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왕궁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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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왕궁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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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왕궁 방문
2023.06.09.
“서신?”
“예. 부인의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서신은 그녀가 으레 친우와 주고받던 것과 달랐다.
애초에 그 서신은 누군가의 손을 타고 오는 일도 없었다.
처음에야 제인이 보내주는 줄만 알았지만, 그녀가 저택을 떠난 후에도 어김없이 서신이 도착한 것을 보면 다른 방법을 쓴 것이려니.
“알겠네. 확인해볼 테니 이만 물러가도 된다.”
“네. 필요한 게 있으면 또 말씀해주세요.”
깍듯이 인사한 시녀가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예전 같았으면 볼일을 마치자마자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을 텐데, 지금은 너무나도 온순한 양들이 되어 있다.
시녀의 발자취를 좇던 클로에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테이블에 다소곳하게 올려진 편지도 정말이지, 우습기 그지없었다.
편지를 열자 씁쓰름한 종이 냄새가 났다. 여상히 풍겨오던 향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 이제 서신이 올 리는 없는데도.’
알면서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 실망감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하나뿐인 친우를 잃었다는 상실감이란 함부로 묘사할 수 없다.
기대했던 내용과 다를 것을 알기 때문일까. 클로에는 섣불리 편지를 읽지 않은 채로 겉 부분만 매만지고 있다.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계셨던 걸까?’
첫 만남은 지갑을 돌려주겠다며 저를 끝까지 쫓아오던 친절한 청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우연인지, 철저하게 짜인 계획 아래서 실행된 연극인지는 알 수 없다.
클로에의 이혼을 돕고 싶었던 거라면 이번처럼 그녀를 황궁에 초대하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더욱 말끔하고 간결하게 끝나는 일인데도.
‘……잠시만, 그나저나 내가 전쟁터에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거지?’
삼 년 전, 제국과의 전쟁 때 클로에가 봉사 차원으로 병사들의 간호를 맡은 것은 왕실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적국이었던 황제가 그 사실을 어찌 아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한 게 여럿이었다. 겸연쩍게 여기지 않은 스스로가 수상해질 정도로.
몇 바탕 소동이 끝나고 이제야 살 것 같았는지, 클로에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대로라면 거대해진 잡념에 잡아먹혀 몇 시간을 끙끙 앓을 것이었다.
‘됐어. 나중에 여쭤보도록 하자.’
지금 열심히 추측해보았자 황제의 수를 파악할 순 없을 터.
이혼 절차를 밟고 난 뒤, 황제가 더는 필요하지 않을 때 후련하게 전부 물어보면 되었다.
미래를 기약하며 해결되지 않는 난제들을 치우다 보니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그제야 서신의 내용을 확인할 겨를이 생겼다. 이내 그녀가 봉투 안에 살포시 들어가 있는 종이를 꺼냈다.
편지의 꼭대기에는 왕가의 문양이 파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순간 진정되었던 클로에의 마음이 요동쳤다.
애써 울렁거리는 속을 견디며, 클그녀는 편지를 차근차근 읽어 내렸다.
「사랑하는 내 딸에게.
사랑하는 클로에. 잘 지내고 있느냐. 그리 떠나고 소식 한 통 없어 걱정하고 있었단다.
시간이 된다면 부디 아비에게 얼굴 한번 비춰주련?」
국왕은 그녀의 안부를 물으며 왕실에 방문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조만간 왕실에 들를 참이었지.’
속없이 이리 먼저 편지를 보낸 게 뻔뻔하지만, 클로에가 먼저 안부를 물으며 방문에 동의를 구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클로에는 편지를 정독하자마자 시녀를 불러 마부를 대기시켜놓으라 일렀다.
답신 대신 자신의 몸을 보내려는 속셈이었다. 지금 출발한다면 저녁 만찬 때는 얼굴을 비출 수 있을 거였다.
그들의 일정이야 알 도리가 없지마는 클로에가 거기까지 신경 써야 할 도리 또한 없었다.
***
클로에는 생각보다 이른, 저녁 만찬까지 많이 남은 시각에 도착했다.
예정된 일정이 없어서인지 클로에는 경비병 앞에서 가로막혔다. 그러자 몇 분 뒤 시종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그녀를 보좌했다.
“왕녀님? 말씀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뵙고 싶으시다길래 찾아왔지. 만찬 때 괜찮으신가?”
“예, 예. 오늘 따로 잡아두신 만찬 약속은 없으십니다. 들어오시지요.”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클로에는 응접실에서 대기했다. 그곳에서 시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니, 머지않아 발론트 국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로에! 아비가 보고 싶다 해서 불쑥 찾아온 것이냐? 깜찍한 선물이로구나.”
너털웃음을 지은 국왕이 이내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가벼운 손길로 찻주전자를 든 그가 딸아이의 찻잔을 먼저 채워주었다.
잔 위로 모락모락 나는 수증기를 클로에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물기 어린 연기 너머로 씁쓰름한 허브 향이 났다.
국왕이 클로에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한 것이었다.
“……무슨 연유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가족끼리 만나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니. 보고 싶어 연락했단다.”
다정한 목소리. 클로에가 돌연 고개를 드노라면, 마찬가지로 다정한 눈빛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그 일’이 있었을 때도 저 눈빛에 속아 부모를 용서했다. 이혼을 요구하러 왔을 때도 저 눈빛에 안심해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번에는 그의 의도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개의치 않았다. 클로에 또한 국왕에게 볼일이 있어 친히 방문한 것이었으니까.
“네. 저도요.”
아비를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그려낸 클로에가 찻잔을 들이켰다.
왕궁에서 머물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가 제일 즐겨 마시는 차였는데, 좋아하던 맛은 사라지고 특유의 떫은맛만 혀에서 감돌았다.
“그나저나 황궁에 다녀왔다고 하더구나.”
“아, 네. 아버지께서는 어찌 아셨습니까?”
“브리오트 경이 제국의 황궁 기사단에 입단했단다. 거기서 너를 보았다고 연락하더구나.”
“아…….”
“그곳에서 큰 공을 세웠다지? 축하한단다.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자랑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는구나. 너만큼 발론트란 이름에 응당하는 아이가 또 있을까.”
그녀에게 아르헨이란 이름을 뒤집어씌운 장본인이 저리 말하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와 긴밀하게 지냈다고 들었는데, 원래 친분이 있었느냐?”
“아뇨. 친분까지는 아니고 과거 인연입니다.”
“참 어려운 분이시지 않더냐. 나는 혹여나 그분의 심기를 거스를까 매 순간 걱정했단다. 뭐, 내 딸은 비범하니 걱정은 안 된다만.”
“그럼요.”
클로에가 간단명료하게 대꾸했다.
지금도 침착함을 고수하며 열심히 비위를 맞춰주고 있는데, 황제가 별 대수였을까.
“상냥하신 폐하 덕분에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만큼 힘든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배려는 제가 받을 대로 받았으니까요.”
소서 위 올라간 찻잔이 텅 비어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티스푼을 소서 위에 올려두며 제 의사를 내비쳤다.
소소하게 안부 인사도 마쳤겠다, 이제는 클로에가 왕궁에 들른 목적을 달성할 때였다.
“그나저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아버지.”
“아무렴 딸의 부탁이니 들어주어야 마땅하지. 편히 말해보아라.”
“그이와 관련된 일이에요. 지난번엔 다소 매몰차게 내치셔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부디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이, 지난번, 부디. 유달리 강조되는 몇몇 단어에 발론트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졌다.
“참고로 이혼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의 속을 읽은 클로에가 부드러이 덧붙였다. 잇따라 굳어 있던 발론트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졌다.
사랑하는 아비 역할에 매진하더니, 이토록 쉽게 속내가 드러난다.
“아버지가 허락해주지 않으시니 이혼할 수가 있어야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 보자니 억울해져서요. 다른 처분이라도 해야 응어리가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이 이혼이 아니라는 전제하에는 무엇이든 들어주마.”
“공작령을 제외하고, 그이의 앞으로 된 영지들과 매달 지참하고 있는 생활비를 전부 제 쪽으로 넘겨주셨으면 해요.”
계약 당시, 칼리스에게 지참금 차원으로 주었던 영지들을 제 앞으로 내놓으란 소리였다. 더불어 매달 지원하는 생활비마저도 단절하라는.
“그건…….”
발론트가 얕은 신음과 함께 말을 흐렸다. 요구를 들어주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이혼 말고 다 된다고 하시더니, 또 제약이 있나 봅니다.”
“아니, 이 아비는 너를 돕고 싶단다. 하지만…….”
“공작과 계약을 한 상태라 힘들다고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국왕에게 클로에가 질문했다. 무덤덤한 목소리에 그녀 특유의 고아한 웃음이 더해졌다.
“네가 그걸 어찌……?”
기밀 사항을 어찌 클로에 따위가 알고 있냐는 모양새였다.
‘역시 그 계약 때문이로구나.’
상대의 반응이 예상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해준 덕분에, 클로에는 새삼스럽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칼리스를 지원해주는 것은 왕실의 의사가 아니었다.
헬레나가 말한 계약 때문인 거라면, 근본적인 뿌리를 없애면 된다.
“그이의 정부가 내게 와서 일렀습니다. 결혼 전, 아버지와 그이가 비밀리에 계약 하나를 하셨다고요.”
저를 사랑해 청혼한 영웅이라더니.
그리 덧붙이며 빈정대고 싶은 것을 인내하며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그 계약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을 것 같은데, 제 예상이 맞을까요?”
“……큼. 맞다. 누설될 시 계약과 관련되어 이득 본 것을 전부 반환할 것은 물론, 막대한 위약금을 물기로 했지.”
“그 비밀리에 부쳐진 계약을 한낱 정부 따위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
“두 사람은 애당초 함께 일을 꾸몄습니다. 처음 왕실로부터 계약을 제안받았을 때부터요. 그 허점을 이용해서 공작가가 안정을 되찾은 반년 뒤 정부를 들인 겁니다.”
자세한 서술 없이도 발론트는 정황을 대번에 이해했다.
칼리스의 계획에 넘어가 돈줄 노릇을 한 국왕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아버지께서 그이에게 하사한 영지들이 대부분 높은 가치를 지녔더군요. 그중 하나는 다이아몬드 광산이 나와 떼돈을 벌고 있다죠?”
때는 클로에와 결혼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왕실이 내어주며 그에게 귀속된 남부의 땅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었다.
‘그대와 결혼한 건 내 행운이야.’
행복에 겨워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굴던 칼리스의 얼굴이 선했다.
그러고는 며칠 뒤 출장을 떠났고, 귀환과 함께 정부를 들였더라지.
지금도 그 다이아몬드 광산은 칼리스의 수입 중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걸로 대체하시면 되겠군요. 막대한 위약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