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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사랑을 묻다 (39/46)


#39. 사랑을 묻다
2023.06.08.


칼리스가 멋대로 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애꿎은 클로에까지도 공작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황궁에 계속 있어야 했는데.’

아직 온전한 정신을 되찾지 못한 제인과 자신이 친우 ‘쿤’임을 밝힌 황제.

특히 후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정확히 성립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큰 사건이 터진 것에 비해 마무리된 게 없었다.

쿤이 자신의 정체를 암시한 이후, 관계에 변화가 생길 것이란 클로에의 예상과 달리 모든 것이 잠잠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홀연히 떠난 황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화를 걸어오리라 생각한 그날 밤, 황제에게서 아무런 신호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조찬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대로 굴었다.

조찬이 끝나기 전, 넌지시 주제를 꺼내보려 했건만 칼리스의 난입으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공작가에서도 정리할 것들은 남아있으니, 잠시 미뤄두어도 될 거야.’

공작가로 돌아온 클로에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짐이 많네.’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푸는데, 황제가 챙겨준 것이며, 의장이 챙겨준 것이며 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 많은 양을 그녀의 방이 수용하기엔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았다.

‘방을 바꿀까.’

클로에는 고민하면서도 괜히 방을 한 번 더 둘러보게 되었다.

역시,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지내오게 된 방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아도 작았다.

그때의 클로에는 불합리함을 견디는 것이 칼리스에게 할 수 있는 사죄라 생각했었다.

멍청하게도.

“바꿔야 당연한 것을 괜히 생각이나 하고 있고.”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턴 클로에가 밖으로 나왔다.

출장을 간 공작이 오랜만에 돌아와서인지 시종 모두가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부러 아래층까지 내려간 클로에는 셰인을 찾아 떠났다.

아직 끙끙 앓고 있는 헬레나를 담당하기 바쁜 셰인은 주변 하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분주하게 일하던 셰인은 막간을 이용해 기둥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셰인.”

“무슨 일이십니까?”

“방에 있던 짐을 전부 큰방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그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그녀에게 클로에가 다가가 부탁했다.

이야기를 들은 셰인이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얘기가 된 겁니까?”

“얘기가 되다니. 무슨?”

“독단 행동인지,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인지 여쭙는 겁니다.”

당당한 셰인에 클로에가 기가 찼다.

제아무리 허울뿐일지라도 클로에는 엄연히 이곳의 안주인이었다.

공작부인이 생각하기에 방이 작으니 처소를 옮긴다는데,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방을 옮기기 위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공작 전하나 헬레나 님께서 허락하신 게 아니라면, 저희는 도울 수 없습니다. 그게 공작가의 법칙이지 않습니까?”

셰인은 되레 클로에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대답했다.

“헬레나? 공작가에서 그녀의 허락이 필요하다니, 우습구나.”

“지금 공작가의 안주인은 헬레나 님이시니까요.”

대체 어떻게 버릇이 든 건지.

아르헨 공작부인은 평민 출신의 정부보다도 못하다는 말을 잘도 떠벌리고 다녔다.

“내가 공작가의 안주인이 아니라니 별수 없지. 클로에 발론트로 명령하마.”

클로에는 탄식할 틈도 없이 곧장 왕국의 법도를 가져왔다.

과연, 귀족 출신인 셰인이 스스로 왕족임을 주장하는 클로에를 거부할는지.

“방을 바꿀 테니 옮겨주거라. 설마, 이것도 거부할 셈인가?”

“하지만 이곳은 공작가…….”

“아, 공작가라 왕족의 말 따위는 성립되지 않는가 보군. 그럼 부디 그대의 아버지께도 그리 이르길 바라. 셰인 메르치아네.”

뒤따른 말에 셰인이 기겁했다.

클로에가 셰인의 가문을 일부러 강조한 것을 보면, 자신의 만행을 메르치아네 자작가에 고할 노릇인 거다.

고자질은 유치하나, 셰인의 만행이 더더욱 유치했다. 게다가 그녀의 행동은 공작가에서만 허용되는, 실제로는 귀족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행동이다.

이 사실이 메르치아네 자작가에 알려진다면 그녀는 큰 벌을 받을 터였다. 더불어 세간까지 퍼지게 된다면 그녀는 물론 가문 자체가 힐난 받겠지.

오늘 무언갈 잘못 먹어 저러는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일 클로에가 부조리함에 대응할 생각이 든 것이라면…….

“죄, 죄송합니다. 입을 함부로 놀렸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방을 지정해놓으시면, 부인의 짐을 다 그리로 옮기겠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눈앞의 여자에게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된 셰인이 사색하며 그녀를 보좌했다.

“말을 반복해야 할 수고를 덜어주어 고맙네.”

클로에의 감사 인사를 듣기도 전에 셰인은 하녀장을 찾아 떠났다. 하녀들을 소집해, 재빨리 클로에의 짐을 옮기라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금방 비어버린 자리를 보며 클로에는 나지막이 생각했다.

‘쉽구나.’

참 쉬운 일이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은.

저만 당당해지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조금 재수 없었던 것 같은데.’

자신의 말을 곱씹던 클로에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그다지 미련 없는, 발론트의 이름을 가져와 권력을 행사하다니. 게다가 왕궁에 있었을 때보다도 더더욱 단호하고, 따끔하게.

열흘 채 안 될 시간 동안 황제와 줄곧 붙어 있었기 때문일까.

가만 돌이켜보니, 방금은 묘하게 쿤의 말투를 닮았던 것 같기도 했다.

짐을 전부 옮겼다는 셰인의 말을 듣고 올라가자 방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제국에서 가져온 선물들도 전부 풀어 전시하거나, 클로에의 화장대 앞에 두고 갔다.

왕궁이나 황궁에서 머물렀던 방에 견주기엔 턱없지만, 원래 있던 방에 비하면 몇 배는 컸다.

중요한 건 방만 커져서 가구가 더 볼품없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작아진 방에 맞추느라 더 작아진 가구들이 도드라졌다.

‘조만간 가구도 알아보아야겠어.’

어차피 떠날 곳이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저택에서 며칠이라도 기분 전환이 되는 것이면 충분하지.

어차피 클로에가 소속된 왕실에서 착취한 돈이니, 죄책감이 들 것도 없었다.

“클로에!”

쉬고 있던 클로에의 귀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이 거칠게 열리며 목소리의 주인공이 들어왔다.

달려와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방에 들어온 칼리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금 뭐 하는 것이지?”

“공작이 보고 있듯 방을 옮겼지.”

클로에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셰인에게 한바탕 설명하느라 지쳤는데, 설마 그에게도 설명해야 하는 걸까?

“경어를 갖춰!”

의외로 그는 다른 것을 먼저 지적했다. 그는 말이 다소 짧은 클로에에게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황궁에서는 잘 참더니, 제 터전에 오니 야단법석이었다.

그녀가 왕족일지라도 이곳에서는 공작부인의 신분이었다. 공작이 원한다면 내키지 않을지라도 그의 요구에 따라야만 했다.

“예. 원하시면, 그렇게 해드리죠.”

분명 높임말을 쓰고 있지만,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진 어투.

일단 구색은 갖췄으나 정말 명분뿐인 말투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칼리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댈 뿐이었다.

그러다가 방 쪽을 가리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무슨 일이라뇨?”

“황제랑 정분난 것처럼 종일 붙어 있더니, 머리가 돌기라도 한 것인가? 잠시 총애를 받았다고,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 게 참 우스운 꼴이야.”

“전하의 정부를 일컫는 것이라면,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참입니다.”

“클로에 아르헨!”

크게 들어 좋을 목소리는 아닌데, 그는 오페라 가수를 연기하듯 꽥꽥 고함을 지르기 바빴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가문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느끼지는 못할망정 모든 걸 망치고 다니고 있질 않나!”

“망치다니요?”

“그대가 헬레나에게 창피를 안겨주지 않았나! 덕분에 아르헨 공작가의 명예도 실추되었지!”

시끄럽게 꽥꽥대는 고함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참,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외쳐졌다.

클로에가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제가 그녀에게 창피를 안겨주었다니,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공작. 헬레나 양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치르게 된 것뿐인데, 그걸 어찌 창피라 일컫습니까?”

“조용히 넘어갔다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될 일도 없었어!”

“그렇군요. 그건 제 관심 밖의 일이라 미처 생각하질 못했습니다. 저한테는 이깟 가문보다 저의 업적이 더 중요해서요.”

“클로에 아르헨! 정말…….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황실에선 헬레나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칼리스는 가문마저 등져버리는 클로에의 변화에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헬레나를 데리고 온 이후 잠시 삐뚤어지긴 했으나 일시적인 것이라 믿었다.

이렇게 계속, 반항하면서 날카롭게 발톱을 들 줄은 몰랐단 말이다.

“지아비를 대하는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고! 정녕, 나를 사랑하던 사람이 맞는 건가?”

클로에의 시선은 갓 언어를 배워 뇌까리는 짐승을 쳐다보는 듯 싸늘해졌다.

그녀로서는 옛사랑을 논하는 상대가 우스울 따름이었다.

마음을 알면서도 무참하게 짓밟은 당사자가.

네가, 감히.

“전하께서는 양심 없게도 사랑을 물으셨군요.”

가는 손가락이 칼리스의 가슴팍을 쓸었다. 곧 심장보다 조금 위에 있는 브로치를 쥐어 감싸더니, 힘을 주어 떼어냈다.

언젠가 클로에가 그에게 선물한 것. 그 브로치는 자그마한 손에서 벗어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따위가 짧게 대두된 침묵을 채웠다.

“묻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엔 희미하게나마 증오가 담겨 있었다. 이어지는,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같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뭐?”

“다시는 세상 밖에 나오지 않도록, 하여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도록, 저 멀리 묻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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