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정부의 탄신회 (2) (43/46)


#43. 정부의 탄신회 (2)
2023.06.12.


중앙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샹들리에를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잿빛.

열어놓은 창문의 틈새로 마중 나온 가을바람이 고귀한 머리칼을 감히 흩뜨리고 있었다.

“……와주셨네요.”

뜸 들이는 동안에도 클로에를 붙잡은 손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클로에가 자신의 손을 우그러뜨렸다. 마침내 두 손이 얽혔다.

자리에서 벗어난 그녀가 능란한 손길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목받고 싶지 않아 끄트머리에 머물러 있던 몸이 어느새 중앙에 서 있었다.

“인사는 그게 다인가요?”

리듬에 맞춰 클로에의 허리가 당겨졌다.

뒤이어 그녀가 그리워하던 향과 낮게 드리우는 목소리가 번갈아 감각을 일깨웠다.

사실 클로에는 눈앞의 남자를 누구로 생각하며 대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맞지 않는 경어가 그녀의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해주었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는 친우 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실 줄 몰랐어요.”

“하여?”

“고마워요. 덕분에 심심하지 않은 연회를 보내게 되었네요.”

노래는 이제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솟았다. 점차 빨라지는 음악 소리가 두 사람의 말소리를 숨겨주었다.

“제가 그리우셨던 모양입니다.”

장난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에 클로에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면 너머의 눈에 클로에의 눈이 덧대어진다. 이질감이 들지 않는 색의 결합은 마치 깊고 넓은 심해를 묘사하는 것만 같았다.

“그대와는 편지로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요.”

구태여 저 눈을 한 채로 앞에 나타났다는 건, 정체를 밝힌 뒤에도 여전히 친우 쿤인 척 편지 놀음에 다시 동참한다는 뜻일 테다.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볼까요?”

“북부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말이죠.”

“까짓것 친우의 공작령으로 거처를 옮겨보죠.”

넉살맞은 쿤의 말에 클로에가 픽, 하고 웃어버렸다. 제국의 황제가 타국의 공작령에서 머물겠다는 말보다 재미난 농담은 없을 터였다.

“아니면…….”

쿤의 지도에 따라 클로에는 천천히 돌았다. 그 덕에 한 곳에만 집중되었던 시선이 순간 분산되었다.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인 모두가 클로에와 쿤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중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춤을 추고 있는 칼리스와 헬레나도 포함이었다.

비로소 보이는 현실에 클로에는 더더욱 나릿나릿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원점으로 돌아왔을 땐 재차 환상이 펼쳐졌다.

“친우께서 제 쪽으로 오시렵니까.”

쿤은 어디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황제의 궁? 혹은, 타국의 귀족으로 왕국을 종종 여행 오는 친우의 거처?

안타깝게도 노래가 끝나는 바람에 클로에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클로에.”

“예?”

“오늘 연회에 나를 이용해요.”

노랫소리가 끝났을 즈음이었다.

그가 클로에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는 상대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 장갑 위로 짧게 입맞춤했다. 춤을 함께한 파트너에게 으레 건네는 끝인사였다.

결국, 클로에는 이번 대답도 듣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황제가 연회장을 벗어나는 것을 톡톡히 확인한 자들이 곧 클로에의 주변으로 몰려왔다.

“방금 부인과 춤을 함께 나누신 분은 제국의 황제 아닙니까!”

귀족 하나가 믿기 어렵다는 양 소리쳤다.

그러자, 두 사람을 신기한 생명체처럼 구경하고 있던 자들도 차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쩜, 부인께선 제국의 황제와도 친분이 있으신 거로군요! 덕분에 좀처럼 뵐 수 없던 분을 뵙고 갑니다.”

“세상에, 이 연회에 참여하지 않으신 분들 모두가 후회하겠어요.”

“그나저나 일개 귀족 연회에 황제 폐하께서 등장하시다니요? 그것도…….”

그것도 정부의 탄신회에. 그리 말을 이으려던 귀족이 가까스로 본능을 짓눌렀다.

일찰나 클로에가 고민했다.

이 상황을 고려하기라도 한 듯한, 자신을 이용하라던 친우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렸다.

“글쎄요. 폐하께서는 친우의 체면을 차려주고 싶었나 봅니다.”

잠시나마 비웃음으로 더럽혀진 클로에의 이름을 만회할 타이밍이었다.

“하기는……. 정부의 탄신을 축하하는 자리라뇨?”

“부인, 저는 이 자리가 그런 자리인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이윽고 귀족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칼리스의 연회를 욕하기 바빴다.

“괜찮습니다. 정부의 탄신 연회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편히 즐기다 가십시오. 이 자리엔 제 친우들도 모여 있는걸요.”

제 계획대로 칼리스의 연회는 일그러졌다. 어쩐지 마음이 통쾌해져, 여느 귀족처럼 가식을 부리는 것이 쉬워졌다.

“어쩜 부인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그토록 관대하신지!”

“심성이 워낙에 고우시니, 폐하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할 수 있으시겠지요.”

클로에와 황제의 친분을 과시하는 칭찬으로 인해 화제는 다시 황제에게로 꽂혔다.

“듣던 대로 분위기가 무서운 분이십니다.”

“소문대로 가면을 쓰시고 다니는군요. 그 가면 때문인지 인상이 더욱 차가워 보이는지도요.”

“춤 동작도 전부 정교하고 완벽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저렇게 결함 없는 춤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어요!”

귀족들은 저들의 존재 의미인 존귀함도 까마득히 잊은 채로 떠들기 바빴다.

제국의 축제나 연회에 참여하더라도 황제는 늘 단상이나 스테이지 위에서 얼굴을 비쳤기에, 이토록 가깝게 본 것이 처음이었다.

늘 활자나 그림으로만 황제를 접하던 귀족들은 그의 첫인상을 논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들은 것이 있듯 황제의 분위기가 섬뜩하다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뭐랄까…….”

“다정하셨지요?”

“황제께서도 제 사람에게는 온화한 면모를 보여주시나 봅니다.”

황제의 등장 이후, 손님 모두가 클로에를 추켜세우고 있었다.

‘제길!’

칼리스는 홀 한가운데 서 있는 클로에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저가 주인공인 것도 아닌데, 명백한 연회의 주인공을 두고 사람들을 모아 주도하는 모습이 퍽 얄미웠다.

첫 번째 슬로우 댄스 이후, 귀족들이 나누는 대화는 칼리스가 기대한 내용과는 확연히 달랐다.

원래대로라면 이 연회가 얼마나 성대한지, 혹은 두 사람의 등장이 얼마나 놀라운지가 거론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따금 칼리스와 헬레나의 관계를 축하해주는 말이 오가곤 했지만, 전부 하잘것없는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정작 그들이 원한 자들은 전부 클로에를 둘러싸고 있었다.

“흑…….”

헬레나는 온통 빼앗겨 버린 관심이 속상했는지 칼리스의 품에 안겨 울다시피 했다.

“울지 마. 어여쁘게 치장했는데, 흐트러지면 안 되지.”

“하지만…….”

“괜찮아. 저 여자를 향한 관심은 일시적인 거니까. 이제 널 위한 시간을 만들어볼게.”

“응!”

헬레나와 함께 스테이지 위로 올라간 그는 손뼉을 치며 이목을 끌었다.

“큼, 말했다시피 오늘은 내 연인의 탄신날이라네.”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헬레나를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혹 내 연인의 탄신을 축하해주고픈 자들은 이 앞으로 나와주게.”

그는 연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탄신 조공을 나눌 자리를 준비했다.그와 친분이 깊은 귀족에게만 연회의 의도를 알려놓은 것이었다.

칼리스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줄을 서 스테이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공작부인에게로 쏠려 있던 이목이 분산되었다.

다른 귀족들이 탄신 선물과 덕담을 헬레나에게 전해주고 갈 무렵이었다.

클로에도 앞서 준비해두었던 것을 전달받았다. 그녀는 시종과 함께 스테이지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시종이 헬레나의 앞으로 커다란 상자를 내려놓았다.

“헬레나 양의 탄신을 기념하며 하나 준비했지.”

헬레나가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기자, 투명한 상자가 보였다.

얼핏 보면 보석으로 오해할 정도로 맑고 투명한 유리 상자가 반짝였다.

“우와…….”

그리고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유리구두가 놓여 있었다. 샹들리에 아래서 찬란하게 빛이 나는, 동화 속의 공주님이 신을 것만 같은 진귀한 구두.

왕국의 신데렐라. 그녀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선물이 있을 수 있을까.

한시라도 빨리 구두를 신어보고 싶다며 헬레나가 칼리스를 보챘다.

결국, 그녀의 귀여운 재촉을 이기지 못한 칼리스가 손수 신발을 신겨주었다.

“부인, 감사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예쁘게 신을게요!”

헬레나의 발 치수는 어떻게 알았는지 불편한 구석 하나 없이 딱 들어맞았다.

이내 그녀가 격양된 목소리로 클로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 기쁜지 주먹 쥔 두 손을 제 가슴팍에 가져다 댄 상태였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클로에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앞을 바라보자, 상대의 머리 장식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밀색 머리칼 위로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 장식.

정녕 그녀는 알까. 저 머리 장식이 클로에의 결혼 날 쓰였던 장식이라는 걸.

꼭 저 장식을 써야겠다고 떼를 썼으니, 이미 알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축하해. 헬레나.”

비뚤어진 머리 장식을 고쳐주는 것을 핑계로 클로에가 얼굴을 붙였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그때 그녀가 곰살궂게 속삭였다.

“부디 그곳에서 행복하길 바라.”

그러고는 상대의 튀어나온 옆 머리를 귀 뒤에 꽂아주었다. 부드럽다가도 위압감이 실린 손길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지 않은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타이밍이 좋게도 반대쪽에선 위층으로 올라가는 레리안느가 보였다.

‘레리안느가 왜?’

천천히 올라가는 레리안느와 선물로 추정되는 상자를 들고 올라가는 시종. 다른 귀족처럼 헬레나를 위해 무언갈 준비한 모양새였다.

“반가워요. 케르비오스 후작가의 레리안느입니다.”

선물의 부피가 제법 되었기에 이번에도 칼리스가 먼저 전달받았는데,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케르비오스.”

헬레나와 칼리스가 꼼꼼하게 포장되어 있는 상자를 푸는 사이, 레리안느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긴 숄을 벗어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일찰나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기겁하며 탄식을 뱉었다.

“앗!”

정작 보아야 할 당사자는 자신의 선물 개봉에 집중하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공을 들여 상자를 열자 그 안에 잔뜩 쌓여 있던 서적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헬레나는 다리 쪽으로 굴러오는 책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조금 더 굴러가게 된 책은 의자 다리에 부딪혔다.

난데없이 책이라니? 그것도 한 권이 아니라, 십수 권에 다다라 보일 정도로 양이 많았다.

「숙녀가 되기 위한 예법서」

헬레나가 집어온 책의 제목은 이러했다. 보아하니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꼬꼬마 아이들이나 읽을 법한 예법서였다.

그녀가 어지럽혀진 바닥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대부분이 품위를 위한 교양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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