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우리가 다시 볼 날
(41/46)
41. 우리가 다시 볼 날
(41/46)
#41. 우리가 다시 볼 날
2023.06.10.
“은혜도 모르는 놈!”
왕실은 계약서 때문에 칼리스의 폭로전이 이어진 후에도 계속해서 재물을 가져다가 바쳤다.
하지만 상대방이 서약을 깨트린 이상 일방적인 기부를 지속할 필요는 없다.
“네 말대로 계약 시 명시되었던 지원은 일절 끊을 예정이다. 복지 차원인 영지 지원금을 제외한, 다른 생계비 또한!”
국왕이 엄하게 소리치며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럼 말씀드린 대로 부탁드릴게요.”
평소와 달리 깔끔하게 끝이 나서 좋았다.
제 일이 되니 따질 것도 없나 보았다. 국왕은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입는 것을 못 보고 살았으니까.
임무도 마쳤겠다,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클로에는 카우치에 살포시 올려둔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가려고 하느냐? 만찬이 곧인데, 함께하지 않으련?”
곧이어 국왕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홀연히 떠나려는 딸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린다는 태도였다.
그 애처로운 음성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호흡과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다음에요.”
그러다가도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편안히 행동했다.
나뭇가지가 잠시 흔들린다 하여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린다고 하여 다짐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버린 이들을, 나 또한 보내주기로 했잖아.’
구실뿐인 가족 앞에서 클로에 또한 구실뿐인 딸 행세를 하면 되었다.
“다음에 꼭 참석할게요. 오늘은 가족끼리 즐거운 식사하세요.”
다음을 기약하자며 함께 보인 미소는 여타 귀족들을 접대할 때나 내보이는 것이었다.
딸아이의 표정을 읽어낸 국왕은 더 보채지 않았다.
“그래. 만찬을 즐기고 가면 많이 늦겠구나. 몸조심하고 다음에도 들르렴.”
“네. 종종 편지할게요. 아버지도 부디 무탈하시기를.”
떠날 것을 허락받은 그녀가 미련 없이 걸어 나갔다. 방이 스산해서 그런지 유독 구두 소리가 크게 들렸다.
타박.
마침내 문 앞에서 그녀가 멈출 때였다.
문 벽을 짚으며 떠날 준비를 취하던 클로에가 불현듯 뒤를 돌았다.
“공작이 곧 아버지께 사업 투자를 제안할 거예요.”
막대한 부, 일시적이지만 한껏 빛나던 명예. 한때 몰락 귀족이었던 칼리스를 부상시킨 요인들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귀족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그것을 내내 제 결함처럼 여겼다.
그들과 어우러지려면 졸부 이미지를 버려야만 했으니, 칼리스는 그 대안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왕실에서 돈을 받아먹으며 사는 개가 아닌,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투자자들을 빙자한 인맥이 쌓일 테니까.
“좋은 아이디어가 생겼다며, 성공을 보장할 테니 함께하자고 아버지를 설득하겠죠.”
그렇게 시작한 사업 계획은 어느새 구상을 마쳐, 투자자를 찾으러 나설 지경까지 이르렀다.
제국에서 열릴 종전 기념일 축제 이후 그의 인기가 반짝 급증할 테니, 약삭빠른 그라면 필시 그때를 노릴 테다.
왕실과 공작가는 서로를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붙어먹는 공생 관계였다.
“이번 일로 두 사람이 함께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만일을 대비해 말씀드릴게요. 공작의 제안은 가차 없이 거절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왕실의 지원이 끊으며 두 사람은 완전히 틀어지게 되겠지마는, 혹시 모를 일이었다.
“참고로 사사로운 감정에 호소하여 충고드리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손해를 막아드리고자죠.”
“…….”
“그 사업, 곧 무너질 거거든요.”
***
클로에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악보(惡報)를 들어야만 했다. 며칠 내내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헬레나가 정신을 되찾았다는 소식이었다.
칼리스가 그러했듯 헬레나 또한 찾아와 한바탕 소동을 벌이리라 예상했건만, 정작 클로에를 찾아온 자는 따로 있었다.
“곧 헬레나의 탄생일이라 연회를 열까 해. 나와 결혼하기 전에 사교계에 그녀를 비칠까도 하고. 그대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미리 말하지.”
칼리스의 말에 클로에가 코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그리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었다고.
“저 좋으라고 말해두기는요. 귀족들을 초대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거겠죠.”
다른 목적이 있는 거면서, 부탁하는 와중에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꼴이란.
“그런데 왜 제 친우일까요? 공작의 친우를 부르시면 될 것을. 제 친우가 헬레나 양과 친해질 리는 없을 것 같은데.”
“허, 어린애들 장난이라도 칠 속셈인가? 그녀의 친우가 헬레나와 친해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다고!”
“그러게요. 어린애들 장난도 아니고……. 루크 남작은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제 서신에 매번 답장을 안 해주셨던 건지.”
클로에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양 한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크 남작은 칼리스와 오랜 친구로 둘의 결혼 이후엔 클로에와도 허물없이 지냈었다.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폭로전이 있기 전까지는.
‘비운의 신데렐라’ 사건 이후 그는 클로에를 철저히 무시했다.
남작은 신문사에 인터뷰를 자처하는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칼리스를 옹호했다.
그뿐인가?
그는 클로에를 사교계에서 따돌리기 위해 음침한 소문까지 퍼뜨렸다. 클로에가 그간 쌓아온 명성이 없었더라면, 귀족들은 그 소문을 끔뻑 믿었을 테지.
“남의 일은 끌어들이지 말지!”
“그럼요. 아무튼, 공작께서는 이만 방에서 나가주시겠어요? 부탁하신 대로 제 친우를 기꺼이 연회에 데리고 올 테니까요.”
클로에는 유달리 부탁이란 단어를 강조했다.
자존심이 상하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칼리스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 했으니 걱정 마. 나 또한 그대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게 지긋지긋하거든!”
그러고는 방문을 부술 기세로 닫았다.
‘탄신 연회라…….’
상대가 박차고 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클로에가 그의 말을 넌지시 곱씹었다.
정부의 탄신 연회를 열겠다던 남자의 이기심 덕분에 수개월 전 열렸던 클로에의 탄신 연회가 떠올랐다.
폭로전이 터진 이후 클로에의 탄신이 다가왔다.
명목은 세워야 했으므로, 급하게 아내의 탄신 연회를 주최한 칼리스는 그 명분으로 내로라할 귀족들을 초대하게 했다.
그리고 탄신 날, 칼리스는 정작 주인공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물며 탄신 선물까지도.
모두가 줄을 지어 그녀에게 선물을 줄 때, 남편인 공작만은 빈손이었다.
흔해 빠진 보석, 하다못해 길가의 꽃 한 송이라도 바랐던 클로에를 무자비하게 비웃듯.
그 광경을 보거나 들은 귀족들은 칼리스를 비난했다.
설령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을지언정 이건 클로에의 탄신회였다.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도의를 지키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그때 공작은 무어라 했더라.’
‘남’의 탄신이 그토록 중요한 일이냐고 비꼬기 바빴다.
‘이젠 남의 탄신이 중요한 일이란 걸 깨달으셨나 보지.’
클로에는 꽃잎을 떼 화분 위로 다시 올려두었다. 언젠가는 다시 소금 대용으로 쓸 날이 오겠지.
‘그럼 그 연회가 행복해질 수 있게끔 도와드려야지.’
이번에 열릴 연회는 비단 헬레나의 탄신만을 축하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귀족들 앞에서 저들의 관계를 보여줄 속셈인 거다. 더 나아가 축제 이후 있을 결혼을 발표할 테고.
‘감히 결혼이란 단어를 먼저 꺼내지 못하도록…….’
아직 굳건한 칼리스를 두고 클로에의 위상이 먼저 떨어질 순 없다.
‘내가 망쳐주어야지,’
고로 클로에는 탄신 연회를 망칠 계획이었다.
그녀는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올곧아진 눈높이를 쭉 유지한 채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잘 정돈된 편지지가 모여 있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종이를 쓸며 다양한 결을 느꼈다. 그러다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고민하기도 잠시, 바람을 가르듯 유려하게 뻗친 손가락이 양피지를 꺼냈다. 더불어 언젠가 국왕에게 선물 받았던 비싼 만년필도.
살결을 가를 듯 뾰족한 만년필 촉에 잉크를 충분히 채워 넣은 후, 앞서 준비해두었던 메모지에 연습 삼아 글씨를 썼다.
「사랑하는 나의 친우, 레리안느에게.」
편지의 첫 번째 수신인이 될 사람은 케르비오스 후작가의 레리안느 영애였다.
레리안느는 클로에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도 종종 서로의 저택을 왕래하며 관계를 유지했었다.
「잘 지내고 있니? 어느덧 여름도 지고, 차가운 가을바람이 북부를 감싸고 있어. 이런 날이면 추위에 약하던 네가 하염없이 떠오르는구나.」
늘 그렇듯 소소한 안부 인사로 서두를 끊는다.
「곧 공작가에서 탄신 연회가 열릴 예정이야. 공작이 정부의 탄신 연회를 챙기겠다고 하더구나. 내 친우까지 불러 정부를 축하해주어야 한다니, 그런 불결한 연회에 너를 초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어.
부디 와서 ‘공작의 정부’를 축하해주길 바라.」
클로에는 유독 정부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추신. 드레스 코드는 따로 없으니 레리안느, 네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오길 바라.」
마지막 온점까지 찍자 편지가 끝이 났다. 클로에는 천천히 만년필을 내려놓은 후 자신이 쓴 내용을 정독했다.
레리안느의 아버지인 케르비오스 후작은 첩 제도가 통과되자마자 보란 듯 저택에 여자를 들였다고 했다. 그 덕분에 순탄하던 후작가에 분열이 일어나고, 부부의 관계가 깨졌더라지.
클로에는 정부라면 치를 떨 레리안느에게 이 편지가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을 정정할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응을 끌어들이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는 게 정확할 테니.
편지에는 공작가의 인장 대신 왕가의 인장이 들어갔다. 발신인으로 아르헨 이름 대신, 클로에 발론트란 이름을 적기도 했다.
레리안느에게 보낼 편지를 한쪽으로 치운 후엔 새 양피지를 꺼냈다.
플렌 공작 영애, 크리스티닌 백작 영애, 헬시온 자작 영식, 한스 소공작…….
한때 그녀와 긴밀하게 지냈었던 자들에게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수를 세어놓아 미리 준비했던 양피지가 어언 한 장뿐이 남지 않았다.
오랜 필기로 군데군데 굳은살이 잡혀 있는 손가락이 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축제가 오기 전까지, 볼 사이는 아니겠지.’
클로에의 이혼을 돕겠다던 황제.
그녀가 축제 이후 이혼을 진행하고 싶다고 했으니, 그전까지 두 사람이 볼일은 없다.
‘하지만…….’
하지만,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은 되지 않을까.
게다가 황제는 직접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적도 없는데.
‘……보내자.’
비로소 그녀가 다짐했다.
그녀의 손이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우아하게 벌어졌다.
「나의 가장 친한 친우에게.」
서두 하나.
「그간 편지를 보내지 못했어요. 많이 기다렸다면 미리 사과할게요. 일전에 말했다시피 황궁에 다녀오느라 바빴거든요.」
서두 둘.
「공작이 정부의 탄신을 축하해주고 싶다며 연회를 주최했어요. 그곳에 친구도 부르라길래, 그대를 감히 불러봐요.」
서두 셋.
「그대는 우리가 언젠가 또 볼 수 있다고 했죠.
……그럼 그게, 그날이 될 수도 있을까요?」
본론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