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친애하는 친우의 글씨체 (37/46)


#37. 친애하는 친우의 글씨체
2023.06.06.


황제는 모두의 앞에서 보고서를 친히 읽어주었다.

“끝으로, 필자는 이 축제의 나비효과로 제국과 왕국의 연대감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종전 이후, 동맹국이 된 두 국가는 그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축제가 긍정적인 교류를 시작하는 주요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낭독하니 일반적인 기획안도 훌륭한 시가 되었다.

마지막 문장마저 읊은 그가 곧 의장에게 물었다.

“의장.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게 누구의 보고서 같나?”

“……최종안으로 채택된 헬레나 양의 기획안 아닙니까?”

“놀랍게도 다른 이의 것이야. 헬레나 양보다 더 빠르게 썼다고, 주장하는 누군가의.”

“예?”

“나 또한 헬레나 양을 전적으로 믿고 싶었으나, 저자의 행동이 내 신뢰를 깨트리니 하는 수 없군.”

쿤이 엄지와 검지를 맞물리며 큰 소리를 냈다.

딱!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황궁 도서관의 사서가 책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쌓아두었던 책이 무너져 휑해진 헬레나의 책상 위로 무더기가 다시 쌓였다.

“제보자가 말해준 참조 서적들이다.”

“…….”

“헬레나 양에겐 조금 더 시간을 주기로 하고, 이젠 제보자의 말을 들어볼까.”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정신이 없는 헬레나마저도 제보자의 신상이 궁금했다.

대체 누구길래, 이제 와서 잃어버린 제 보고서를 찾는 것인지!

“예. 폐하.”

기품 있는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헬레나가 줄곧 탐내왔던, 아닌 척 몇 번씩이고 곱씹으며 연습해왔던 그 목소리.

클로에 아르헨이었다.

“공주, 공주는 어떻게 그 보고서가 자신의 것임을 주장할 셈이지?”

“예, 폐하. 가져다주신 서적에서 제가 참조한 부분들을 읊겠습니다.”

“좋군.”

클로에는 제일 처음으로 「외교 정책론」을 가리켰다.

“보고서의 여덟째 페이지에서는 축제가 양국간의 친선을 다질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프리온츠 카멜’ 저의「외교 정책론」두 번째 챕터를 참조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필레어 왕국과 케넨 왕국을 예시로 들며, 그들이 매년 함께하는 축제로 유대감을 쌓았노라 말합니다. 또한, 저는 두 번째 챕터의 열다섯 번째 페이지, 다섯째 문단을 인용했습니다.”

이윽고 쿤은 책을 들어 클로에가 말한 문단을 읽었다. 보고서와 비교하자, 정말로 그녀가 인용한 문장이 나왔다.

다음으로는 밀리언 페이퍼가 현황제의 즉위식 때 출간한 신문이 꼽혔다. 그다음으로는 헤르메세츠 저자의 「외교의 관점」이 나왔으며, 이 외에도 많은 책이 거론되었다.

“공교롭게도 공주가 참조한 서적들이 보고서에 적힌 내용과 일치하군. 이는 헬레나 양이 윗선에 올린 것과도 같고.”

회의실이 조용하게 술렁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헬레나 또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공주는 헬레나 양의 보고서가 그대의 것을 모방한 모본(模本)이라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이틀 전, 제 부주의로 황궁의 도서관에서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찾으려 노력해보았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습니다.”

“이틀 전 공주의 보고서가 사라지고, 어제 헬레나 양이 일치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가져왔다, 라.”

쿤이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인지하고 있을 테다.

참, 빌어먹게도 대단한 우연이라고.

그때, 회의실에 자리 잡은 분위기를 거스르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건 짜고 치는 연극이 아닙니까!”

돌연 일어선 헬레나가 책상을 내리쳤다.

잔뜩 흥분했는지 그녀의 머리칼이 헤집어져 있었다. 그녀의 밀색 머리칼이 앞으로 쏠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짜고 치는 연극?”

싸늘한 쿤의 목소리에 헬레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그녀의 명성은 최악으로 치닫게 되므로 두려울지라도 맞서야만 했다.

그녀의 부당함을, 모두에게 알려야만 한다.

“제보인, 그러니 부인께서 미리 참조 서적들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대도 찾지 못한 것들을, 부인이 하루 만에 찾는다, 라……. 그것 또한 대단한 능력이겠군.”

“…….”

“또한, 의장과 나를 제외한 자는 결정안을 열람할 기회가 없어. 그대의 보고서를 어찌 알고 공주가 참조들을 가져왔다는 거지?”

“폐, 폐하께서 부인에게 열람할 기회를 준다거나…….”

말을 끝내려던 순간, 누군가 힘주어 헬레나의 팔을 잡았다. 마치 그녀의 뒷말을 제지하려는 듯.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칼리스였다.

상황을 모면하는 건 좋으나, 황족을 모독하는 건 아니 되었다. 특히 황실에 밉보여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은 더더욱.

그러나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 헬레나가 뱉은 말 또한 주워 담을 수 없다.

“내가 굳이 공주에게 열람할 권리를 주었다고. 정해진 법칙조차 어겨버리고.”

회의실 중앙에 있던 몸이 다시금 헬레나 쪽으로 향했다. 길게 뻗은 기럭지가 성큼성큼 다가오니 몇 초 채 되지 않아 도착지에 다다랐다.

쿤은 자신의 얼굴을 헬레나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향에도 온도가 느껴질 수 있다면, 그의 향은 얼음장처럼 차디찬 냉기를 지녔을 테다.

“내가 왜.”

“…….”

“무엇 때문에 특권을 공주에게 쥐여주지? 내가 얻는 것이 무엇 있다고.”

헬레나 또한 묻고 싶었다.

일국의 황제가, 세계의 우두머리가, 어째서 클로에 따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지.

아니다. 어쩌면 헬레나는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실을 입에 올릴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제가 하고픈 말은…….”

“걱정 마. 헬레나. 증거는 이게 끝이 아니니까. 딜런, 그녀의 소개서를 전달해.”

그는 서둘러 다음 변명을 생각하는 헬레나의 싹을 잘랐다.

이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헬레나의 보고서를 책상 위로 던졌다.

“그대가 쓴 보고서. 문체가 정갈하다가도 삐뚤빼뚤해. 마치 누군가의 것을 베껴 쓴 듯.”

“……공식적인 서류라 힘을 들여 쓴 것뿐입니다!”

“그래. 안 그래도 그리 말할 것 같아 가져왔지.”

이번엔 쿤의 반대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 헬레나의 앞으로 던져졌다.

침으로 목을 축인 그녀가 그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달달 떨리는 손이 종이를 집자마자 바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베낀 글씨체가, 공주의 글씨체와 너무나도 똑 닮아서 말이야.”

회의 첫날 썼던 클로에의 자기소개서였다.

누구의 것처럼 허술하지 않고, 본연을 자랑하는 고상한 글씨체가 단연 눈에 띄었다.

“자, 이번엔 무어라 말할 거지?”

다른 이는 기억하나, 정작 글을 썼다 주장하는 헬레나는 알지 못하는 참조.

그리고 우연히도 겹치는 두 사람의 글씨체.

여기서 헬레나가 추접스레 변명을 이어가 보았자 믿어주는 이는 없을 테다.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헬레나를 칭찬하던 자들이 지금은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기 바빴다.

의장은 외려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에 힘없이 나뒹구는 낙엽처럼, 그녀의 눈동자도 쉴 새 없이 떨렸다.

“짐은 지금 그대의 다음 변명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거든.”

질세라 함께 떨리는 턱을 간신히 들어 올리면, 승기를 쥔 황제가 웃음을 짓고 있었다.

***

헬레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쿤의 바람대로 자백을 받아내지는 못했으나, 모두가 그녀의 소행을 알게 되었으니 피차일반이었다.

쓰러진 헬레나가 황궁의 의원에서 휴식을 갖는 동안 기사들이 그녀의 방을 수색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서 갈기갈기 찢긴 종이 무더기를 발견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클로에의 보고서를 파쇄한 것이었다.

확실한 물증이 없던 정황에서 증거까지 나와버렸으니, 그녀는 이제 가해자 신분이 된 셈이었다.

이후 클로에는 굉장히 찝찝한 사과를 받게 되었다.

의장은 그녀의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도서관 사서마저도 제 불찰의 용서를 구했다.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는데…….”

쿤과 함께 회의실을 나온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충격으로 쓰러진 헬레나와 그런 그녀를 짐짝 취급하듯 데려가던 기사들이 눈에 선했다.

“정정하자면, 일을 키운 건 쓰러진 장본인이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는 제게 언질도 없이 이런 일을 꾸미신 겁니까?”

“공주를 위한 깜짝 선물이었지.”

그녀가 황당을 토로해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얄궂은 어깻짓이었다.

‘폐하? 이 시간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공주가 말했던 것처럼 보고서에 참조 부분이 빠져 있더군. 그래서 말인데, 레퍼런스에 쓰려고 했던 서적이 무엇들이지?’

어젯밤, 난데없이 방을 찾아와서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클로에가 읽었던 책만 해도 수십 권이었던지라, 실제로 쓰였던 것들을 생각하느라 진을 뺐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헬레나 양의 글씨체가 달라졌다는 건 어떻게 알아채신 겁니까?”

사실 클로에가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쿤이 헬레나의 글씨체 변화를 알아본 것.

글씨의 획이 군데군데 삐죽 튀어나온 것이 확실히 엉성한 태가 나긴 했지만, 의심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뿐인가? 그녀가 베껴온 글씨체가 클로에의 것이란 사실도 알아채지 않았나.

수십 년간 써온 클로에라면 몰라도, 타인이 그 사실을 알아채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글쎄…….”

“…….”

“친애하는 친우의 글씨체와 닮아있어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르겠군.”

아랫것을 대하는 태도라기엔 퍽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과한 호칭.

‘지금 뭐라고…….’

불범함을 느낀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친애하는……. 친우?’

우두커니 선 채로 말을 곱씹으니 그제야 의미가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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