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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보고서의 진짜 주인 (36/46)


#36. 보고서의 진짜 주인
2023.06.05.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의 시선을 받은 클로에가 제일 먼저 고개 숙여 인사했다.

‘폐하가 여긴 왜…….’

겉으로는 차분한 척한 그녀가 속에서나마 당황을 토로했다. 황제의 느닷없는 방문이 영 꺼림칙했다.

의장이 그러했듯 그 또한 회의 참석자들의 노고를 축하하기 위해서일까?

그쪽이 더 가능성 있겠지만, 왜인지 황제의 실 의도는 달라 보였다.

그럴 것이었으면 대개 회의가 시작될 때, 의장과 함께 등장했을 테니까.

설명도, 축하도 전부 끝나 파장 분위기인 지금이 아니라.

‘……설마?’

끝나갈 즈음 나타나 모두의 이목을 사는 것이, 클로에의 눈에는 계산적인 결과물로 보였다.

클로에의 시선에서 벗어난 황제는 저를 뒤따라온 딜런에게 귀엣말하느라 바빴다. 무언가를 명령하는 태세였다.

곧이어 딜런이 종종걸음으로 회의실을 떠났다.

두 사람의 묘한 행동에 기류가 이상해졌다.

모두의 집중 아래 쿤이 드디어 행동을 취했다. 발걸음을 옮긴 그가 U자형 테이블의 움푹 팬 부분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헬레나 양.”

일정 구간에서 멈춘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클로에와 농담할 때나 쓰이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음성.

목소리가 겨냥한 대상이 더딘 속도로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큰 공을 세웠다고.”

상대는 대답 채 하기도 전인데, 황제가 연이어 말했다.

“나 또한 어젯밤 전달받은 결정안을 읽었어. 총무의 말대로 흠잡을 데 없더군.”

“가, 감사합니다. 폐하…….”

어젯밤부터 수도 없이 받아온 칭찬.

하나, 같은 것인데도 쿤의 것은 결이 약간 달랐다. 가장 황송해야 할 칭찬이 매섭게만 느껴졌다.

상대의 입꼬리에 넌지시 걸린 미소 때문일지도 몰랐다. 미소의 내막을 알기 위해 가면을 들춰 보면, 막상 상대는 조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보고서에 참조 부분이 적혀 있지 않더군.”

“아…….”

뜻밖의 단어에 헬레나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다급한 호흡에 신음이 마구 뒤섞였다.

실제로 보고서를 쓴 건 헬레나가 아니기에 비워진 참조를 채워 넣을 수 없었다.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헬레나는 미묘하게 공격적인 쿤을 수상하게 여겼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을 의장님께 지적당하긴 했어요.”

그녀는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분위기를 휘둘렀다.

보아하니 황제도 물증은 없는 듯했다. 분명 악감정에 말미암은 의심이겠지.

“이렇게 본격적으로 기획안을 짜본 것은 처음이라, 참조한 것들의 출처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렇다면 변론엔 자신이 있었다.

헬레나도 마냥 생각 없이 베낀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초보자임을 내세웠다.

“그래. 처음엔 흔히들 하는 실수이지.”

그러자 황제도 수긍하고 넘어가는 듯했다.

“네. 다음부터는 꼭 쓸게요!”

“다음은 되었고, 지금.”

“네?”

“엄청난 공을 세웠는데, 흠이 있으면 안 되질 않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줄 테니 말해봐. 헬레나 양.”

검질긴 시선에 헬레나가 움찔거렸다.

헬레나의 업적을 추켜세워줄 테니, 단점을 보완해 채워놓으라는 황제의 말이 제법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매몰찼던 사람이, 적의 편에 서던 사람이 저를 지지해줄 리 없는데.

“너무 감사하지만, 이걸 어쩌죠? 제가 발표가 서툴러서인지 말이 당장 기억나지 않아요. 죄송해요…….”

서투르다며 기껏 준비한 발표도 거부했는데, 이상하게 보일 일은 없다.

“그럼. 서투르시다고 양해를 구하시는데, 넘어가 드려야지.”

“…….”

“말하는 것이 서툴러 걱정된다면, 손을 쓰면 되지. 앞에 놓인 종이에 참조 서적들을 써보아. 헬레나.”

“……예?”

“부디 쓰는 것까지 서투르다고 하진 않길 바라. 그대의 보고서가 그토록 완벽했는데.”

그의 지적에 헬레나가 멍하니 밑을 바라보았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탁상 위에는 만년필과 종이가 놓여 있었다.

“저, 폐하. 외람되오나 이미 누락된 참조 사항을 요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본디 함께 기재해야 마땅하지만, 도서관에 있는 서적들은 대개 제국의 저자들이니까요. 베낀 것도 아니고, 조금 인용했을 뿐이니 저작권에도 괜찮을 겁니다.”

그때, 구세주와 같은 의장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폐하께서 혹시 달리 걱정하시는 게 있습니까? 제가 감히 무슨 상황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도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겠습니다.”

의장의 말에 쿤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일은 무슨, 정말로 그녀의 공을 인정해주고 싶어 그러했지.”

“그건 아까 말씀드린 대로…….”

“확신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예?”

“그녀의 기획안에서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되었거든.”

의장을 바라보고 있던 쿤의 고개가 도로 헬레나에게로 향했다.

“그러니 헬레나, 부디 내 의심을 거두어줘.”

“……!”

의미심장한 말, 지금 헬레나를 바라보고 있는 가면 너머의 시선.

황제는 가벼운 의심에서 그치지 않고, 확신하고 있었다.

‘생각, 생각을…….’

헬레나가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도서관에 간 날, 헬레나가 읽은 서적과 신문만 하더라도 많았다. 그중 하나 정도는 보고서가 참조한 것들과 겹치는 게 있을 테다.

“저,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163년 10월 8일 ‘제니스 신문사’에서 출간된 신문. 그리고 ‘데먼느 크리하츠’ 저자의 「제국의 축제 일대기」를 참고했습니다!”

다급하게 외친 헬레나가 숨을 쌕쌕댔다. 잇따라 주변인들이 저들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헬레나의 말을 철썩 믿는 듯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눈앞의 황제뿐. 쿤의 의혹만 벗으면 되었다.

그 또한 께름칙할 뿐 그녀를 믿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물증도 없으니까.’

도서관에서 헬레나를 본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훔쳐 간 보고서의 주인도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완벽 범죄다.

“겸손하게 말하더니, 발표하는 데 손색없군.”

“감, 감사합니다.”

황제 또한 수긍하니, 상황이 마무리되는가 싶었을 때였다.

덜컥 열린 회의실의 문 너머로 딜런이 자취를 드러냈다. 그의 품속엔 책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힘겹게 걸어 나가던 딜런이 이내 헬레나의 앞으로 안고 있던 책들을 놓았다.

“그러잖아도 그대가 말한 책들을 전부 가지고 왔지. 여기서 찾아주겠어? 보고서에 그대가 인용했다고 쓴 것들을.”

황제의 말에 헬레나가 멍하니 밑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정말로 자신이 말한 책들을 가지고 왔다. 그뿐이랴, 자신이 일전에 읽었던 것들까지 가져왔다.

도난 방지를 위해 책을 가져올 때 이름을 남겨둬야 하는데, 그걸 용케 찾아내 읽고 가져온 듯했다.

“찾, 찾아보겠습니다.”

일단 뇌까린 헬레나가 책으로 손을 뻗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경직되었는지 손이 자꾸 떨려서 큰일이었다.

황제라면 이 떨림조차도 알아챌 텐데도.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그녀는 아무 책을 뒤척였다.

잘만 하면 비슷한 문장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머리는 물론 시야까지 새하얘져 버렸다. 이성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한참은 걸릴 것처럼 보였다.

“힘들어 보이는군.”

“…….”

“긴장해서 글자가 잘 안 읽히나 보지.”

목소리가 어느새 싸늘해져 있었다.

헬레나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지그시 입술만 깨물자, 상대가 거듭 말을 이었다.

“시간을 얼마나 주면 될까. 한 시진? 반나절, 하루?”

“…….”

“그럼, 찾아올 순 있겠나?”

가면 뒤에 숨겨진 눈빛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옅은 살구색 입술, 그 끝부분이 삐뚜름히 올라가 있었다.

명백한 조롱.

황제는 제가 설계한 덫에 걸린 헬레나를 비웃고 있었다.

“저, 저는…….”

안 된다.

헬레나가 베꼈다는 것이 들통나게 되면, 그녀가 받은 수혜가 모조리 사라진다.

그뿐일까?

회의 참석자들을 비롯한 궁인들 에게 창피를 당하는 것은 물론, 칼리스와의 결혼식도 사라지는 셈이다.

문득 마주친 칼리스의 시선이 묘했다.

이대로라면 연인의 의심 어린 시선도 추후엔 거대한 실망감으로 바뀔 것이었다.

절망에 빠진 헬레나가 다급하게 고개를 올렸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아, 아니에요. 폐하. 무슨 생각을 하시는진 몰라도 제가 쓴 게 맞아요.”

될 수만 있다면 상대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 것처럼 구는 처연한 목소리.

“나 또한 그대를 믿고 싶어.”

“…….”

“그러니 어서 내게 증명해. 아니, 모두의 앞에서 증명하고 억울함을 떨쳐 내자고. 헬레나.”

모두?

황제의 말에 헬레나가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단 칼리스뿐만이 아니었다. 의장을 비롯한 모두가 그녀를 의심 어린 눈초리로 훑고 있었다.

아…….

헬레나는 미처 소리 내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신음 대신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헬레나가 허겁지겁 다른 책을 폈다. 눈을 부릅뜬 채로 문장을 샅샅이 읽어 내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주장할 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예민해진 그녀의 귓속에선 시계 초침 소리가 연신 강조되었다.

“반 시간이 흘렀군.”

탁.

쿤의 혼잣말과 동시에 헬레나가 손짓을 멈추었다. 그때, 책상 끄트머리에 올라가 있던 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졌다.

남의 것을 주워와 만들어낸 헬레나의 모래성이 썰물에 스러지듯.

“해명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침묵을 택한 것은 그대야.”

“……그!”

“안타깝게도 나는 이제 익명의 주장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어.”

쿤은 딜런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이윽고 딜런은 일전에 전해주지 않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흐뭇한 얼굴로 종이를 훑어보던 쿤이 재차 헬레나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

「제국과 왕국의 종전기념일 축제」

헬레나가 도서관에서 발견했던 익명의 보고서와 같은 제목.

너무나도 흔한 제목이었지만, 그녀는 왜인지 소름이 돋았다.

설마하니 ‘진짜’ 주인이 나타난 건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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