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우연일까? (35/46)


#35. 우연일까?
2023.06.04.


“그 아이가…….”

클로에가 놀란 듯 신하의 말을 곱씹었다.

“혹시 어떤 내용인지 여쭈어도 됩니까? 저 또한 채택된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만.”

“여전히 열정이 넘치십니다. 물론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알려드려야죠. 잠시 쉬셨지만, 회의에 참석하시던 분이니까요.”

신하는 너털웃음과 함께 헬레나가 회의에서 발표한 것들을 간단하게 읊어주었다.

‘맙소사.’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클로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신하가 말해주는 헬레나의 발표와 클로에가 작성했던 보고서가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축사로는 황제와 더불어 종전에 이바지한 칼리스가 함께하는 것. 더불어 축사 시 참여하는 이들 전부 조국의 갑옷을 입는 것.

축제 기간에만 특별히 왕국에서 유행하는 연극을 제국에서 개막하는 것.

또 귀족들을 위해서는 오페라를 여는데, 흘러가는 이야기는 같되 가사는 제국이 재해석해서 가기로 하는 것.

이외 자잘하게 준비한 행사들조차도 모조리 똑같았다.

하물며 제국과 왕국의 문화를 아우른 이번 축제가 추후 정치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던 두 국가에 유대감을 키울 것이므로, 각 국민 또한 동맹국에 관한 관심이 늘어날 것이란 주장 또한.

‘우연?’

클로에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섣부르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이 낳은 결론은 사무적이어야 할 일에 혼란만 줄 테였으니까.

‘아니, 우연이 아니야.’

하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상황을 헤아려도 헬레나는 의심스러웠다.

헬레나가 아닌 그 누구였어도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내가 잃어버린 보고서와 똑같이 써 왔다니.’

회의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헬레나가 하루 만에 저렇게 자세한 내용을 준비해갔다는 점부터가 수상했다.

‘자료 조사를 하러 간 것이라면 헬레나 또한 황궁 도서관에 갔을 테지.’

게다가 그날은 하필이면 클로에가 보고서를 잃어버렸던 날이기도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최종안으로 채택된 헬레나 양의 보고서를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개인의 보고서는 총괄자인 저, 그리고 윗선인 황제 폐하께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헬레나의 보고서를 확인한다면 모든 게 깔끔해질 텐데, 법도가 그러하다니 답답했다.

차라리 클로에의 보고서라도 들이밀며 비교해달라 부탁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실물 없이 머리에만 기록된 제 보고서를 보며 한탄했다.

‘보고서를 확인해봐야 해.’

클로에는 며칠간 노력해 완성한 제 보고서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헬레나라면 반발심이 더욱 크게 들었다.

물론 관리하지 못한 클로에의 잘못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녀가 가져가지 않았으면 잃어버릴 일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내게 권한이 없는 거라면…….’

보고서를 열람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단 두 명.

한 명은 회의장, 다른 한 명은 황제.

의장에겐 거절당했으니 이제 부탁할 사람은 한 명 남은 셈이다.

‘폐하께 감히 부탁을 드려도…….’

하지만 그에게 이런 것을 부탁해도 될까?

엄밀히 말하면 황실은 의견만 채택하면 되는 일이고, 클로에의 일은 개인적이다 못해 개별적인 것인데.

‘……쿤, 이라고 생각해보자.’

클로에는 황제를 제 친우에 빗대어 보았다.

사사로운 편지 따위를 주고받으며, 먼 곳에서도 안부를 묻던 사이인 그를.

***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고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이프로 고깃덩어리를 써는 손길에조차 태생부터 길러왔던 품격이 고여 있었다. 여상하다 못해 지긋지긋할 정도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손짓이, 샌드위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먹던 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클로에는 새삼스럽게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란 걸 깨달아버렸다.

“괜찮으니 말해봐. 공주.”

“……예?”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보이던데, 아닌가?”

가면 너머의 시선, 슬그머니 올린 입꼬리에서 보이는 옅은 친절.

하물며 달라진 말투에서조차 친우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클로에의 긴장이 눈 녹듯 풀렸다.

그래. 고고하고 모두에게 우상인 황제는, 자신과 절친한 친우다.

“오늘 의장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헬레나 양의 보고서가 결정안으로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어요.”

“그 후원자라는 여자 말이로군. 그대의 보고서는 어찌 된 것이지?”

“그게……. 잃어버렸습니다.”

“공주가 그런 실수도 할 줄 안다니. 놀랍군.”

돌아오는 지적에 클로에의 하얀 뺨이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언급하는 게 부끄럽던 참이었는데.

“오해는 마. 완벽함을 추구하던 공주도 꽤 사람 같다는 말이었어. 그래서, 그대가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뭐지?”

“예?”

클로에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거듭 되묻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인데, 황제 앞에서는 모든 말이 새롭게만 느껴져 저도 모르게 되묻게 된다.

“내가 필요해서 먼저 말을 건 거 아니었나? 내가 아는 공주라면 필시 그럴 텐데.”

“아…….”

질 나쁜 장난에 클로에의 뺨이 불구덩이가 되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쿤의 말이 맞았다. 클로에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했을 때는 전부 상대를 필요로 할 때뿐이었으니까.

“저, 그…….”

가장 예절을 지켜야 할 사람 앞에서 한없이 이기적으로 굴다니.

지금도 그렇다.

그가 클로에의 친우를 자처했을지언정 두 사람은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있는 자는 현재 제국의 우두머리였고.

클로에가 황망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제 결례를 부디 용서해주세요. 폐하.”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굴기는.”

“…….”

“오히려 날 찾아주니 고맙지. 공주에게 갚을 빚이 많아 곤란한 참이었거든.”

이어지는 너그러운 용서에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를 불러. 우습게도 난, 공주의 행복을 바라거든.”

거듭한 상냥한 목소리.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눈빛.

황제의 낯설고도 이질적인 모습에 누군가가 덧대어졌다. 첫 만남에서 감히 보필해주겠다던, 엄청난 약속을 하던 제 친우가.

‘아…….’

그곳에서 클로에는 황제의 진심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실로 빚을 갚아주고픈 마음에서든,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든.

남자는, 클로에가 행복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러니까…….”

황제나 친우나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인지하자 줄곧 머뭇거리던 클로에가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정체를 숨겨가며 클로에에게 다가온 황제의 의도가 이런 걸지도 모른다.

함부로 입도 열지 못할 황제에게 클로에가 가까워지도록 다른 쿤에 먼저 친숙해지게끔 하는 것.

“헬레나 양이 쓴 보고서가 공교롭게도 잃어버린 저의 보고서와 내용이 일치합니다. 그녀가 써온 시간과 제가 잃어버린 시간도 겹치고요. 확인을 위해 의장께 양해를 구하니, 권한이 없다며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결정안을 읽을 권한을 넘겨주었으면 좋겠다?”

“언감히 그것까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그녀의 보고서를 읽을 때 한 가지를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쿤은 구태여 반응하지 않은 채로 앞을 응시했다. 하던 말을 이으란 무언의 압박이었다.

테이블 밑, 드레스에 넌지시 올려둔 손이 동그랗게 말렷다. 드레스를 쥔 손이 굳은 다짐으로 뭉쳐져 있었다.

“참조입니다. 그 보고서에 작성자가 참조한 서적이나 신문이 적혀 있는지 확인해주십시오.”

***

오늘은 회의의 마지막 날이었다.

일정대로라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 더 진행되어 마땅하나, 윗선에서 이미 결정안이 수렴된 바람에 더 손볼 것이 없게 되었다.

구상은 끝났으니, 계획에 필요한 것들만 생각하면 되었다. 추후 축제 준비는 제국의 사람들로도 충분했다.

“모두의 노력 덕분에 성공적으로 설계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제국은 최고의 축제를 준비하겠습니다.”

의장이 단상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그러자 서로를 축하하는 짧은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좋은 기획안을 짜주신 헬레나 양께도 감사합니다. 헬레나 양의 보고서를 토대로 축제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신하의 부름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헬레나 쪽으로 향했다.

관심을 받은 당사자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조금 진정되고 나서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클로에 또한 사람들을 따라 손뼉을 쳤다. 그러다 무심코 바라본 상대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의기양양하게 시선을 맞받아치는 분홍빛 눈. 수줍게 물든 뺨과 달리 올라가는 입꼬리가 거만함을 드러냈다.

헬레나의 성격을 고려하건대, 정말로 헬레나가 클로에의 기획안을 가져가 베낀 것이라면 저리 당당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저가 저지른 짓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라도 의기소침하게 굴면 몰라도.

정말 우연의 일치인 걸까?

아니면…….

‘설마……. 그 보고서의 주인이 나라는 걸 모르는 건가?’

하기는, 도서관에 있던 것을 가져갔을 테니 주인을 모를 수 있다.

‘이 분위기라면 훗날 말하기도 뭣한데.’

가능하면 지금, 회의가 온전히 종결되기 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쿤이 조찬에 참석하지 않는 바람에 전날 그녀가 부탁했던 것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즉, 지금으로선 마땅한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어쭙잖게 주장해보았자 실질적인 보고서가 있는 헬레나를 이길 순 없을 터.

“그러면 회의를 마무리하며…….”

더 고지할 것이 없던 의장이 회의의 마무리를 알렸다.

마지막 끝마디가 돌연 묻히지 않았더라면, 회의실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곧장 해산되었을 텐데.

의장의 말을 기록한 종이를 정리하던 신하와 갈무리된 회의에 나갈 채비를 하던 칼리스와 헬레나.

그리고 꿋꿋하게 앉아 허공을 응시하던 클로에, 전부가 하던 것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따랐다.

뚜벅, 뚜벅.

회의실을 배회하는 발소리.

발을 내디디는 기초적인 행위 따위에 깃들어 있는 고품.

같은 땅 위에서 살아 숨 쉬고 있으나, 남자의 주변만 유독 특별해 보일 정도였다.

회의실에 중앙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황제가 멈추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곧 한 여자에게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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