝맺음이라든가, 전체적인 내용 정리에 불과했다.
처음에야 귀찮았는데, 나중이 되고 나니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뒷부분이 비었다는 건 헬레나가 들고 온 게 원본이란 거니, 베낀 걸 들킬 불상사도 없다는 뜻이므로.
“정말 끝이다!”
필사할 때보다 훨씬 엄격하게 검토한 헬레나가 만세 하며 끝을 알렸다.
이번 일로 성취감과 뿌듯함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배워갔다.
“잘 있었어. 헬레나?”
“칼!”
때마침 칼리스도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다.
제멋대로 신이 난 헬레나는 배가 고픈지 식사하러 내려가자는 그의 제안에 대답하지 않았다. 방실방실 웃으며 제가 쓴 것을 내밀 뿐이었다.
“오늘 쓴 거야?”
“응!”
“짧은 시간에 기특하네. 잘했어.”
척 보아도 엄청난 양에 칼리스가 넌지시 놀랐다. 자료 조사를 하라며 헬레나를 도서관에 보내긴 했으나, 이렇게 본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아이디어 한두 개쯤 구상해올 줄 알았는데, 기특하게도 열심히 임했나 보다.
“읽어봐!”
“지금?”
“응! 나 엄청 노력했단 말이야.”
“빨리 칭찬받고 싶은 거구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봐.”
허리를 감싸는 두 팔에 칼리스가 못 이기겠다는 양 웃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헬레나가 건넨 문서를 읽었다.
긴 분량에 놀란 건 맞지만, 솔직히 기대심은 없었다. 장황하고 반복적인 말을 늘여놓으며 분량이 길어졌다고 생각했다.
“……헬레나.”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내용의 중점만이 적혀 있었다. 글마저도 잘 조각되어 있어 술술 읽혔다.
선 자리에서 반쯤 읽던 칼리스가 감탄한 얼굴로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에는 자랑스러움이, 입꼬리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단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걸 쓴 거야?”
“사실 전부터 쓰고 있었어. 칼리스가 하는 말을 몇 개 주워들으면서 혼자 생각해봤었거든!”
그저 칭찬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였을 ‘짧은 시간’에 헬레나가 뜨끔해 변명했다. 그러고 보니 이 분량을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쓴 것은 말이 안 되었으므로.
헬레나의 말에 칼리스는 더욱 놀랐다. 만찬 시각, 그가 고민 차 실없이 던진 말들을 헬레나가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게 갸륵했다.
“저번 발표 때는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왔었구나.”
“응. 대신 글로 정리했어. 잘 썼어?”
“지금 당장 넘겨도 손색이 없는 정도인데? 대단해.”
“다행이다! 내가 잘하면 칼 체면이 좀 살까 싶어서 노력했어. 우리 결혼식 해야지!”
“헬레나! 너는 내 영원한 보물이야!”
칼리스의 칭찬에 헬레나가 배실 웃었다.
도둑질은 엄연히 나쁜 것이라 들었다. 그래서인지 헬레나의 마음이 콕콕 쑤셨지만, 그마저도 금방 묻혀버렸다.
‘그래! 간수하지 못한 사람이 잘못한 거지!’
그와 결혼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