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잃어버린 보고서의 행방 (34/46)


#34. 잃어버린 보고서의 행방
2023.06.03.


다음 날, 헬레나는 위풍당당한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왔다. 설레는 마음에 회의 시간보다 반 시진은 일찍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의장이 들어왔다.

“오늘은 참석하셨군요.”

엄연히 자료 조사를 위해 결석했던 것인데, 그는 헬레나를 땡땡이치는 여느 아카데미 학생처럼 여겼다.

“그럼요! 덕분에 자료 조사를 마쳤거든요.”

“그러십니까? 그럼 본 회의 때 기대하겠습니다.”

의장은 기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그리 말했다.

이후 칼리스가 그녀를 뒤따라왔다. 빨리 가겠다며 아침 식사도 거르고 출발한 헬레나를 못 말리겠다며 가볍게 질책했다.

밤부터 고대하던 회의가 시작되었다. 전날 나누었던 내용을 축약해 발표하던 의장이 헬레나를 콕 집었다.

“헬레나 양?”

“네!”

“자료 조사를 위해 잠시 불참하셨죠.”

“맞습니다.”

“그럼 어떤 조사를 하셨는지 말해보시죠. 참, 축제 관련한 의견은 생각해오셨나요?”

뒤이어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장이 일어나란 제스쳐를 취했다.

들고 온 종이를 쥔 채로 일어나고는 전날 밤 발표를 위해 적어두었던 것들을 더듬더듬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포부에 찬 목소리로 서두를 뗄 땐 언제고, 헬레나는 금세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어……. 그게…….”

우물쭈물, 조그마한 입이 당황에 차 아무 말도 만들지 못했다. 간드러진 음성이 회의실을 메꾸며 시간을 지체시켰다.

헬레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일순 냉랭해졌다. 지레 겁을 먹은 그녀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소리쳤다.

“……죄송해요! 발표까진 미처 준비할 시간이 없었어요. 대신 보고서를 작성했으니까 그걸로 대체해도 될까요?”

의기소침한 질문에 의장이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실패를 예상했었는지 크게 질책하진 않았다.

“여, 여기 있습니다.”

머쓱한 손길이 이어졌다.

의장에게 서류를 건넨 헬레나가 이후 그의 눈치를 보며 자리로 되돌아갔다.

불현듯 마주친 칼리스의 눈에서 아쉬움이 역력했다. 늦게까지 준비한 헬레나의 부진이 아깝다는 양.

그녀는 위로 차 내민 연인의 손을 맞잡으며 생각했다.

‘이게 맞아.’

비록 싸늘한 평가를 받았을지언정 차후를 생각하면 이 선택이 옳았다.

칼리스가 지적한 대로 헬레나는 너무나도 짧은 새에 성장했다. 단 하루 만에 보고서를 완성하고, 발표 준비까지 마친 셈이니까.

보고서야 헬레나가 칼리스에게 변명한 대로 말하면 되었지만, 발표마저도 완벽하게 해내버린다면 그전에 실패했던 경험이 이상해진다.

대중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게 익숙하지 않아 발표 자체를 낯설어하는 게 그럴싸했다.

‘의장은…….’

헬레나의 시선이 자연스레 의장 쪽으로 향했다. 그는 성의 없게라도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을 것이었다.

흥미 없는 표정으로 그녀의 보고서를 뒤척이던 의장의 얼굴빛이 돌연 변색했다. 어느새 그는 돋보기안경까지 쓴 채로 헬레나가 가져온 보고서에 몰두했다.

‘역시!’

그 반응이 긍정적인 신호라는 걸 헬레나가 알아챘다.

급격히 조용해진 회의실에선 종이가 맞닿는 소리만 드리웠다. 간혹 의장이 내뱉는 감탄사가 감초 역할을 해주었다.

짝짝.

비로소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자, 전부 정독한 의장이 손뼉을 치며 상황을 일단락시켰다.

“완벽하군요. 공작부인께 도움을 청할 심산이었는데, 필요 없겠습니다.”

의장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나왔다.

“그럼 윗선에는 이 보고서를 그대로 올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헬레나 양.”

“네! 칭찬 감사합니다!”

뒤이어진 말이 헬레나의 심금을 울렸다. 꼭 클로에를 넘은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돌연 클로에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텅 빈 자리가 현재 그녀의 존재를 뜻하는 것만 같아 우스웠다.

그녀의 능력이 널리 알려지면, 저를 매몰차게 내치던 황제도 친분을 쌓길 바랄 테다.

헬레나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 자연스레 칼리스의 명성도 올라가겠지.

칼리스가 공작위를 하사받은 이후 황제는 그의 대활약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심을 끊었다. 어쩌면 그의 업적이 졸부에서 그치게 된 데에도 황제의 무관심이 한몫할 테다.

만일 헬레나가 두 사람을 이어준다면 칼리스도, 헬레나도 전부 귀족들에게 인정받을 것이다.

‘칼도, 업적도, 다 내가 가질 거야!’

***

클로에의 일과에서 도서관은 이제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 따로 작성해 올리기로 한 보고서를 끝마치기 위해서였다.

회의를 불참하며 남은 시간에 도서관에 있다 보니, 보고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

참조 부분만 쓰면 축제 기획안 작성도 어느덧 끝이었다.

‘내일 회의부터는 참석해봐야겠어.’

클로에가 참조 부분을 위해 참고한 서적과 신문을 둘러볼 때였다.

“왕녀님!”

누군가가 도서관에 헐레벌떡 달려왔다.

남자는 뭐가 그리 급한지, 기본적인 인사조차 잊은 채로 달려왔다.

‘이름이 딜런이었던가.’

비뚤어진 외알 안경을 고쳐 쓰는 남자. 쿤의 개인 보좌관이었다.

제 주인을 닮아서인지 부르는 것도 클로에를 부르는 호칭마저도 일관성 있다.

“무슨 일이지요?”

“그! 왕녀님의!”

흥분했는지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던 딜런은 곧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교적 한산했지만, 전하고자 하는 말이 새어 나가서는 안 되었다.

“……하녀를 담당하는 주치의가 왕녀님을 찾으십니다.”

이윽고 그는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다시피 했다.

“……! 제인이!”

놀라 덩달아 목소리가 커졌던 클로에 또한 주위를 의식하고선 목소리를 낮추었다.

“깨어났다고 하던가요?”

“저는 관련인이 아니라 아는 게 없습니다. 왕녀님께서 주치의를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가보지요.”

그녀는 말할 시간도 아깝다는 양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딜런은 역시 보좌관이라 그런지 클로에가 아직도 헤매는 복도의 지리를 잘 알았다.

“안에서 주치의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클로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주치의가 왜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제인이 깨어난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것인지.

클로에의 방 안에 숨겨진 제인의 처소에 들어가니 의자에 앉아 있는 주치의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제인을 확인한 클로에가 안심했다. 안색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걸 보면 최악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클로에를 부른 건 아닌 듯했다.

“제인의 일로 불렀다고 들었네.”

“네. 왕녀님. 하녀가 조금 전, 잠깐이지만 의식을 되찾았던 것 같습니다.”

“눈을 떴다는 말인가?”

“예. 지금은 다시 의식을 잃은 듯 보이지만요. 지금처럼만 계속 회복에 힘을 쓰다 보면 정신이 되돌아올 겁니다.”

희망적인 주치의의 말에 클로에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처음 제인을 보았을 땐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는데. 이젠 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니.

떠나는 주치의에게 연신 고맙다 인사하던 그녀는 볼일이 끝난 뒤에도 계속 방에 머물렀다.

주치의가 붕대도 갈아주고, 상처도 치료해준 덕에 클로에가 해줄 것은 없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혹시라도 제인이 다시 눈을 뜨게 된다면 그 광경을 꼭 보고 싶어서.

‘보고서는 이곳에서 마무리해야겠어.’

그러다가 문득 도서관에 두고 온 보고서가 생각이 났다.

기왕 제인의 옆을 지키는 동안 보고서도 함께 작성하면 시간이 효율적으로 나뉠 것 같았다.

책은 최대 열 권까지 대여할 수 있었으므로 딱 충분했다.

근육이 뭉치지 않도록 열심히 제인의 다리를 마사지하던 클로에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빨리 움직인 덕에 황궁의 도서관이 닫기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디에 있지?’

빠르게 보고서를 가지고 올 심산으로 그녀의 자리를 훑어보았지만 보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책을 정리하고 있는 사서를 찾아 물어도 오늘 발견된 분실물은 없다니, 요긴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아…….’

막간을 이용해 구석구석 뒤져보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행방은 묘연했다.

‘누가 가져갔을 리는 없는데…….’

타인을 의심하기도 뭣한 상황인 게, 일개 보고서를 가져가보았자 할 것도 달리 없기 때문이었다. 기밀 정보도 아니고, 곧 있을 축제의 아이디어를 가져가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혹시 청소부가 쓰레기로 착각하고 버리기라도 한 걸까?

어쨌든 클로에가 보고서를 찾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다시 써야겠군…….’

일주일 내내 매진한 결과 슬슬 완성해가던 보고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그나마 다행인 건 열심히 검토한 덕분에 쓴 내용과 서적들을 참조한 부분이 기억이 난다는 거다. 그러니 기억을 토대로 작성하면 금방일 것이다.

‘의장에게는 보고서를 쓰는 데 조금 오래 걸린다고 말씀드려야겠어.’

내일 보고서를 전달하고, 회의에 참석하려던 계획은 강제로 무산되었다.

내일 회의실에 가서 상황을 알린 뒤 금방 보고서를 제출하면 될 테다.

그리 생각하며 클로에는 아쉬운 마음을 덜어냈다.

다음 날, 클로에는 조찬을 안내하러 온 시녀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방에서 식사했다.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일분일초가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점심이 되니 보고서가 반 정도는 완성이 되었다.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적는 바람에 손목이 통증을 호소할 정도였다.

클로에는 휴식을 취할 겸 간단히 점심을 가진 뒤 바로 회의실로 달려갔다.

의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회의 시각보다 일찍 도착해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인? 아, 오늘부터 회의에 참석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저 또한 그러려고 했는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겨버려서요. 그걸 말씀드리려고 방문했습니다.”

“저런,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냐 묻는 의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의장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외였다.

“하하. 그걸 신경 쓰고 계셨군요. 보고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부인.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바빠 그러질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괜찮다니요?”

“오늘 보고서를 하나 받았는데, 흠 없이 완벽해 이것을 결정안으로 올릴까 합니다.”

“아…….”

“부인께서 처음을 잘 끊어주신 덕분에 이리된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모두가 노력해주신 덕분이지요.”

짐짓 너그럽게 미소 지으나 클로에의 속은 아쉬움에 가득 차 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녀의 보고서도 최종안으로 고려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당장 비교할 실물조차 없었다.

기획안을 잃어버리지만 않았더라도 아쉬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어느 분의 의견이 수렴되었을까요?”

“왕녀님이 회의를 비우셨을 때 대신 들어오신 헬레나 님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두 분께서 차례로 공을 세우셨군요.”

의장의 말에 클로에가 눈을 끔뻑거렸다.

“……네?”

“하하, 부인께서도 놀라시는군요. 사실 저 또한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습니다. 첫날에 헤매셔서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완벽하게 준비해 오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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