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영웅의 두 번째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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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영웅의 두 번째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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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영웅의 두 번째 결혼
2023.06.07.
“으음…….”
헬레나가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닫지 않은 커튼 너머로 둥근 달이 보였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한 뒤 밤까지 잠을 잤나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계속 숙면을 하고 싶었으나, 오래 쉰 뇌는 활동하고 싶은지 빠릿빠릿했다.
그녀가 피로함을 주장하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문틈 사이에서는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칼은 아직 안 자고 있나?’
그러고 보니 침대 옆에 칼리스가 없었다.
창문 너머의 하늘은 까맣다 못해 암흑이 펼쳐지고 있는데, 제 연인은 함께 자지 않고 뭘 하는 걸까?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헬레나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랜턴을 들고 나가자, 탁자 위에서 턱을 괴고 있는 칼리스가 보였다. 쓸쓸한 눈빛이 그를 하루 만에 폭삭 늙어 보이게 했다.
그런 연인의 모습을 직관하는 건 더없이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칼……?”
헬레나가 조심스레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공허했던 눈빛에 잠시 감정이 깃들었다.
다만, 그 감정이 헬레나를 향한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원망의 눈초리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정녕 자신의 연인이 맞는가?
사랑스럽다며 입술과 살결을 문대던, 그 칼리스 아르헨이 맞나?
헬레나는 믿을 수 없었다. 오늘 그녀가 맞이했던 현실 중 가장 개탄스러우며, 참담했다.
“칼…….”
지레 겁을 먹은 헬레나가 울먹이며 연인을 불렀다.
자신의 무서움을 강조하려는 심산이었는데, 상대는 여전히 불결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왜 그랬어. 헬레나.”
조용한 방 안에서는 히끅거리는 헬레나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뭐, 뭘? 왜 그래 카알…….”
“뭔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닐 거라 믿어.”
“내, 내가 실수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실수?”
칼리스가 나지막이 되뇌었다. 무미건조한 어투가 그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놀란 헬레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자칫하면 랜턴을 떨어트릴 뻔했다.
“네가 한 짓이 고작 실수라고? 클로에의 것을 베껴, 네가 썼다고 주장한 게 정말 실수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 그건……!”
“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인 거야? 말이라도 해봐. 칭찬이 받고 싶었던 거야? 왜, 왜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중요한 때에!”
어느새 일어난 칼리스는 헬레나의 어깨를 쥐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빠르게 랜턴을 바닥에 놓아 망정이었다.
무서운 얼굴로 자신에게 엄포를 늘어놓는 칼리스가 무서웠다.
칭찬?
그의 말마따나 주변인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것도 컸다.
또 공작부인과 비교하며 저를 깎아내리는 자들과, 클로에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결혼…….”
“뭐?”
“결혼이 하고 싶었어어……. 히끅, 칼이랑 결혼이 너무 하고 싶어서……. 뭐 하나 잘하면 거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어…….”
헬레나는 결혼이란 걸 하고 싶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좋아하는 꽃으로 장식한 부케를 들고, 사람들의 축복 아래서 사랑을 맹세하는 서약식.
여느 여자처럼 헬레나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결혼하고 싶었다.
생생하다. 클로에와 처음으로 대화를 했던 날, 그녀는 헬레나에게 독설을 내뱉었다.
헬레나가 칼리스의 옆에 당당하게 서 있을 날은 없을 거라고. 그녀가 그의 마음을 가졌을지언정 위치까지 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칼리스가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헬레나뿐인데, 어째서 그 옆을 함께하는 건 클로에인 걸까?
“그 여자는 다 가졌잖아……! 칼도, 돈도, 명예도, 전부! 근데 내가 그 여자의 아이디어 하나 훔친 게 그렇게 잘못이야?”
“헬레나.”
“이미 다 가진 여자가 뭘 더 가지겠다고……. 나는 그 여자가 쓴 건지도 몰랐단 말야. 억울해. 억울해!”
결국, 헬레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코에선 투명한 액이 줄줄 흐르고, 입에서는 끅끅대는 못난 소리만 연신 나왔다.
사랑하는 여자가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는 꼴이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격분하던 칼리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폭풍이 휩쓸고 간 그의 속내가 일순 고요해졌다. 그제야 칼리스는 자신이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가녀린 어깨를 부러뜨릴 만큼 막강했던 손아귀는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그는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다가, 헬레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미안해.”
목소리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해졌다.
돌아온 연인의 태도에 헬레나가 안심했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더더욱 쏟아져 나왔다.
“흑…….”
“내가 미안해. 네가 뭘 잘못했겠어. 막말로 그걸 흘리고 간 클로에 잘못이지,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내가 바보같이 너를 탓하고 말았네. 미안해. 울지 말고 뚝 하자.”
“칼 미워어……. 내 마음도 모르고 화나 내고……. 히끅, 나, 나는 그냥, 흑, 우리 둘을 위해 희생했던 건데에…….”
“결혼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눈물 콧물을 줄줄 쏟아내던 헬레나가 진정될 무렵, 칼리스가 약속했다.
그의 말에 팅팅 부은 눈이 크게 뜨인다. 금방 초롱초롱해진 분홍색 눈이 어찌나 어여쁘던지, 끄트머리 잔해처럼 남아 있던 칼리스의 노여움이 끝끝내 사라진다.
“정말?”
“응. 폐하의 노여움을 풀어드린 뒤 조심스레 이야기해보면 될 거야.”
“그러겠지? 칼은 폐하랑 나름 가깝고, 또…….”
“두 국가를 연대시킨 영웅이니까.”
“응! 칼은 영웅이지! 할 수 있을 거야!”
헬레나는 뺨에 난 눈물 자국을 그대로 안은 채로 곱게 눈을 접었다. 그러고는 무게를 실어 상대에게 안겼다.
‘그래. 나는 폐하께 평화를 선물한 귀인이니까.’
칼리스는 자신에게 안긴 헬레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동화 속 주인공을 동경하듯 외친 칭호.
그 단어를 듣자, 칼리스의 불안감이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
지극히 예사로운 조찬 시각이었다.
“폐하.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습니다.”
한 불청객만 없었더라면, 평소처럼 무난하게 흘러갔을 테다.
칼리스는 기사와 시종장의 만류를 무시한 채로 식사실에 난입했다.
이어 칼리스를 뒤따라온 기사들이 불청객의 양옆에 섰다. 쿤이 명령하는 즉시 칼리스를 끌어내릴 모양이었다.
되었다는 쿤의 손사래에 그들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칼리스의 팔을 내려놓았다.
“조찬을 망칠 정도로 급한 용건이 무엇이지?”
“일정보다 빠르게 왕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공작가에 급한 일이 생겨 어서 공작령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급한 일이라……. 그대의 정부가 저지른 결례 때문이 아니라?”
짓궂은 물음에 죄 없는 클로에가 욕을 보였다. 씹고 있던 음식물 대신 혀를 깨물어버린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입가를 닦았다.
칼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의를 표하기 위해 꿇은 한쪽 무릎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동요를 티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가 곧 대답했다.
“……그 건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헬레나 양의 무지함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아무렴, 공작이 원하신다면야.”
의외로 쿤은 사과를 받아주었다. 어제 헬레나를 교묘하게 괴롭힌 것치고는 지극히 무덤덤한 태도였다.
“용건은 더 있나? 손님과 조찬을 즐기는 중이라.”
오히려 그의 관심 주제는 다른 데에 쏠려 있는 것만 같았다.
“더불어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부의 결례도 용서하라더니, 또 있나? 해준 것이 많다지만, 바라는 것도 많아. 공작.”
“……외람되오나 폐하, 헬레나는 정부가 아닙니다.”
얄궂게 웃던 쿤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하지만 상대는 침묵이 긍정을 뜻하는 줄 알았는지, 뚫린 입을 마구 나불거렸다.
“헬레나를 공식적으로 제 부인으로 들이고 싶습니다. 이를 부탁드리고 싶어 마지막 인사도 드릴 겸 방문했습니다.”
쿤은 저도 모르게 나이프에 힘을 주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머리를 조아리는 남자가 그토록 한심할 수가 없었다.
은연중 클로에를 다시금 바라보노라면, 그녀는 생각 외로 평온해 보였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직도 공작을 사랑하나?’
질문 하나가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부정은 하고 싶은지, 열심히 도리질하던 여자의 모습도 떠오른다.
끝내 쿤도 그녀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 정부를 부인으로 들이는 것이면 들이는 것이지, 내게 허락을 구할 일이 무엇이 있나 싶군.”
“헬레나와 결혼식을 치르고 싶습니다.”
세계에서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듯 재혼도 허락되지 않았다. 신전에서 첩 제도를 허락한 것은 어차피 첩과는 사사롭게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신에게 맹세한 사람을 두고 다른 이와 함께 또다시 맹세하다니. 이는 신과의 약속을 부정하는 것이자 신을 향한 모욕이었다.
하지만 군림자의 허락이 이혼을 가능하게 하듯 결혼 또한 가능하게 했다. 즉, 황제의 승낙만 떨어지면 못 할 것이 없었다.
“사사로운 정을 보아서라도 부탁드립니다. 폐하.”
옆에 있는 클로에는 이혼을, 앞에 있는 칼리스는 결혼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쿤은 눈앞의 남자가 지극히 불쌍하고, 한심해 보이기 시작했다.
클로에로부터 빼앗은 것들로 정부 따위를 치장하려 드니, 쥐도 새도 모르는 새에 이혼을 당하는 것이겠지.
“그래. 사사로운 정을 봐서라도 허락해주지. 정부와 결혼하는 것이 아예 없는 일은 아니니까.”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차라리 고마운 일이었다. 그가 계속 헛발길질을 하는 덕에 그에게도 기회가 온 셈이니.
“……! 영광입니다. 폐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