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정부의 탄신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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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정부의 탄신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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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정부의 탄신회 (1)
2023.06.11.
특별한 일을 앞둔 공작가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공작은 오늘만을 고대했다는 듯 인력을 더 투입하는 유별난 일까지 벌였다.
값비싸고 반짝이는 것들이 공작가의 볼룸 (ballroom)을 가득 메꾸었다. 경매에서 사들인 예술 작품들과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세공사에게 맡긴 보석들이 공작가의 사치를 버젓이 전시하고 있었다.
‘꽤나 공들이셨군.’
테이블을 빼꼭하게 채운 샴페인 잔들이 눈에 띄었다.
잔의 입구에는 금가루가, 바깥쪽에는 고운 입자의 크리스털이 뿌려져 있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던 샴페인 잔도 돈을 물처럼 머금으니 화려하게 둔갑했다.
그게 딱 칼리스의 꼴처럼 보였다.
클로에는 방금 자신이 내려놓은 잔을 포함해 묘하게 각도가 맞지 않는 것들을 번듯하게 맞추었다.
이다음 다른 테이블의 식기와 접시까지 일일이 확인한 클로에가 긍정 사인을 내렸다.
“그래. 이 정도면 되겠구나.”
다른 것들도 계획대로 하란 명령을 마지막으로 중간 점검은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파우더 룸에 하녀들을 대기시켜놓았으니 마님께서도 이제 준비하러 가시지요.”
“그러마.”
클로에 또한 다가올 연회를 준비해야 했다.
파우더 룸 안에는 헬레나가 앉아 있었다. 주인공이라며 신이 나서 아침 댓바람부터 치장하더니, 공들인 태가 났다.
오랜 시간, 미흡한 관리로 인해 푸석해진 머리칼은 묶어 올린 후 보석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머리망 안으로 감추었다. 그 덕분인지 작고 어여쁜 두상이 도드라져 헬레나의 미모를 한결 돋보이게 했다.
“……아, 안녕하세요.”
헬레나는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상대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붉게 물든 뺨이 화장의 여파인지, 잠시간 나타난 얼굴의 변화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 모습이 성별을 무관하고 보는 사람을 홀리게 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는 것이다.
칼리스가 헬레나를 몇 년째나 잊지 못한 이유를 단번에 납득시켜 줄 정도로.
“안색이 밝아 보이는군.”
무신경한 목소리로 맞받아친 클로에는 그녀와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저…….”
상대와 이야기를 섞고 싶지 않으니 일부러 떨어져 앉은 것인데도 헬레나는 대화를 시도했다.
그에 클로에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거울 너머의 상대와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저를 무시한 것에 길길이 날뛸 헬레나가 웬일인지 잠잠했다. 게다가 오물거리던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로 나온 것은 의외의 감사 인사였다.
평소와는 다른 태세에 주위 하녀와 시녀들이 놀라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당사자인 클로에가 가장 무덤덤했다.
“무엇이?”
클로에가 우습다는 듯 되물었다.
헬레나는 무엇을 고마워하는 것일까.
그녀가 바보처럼 덫에 걸려 칼리스와 결혼해버린 것? 멍청하게도 그를 사랑해버린 것? ‘그 일’이 있었음에도 남편을 믿고, 헌신한 것?
아니면, 결혼기념일 날 공작이 멋대로 데려왔던 헬레나를 쫓아내지 않은 것?
어쩌면 과거 클로에의 나약함과 미련함을 통틀어 고마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 저를 받아주신 것이요.”
“받아주려는 의도는 없었으니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게, 게다가……. 저를 위해 이 연회에 힘도 써주셨다고 하니…….”
클로에가 계속 짧게 대응하는데도, 그 의도를 모르는 것일까?
상대의 가식에 진절머리가 난 클로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방으로 돌아가지. 그곳에서 준비하겠어.”
그녀의 완강한 의사에 머리를 손질해주던 하녀들은 조용히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녀들이 치장 도구를 허겁지겁 챙기는 동안, 클로에는 가만히 헬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똑같구나.’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헬레나는 연회를 주최할 때마다 제게 실실 웃으며 다가오던 그 남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 또한 오늘 연회를 위해 굽신대는 것이다. 혹여나 클로에가 탄신 연회를 망쳐버릴까 봐.
비열하다 못해 역겨웠다. 마치 맨 살갗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헬레나. 원래 하던 대로 해.”
“…….”
“차라리 그게 더 매력 있어 보이니.”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펼쳐진 푸른 눈이 싸늘하다 못해 차갑게 식어 있었다.
클로에는 어느새 이동 준비를 마친 하녀들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연회가 시작하기 반 시진 전부터 초대받은 손님들이 하나둘씩 공작가에 도착했다.
“오랜만입니다. 부인, 못 본 새에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자작령과 공작령의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세드릭 자작이 첫 번째로 도착했다.
추운 북부는 귀족들이 선호하는 지역은 아니었던지라, 공작가는 가까운 거리에 사는 세드릭 자작과 긴밀하게 지내곤 했다.
“귀중한 시간 내어 연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작 각하께서도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클로에는 들어오는 손님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맞이했다.
“저희에게 항상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시니 잘 지낼 수밖에요. 그나저나 갑자기 이렇게 큰 연회를 여시다니, 즐거운 일이라도 생기신 모양입니다!”
세드릭 자작은 늘 그렇듯 친근한 웃음을 남발했다.
칼리스가 제국으로 헬레나를 데려가는 바람에 귀족들에게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거기까지 귀에 닿진 않은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좋은 일이 있다며 급히 여셨답니다. 긴박하게 여는 바람에 참석이 어려우셨을 텐데도 제일 먼저 찾아와주셔 영광입니다.”
“하하! 아르헨 공작가 가는 곳에 세드릭 자작가가 가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아직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째 부인보다 더 정성이십니다. 그래 보았자 제국의 작은 태양 앞에서는 빛날 수도 없으실 텐데요.”
사실 칼리스는 헬레나를 보좌해야겠다며 클로에 홀로 손님을 맞이하게끔 했다.
그들과 있을 바엔 손님들과 시시덕대는 것이 더 이로운 일이었던지라, 클로에는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다들 보이지 않는구나.’
연회 시간이 다다랐는데, 그녀가 개인적으로 초대한 친우들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소원해진 사이에 그런 걸 바란 것 자체가 이기적이었을지도 모르지.’
결혼 이후엔 바빠서, 그 일이 있던 후에는 그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어서. 클로에는 친우들과 거리를 두었다.
공식적인 자리가 있을 땐 그들을 종종 초대하곤 했지만,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사이를 되돌리기엔 한참은 부족했다.
씁쓸함을 느낀 클로에의 앞으로 무언가가 반짝였다.
저택의 대문과 한참은 떨어진, 정원의 대문 앞에서 마차가 정차하는 것이 보였다. 저만치 멀리 있는 클로에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마차였다.
“케르비오스 후작가의 레리안느 영애!”
이윽고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플렌 공작가의 아르케트 영애! 크리스티닌 백작가의 피오네 영애! 헬시온 자작가의…….”
그리고 그 외침은 외마디로 끝이 나지 않았다. 커다란 마차는 단순 사치가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내로라하는 자제들의 이름이 줄줄이 열거되었다.
마찬가지로 클로에가 개별적으로 보낸 서신을 받은 친우들의 이름이었다.
벙 찐 클로에의 앞으로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뚜껑이 없는 간이 마차로, 정원에서 내린 손님들을 데리고 저택까지 안내해주는 용도였다.
“케르비오스 후작가의 레리안느 영애, 플렌 공작가의…….”
어언 대문 앞에 도착한 마부는 자신이 받은 리스트를 다시 외웠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며 마차에 탑승했던 손님들이 하나둘 내렸다. 인원수를 확인해보니 편지를 받은 자들 모두가 함께였다.
“당신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놀라다 못해 가슴이 벅차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클로에!”
그중 레리안느가 앞장서 다가와 클로에를 안았다.
“오랜만이야. 그나저나, 그 숄은…….”
레리안느를 슬쩍 떼어낸 클로에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우가 입은 숄이 시선을 강탈하기 때문이었다.
북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추운 것은 사실이나, 아직 초가을이었다. 레리안느가 입은 온몸을 덮는 숄은 지금 날씨에 다소 부적절했다.
“다 계획이 있어.”
숄의 안쪽을 슬쩍 비친 레리안느가 윙크했다.
“부티크에서 공작의 이름이 보이더라고. 너한테 그걸 선물할 것 같지는 않길래, 나도 채 왔지! 돈 좀깨나 썼어.”
어깨를 으쓱이는 레리안느의 모습은 장난꾸러기 같았다.
“너도 이걸 바라고 편지를 쓴 거 아냐?”
“어느 정도는. 네 성격이라면 분명 이렇게 할 줄 알았거든.”
“똑똑하고 영악해. 우리 공주님!”
***
맑은 종소리와 함께 연회가 시작되었다.
시종들은 샴페인과 핑거푸드를 든 채로 곳곳을 돌아다녔고, 오늘을 위해 섭외된 수준급 오케스트라는 자신들의 악기를 손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거대한 연회를 즐기기 바빴다. 무더운 여름에는 아무래도 연회가 드물었기에 이토록 성대한 연회는 오랜만이었다.
잠시 후,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친히 발걸음해준 그들을 환영하듯 경쾌한 음악이 그들을 반겼다.
그들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연회에 참석한 자들에게 저들을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이다음은…….’
스테이지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에 서 있던 클로에가 불현듯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헬레나와 칼리스가 연회장을 들어오고 있었다.
귀족의 것을 모방하는 듯하지만, 투박하게 자랐던 기사 시절을 잊지 못하는 발걸음. 그리고 예절이 익숙하지 않아 남자와 발을 맞추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발걸음.
어우러진 두 발걸음은 홀을 지나 단상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꼭대기에 오른 칼리스가 난간을 잡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비교적 자유로운 반대쪽 팔은 제 연인을 보드랍게 안고 있는 채였다.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연인의 탄신날입니다. 내게도, 그녀에게도 더없이 특별하고, 행복한 하루한 하루죠. 부디 나의 행복이 그대들에게도 전달되길 바라며, 건배!”
아연한 광경에 귀족들은 웅성거리기 바빴다. 가만 보니 자작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 모두 연회의 목적을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하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 연회에 참여할 리 없지. 자칫하면 왕실을 등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축배를 들은 이후엔 예정대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슬로우 댄스를 위한 음악이었다.
느리지만 감각 있는 소리. 그에 이끌린 귀족들이 하나둘 제 짝을 찾아 떠났다.
‘칼리스는…….’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칼리스를 찾았다.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멍청한 기대를 해서는 아니었다.
과연 그가 얼마나 더 멍청해질까 궁금해서면 몰라도.
‘역시.’
스테이지에서 내려온 그는 주저 없이 헬레나와 손을 맞잡았다. 춤이 서툴다며 한껏 변명하던 그녀도 결국엔 연인의 품에 안겨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반대로 클로에는 덩그러니 서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귀족들은 아닌 척 그 상황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늘 존경 어린 눈빛을 하던 자들이 지금은 클로에를 한낱 가십거리로 여기고 있다.
정녕 자신들의 목소리가 연주에 묻히리라 생각하는지, 그녀를 향한 웅성거림이 커져만 갔다.
“이제 그만…….”
괜찮으니 입을 조심하라 한마디 거들려던 참이었다.
클로에는 아직 입술도 채 열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불현듯이 멈추었다.
그녀가 변화의 이유를 알아채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터벅.
물살을 가르듯 인파를 거닐고 다가오는 발걸음. 우아하고도 거친, 아주 모순적인 발걸음.
그리고 내민 손.
클로에가 고개를 들고 상대를 확인하노라면.
“제가 너무 늦지는 않았습니까?”
마음속에만 고이 담아두었던, 미처 세지 못했던 편지의 발신인 중 마지막 한 명이 클로에의 눈앞에 다가온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