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정부의 탄신회 (3) (44/46)


#44. 정부의 탄신회 (3)
2023.06.13.


“레이디 케르비오스. 대체 이게 무슨……!”

이따위 것들을 선물이랍시고 선사한 당사자를 향해 헬레나의 고개가 들렸다. 질색을 띠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머, 마음에 안 드시나요?”

레리안느는 숄 안에 감추어 두었던 부채를 펴 입매를 가렸다. 부채 위로 솟은 깃털이 얄밉게 살랑거렸다.

늘 화려한 차림으로 파티를 사로잡던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현란한 드레스를 입고 왔다.

다만, 그 드레스가 연회의 당사자가 입은 것과 똑같이 일치한다는 것이 문제겠지.

북부가 다른 지역보다 추울지언정 이 날씨에 온몸을 덮을 정도로 긴 숄은 사치였다.

연회장에 들어와서도 숄 안에 자신의 차림을 꼭꼭 숨기던 레리안느의 의도가 비로소 드러났다.

레리안느의 차림을 보고 놀란 건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옷을 한 당사자, 헬레나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영애. 이게 무슨……!”

오늘 헬레나가 입은 드레스는 왕국에서 유행하는 살롱의 작품으로, 살롱의 카탈로그에 실린 드레스 중 중 가장 가격대가 높았다.

워낙에 가격이 악명 높기로 유명한 드레스였던지라 입기만 하더라도 화제의 인물로 선정되곤 했다.

그런 진귀한 드레스를 한낱 평민 정부가 입고 등장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드레스는 공작이 자신의 정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타내는 척도였다.

카탈로그에 실린 드레스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요구에 따라 드레스에 변화가 생기긴 한다. 하지만 아주 미미할뿐더러 드레스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기에 대부분 같은 것을 고수했다.

즉, 레리안느가 헬레나와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오는 바람에 준비한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의 애착을 증명할 수 없을뿐더러, 애꿎은 헬레나만 레리안느와 비교당할 게 뻔했다.

‘귀족이 되고 싶은 평민 정부의 사치’ 따위의 삼류 제목이 붙어 신문에 개시되겠지.

“어머. 왜 성화를 내실까요? 우연히 같은 드레스를 입은 게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생부터 명망 높은 가문의 귀족으로 살아왔던 레리안느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목소리가 자신의 청렴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리안느는 상대를 약 올리는 데 도가 텄다.

“레이디 케르비오스.”

보다 못한 칼리스가 두 사람의 대화에 개입했다.

“연회의 주인공이 따로 있음에도 그런 화려한 옷을 입고 온 것은 실의(失儀)라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예, 공작 전하. 감히 제 결례를 지적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글쎄요. 연회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맹세하건대, 저는 오늘의 연회가 평범한 무도회인줄 알았습니다.”

레리안느의 손짓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던 부채가 닫혔다.

“알았더라면……. 북부까지 발걸음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방금 무어라 했지?”

“출신도 모르는 평민 정부 따위를 위해 며칠을 꼬박 새워 공작령에 도착해야 했다니!”

말을 되풀이해달란 요구가 아닌 걸 알면서도 레리안느는 굳이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레이디 케르비오스!”

“설마하니, 지금 전하께서는 제게 소리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울화를 보내지 못해 안달이던 칼리스의 앞으로 야유 어린 반문이 떨어졌다.

케르비오스 백작가는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결혼이란 장사로 직위를 산, 졸부나 다름없는 아르헨 공작가와는 차원이 다른.

뜻을 이해한 칼리스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제아무리 허울뿐인 가문일지라도 엄연한 공작가였으며, 왕국을 등에 업은 채였다.

칼리스가 저도 모르게 인파를 훑기 시작했다. 클로에를 찾기 위함이었다.

케르비오스 백작가의 여식을 혼내기 위해선 왕족인 그녀가 필요했다.

클로에도 그녀가 속한 가문이 이리 대놓고 욕보인다면 화내줄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인파에 밀리기라도 한 것일까? 초조해진 칼리스는 인파를 향해 소리쳤다.

“클로에!”

그러나 바람과 달리 분위기만 기묘해질 뿐, 이름이 불린 당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

스테이지에서 내려가는 계단. 그 중간 즈음을 걸어가던 클로에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연회장의 뒷문과 가장 가까운 기둥에서 기댄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

쿤 프리히드.

서로의 눈이 마주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인데도 그 또한 클로에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얼핏 상대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같기도 했다.

이후 클로에가 홀린 듯 계단을 내려왔다. 헬레나에게 다가가는 레리안느의 상황 또한 궁금했으나, 이성과 달리 다리는 뒷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공허한 기둥이 저를 반기고 있었다.

설마하니 허상 따위에 이끌려 먼 길을 왔나 싶어 부끄러울 참이었다.

소리 없이 열린 뒷문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뒤이어 강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모순적인 손길이 클로에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까마득한 어둠 속, 정체 모를 상대에게 어깨가 감싸지는 건 위험한 일이다.

“놀라지 않으십니다.”

홧, 하고 불이 켜졌다. 양초 위에서 서서히 지펴 오르는 불꽃이 상대의 얼굴을 밝혔다.

“왠지 당신일 것 같았거든요.”

“눈치가 빠르셔라.”

둘은 사소한 대화 없이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특별한 지도자가 없는데도 당연하게 서로의 발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응시할 무렵, 커다란 창문 너머로 밤바람이 불었다. 거센 바람이 시야를 밝혀주던 촛불을 무자비하게 꺼트렸다.

대신 푸르스름한 광명이 빛을 대체했다.

아름다운 푸른빛에 이끌린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창문으로 다가가 있었다.

“그…….”

“클로에.”

상대의 인영이 비교적 뚜렷해졌을 때, 잠잠했던 두 목청에 소리가 깃들었다. 이상하게도 합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그대 먼저 말해요.”

배려차 던진 말에 상대는 의아하게도 얼굴을 굳혔다.

또박. 말보다 걸음이 앞섰다. 넓은 보폭에 한결 가까워진 거리가 상대의 입술을 확인하도록 유도했다.

‘그대……?’

쿤이 소리 없이 읊조린 두 글자.

그를 함께 곱씹던 클로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쿤이 한 발짝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답지 않게 신경질이 실려 있는 발길질이었다.

“그대. 그대. 그대.”

“…….”

“그 무심한 호칭은 뭡니까. 혹시 내 이름을 까먹은 건 아니죠. 클로에?”

뼈가 있는 지적에 클로에가 깊은 날숨을 내뱉었다.

탄로 난 정체를 모른 체하고 이어가는 암묵적인 관계. 그 사실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황제의 이름을 당당히 부를 수가 없었다.

“황궁에 다녀왔다더니, 내 이름을 부르기 어려워진 겁니까? 내가 황제와 이름이 같아서?”

“그…….”

클로에의 어색함을 알아챈 건 알겠지만, 대체 뭐가 저리 당당한 것인가.

느닷없이 진실을 고백하고선 뒷받침해줄 이야기도 없더니. 클로에의 편지 한 장에 다시 친구 놀이를 하고 있잖나.

“말해봐요. 클로에.”

“…….”

“내 이름이 무엇이지?”

친우치고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뒤따랐다. 친우의 얼굴을 한 주제에 본질까진 숨길 순 없는가 보았다.

클로에가 코앞까지 다다른 상대를 살짝 뗴어낸 후 대답했다.

“쿤이잖아요. 쿤. 알아요.”

목적을 달성한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온화해졌다. 다정한 낯을 띠던 그가 곧이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안다니 다행이십니다. 그나저나 클로에, 오늘 일은 괜찮으십니까?”

황제가 아닌 친우 쿤은 아직 클로에의 세세한 이야기까진 모를 텐데.

상황을 거두절미하고 클로에의 상태부터 묻는 것은, 공작과 클로에 사이의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까?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려주는 것은 그녀 또한 사양인지라, 달가운 마음으로 답했다.

“걱정해주는 건가요? 괜찮다마다요. 친우에게만 귀띔해주자면, 공작이 그녀를 소개해주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신의 상태를 증명하듯 얕게 미소 짓던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공작이 멍청해서 다행이죠. 혹시라도 신중하게 구는 게 아닐까 염려했는데, 전리품 전시하듯 그녀를 모두의 앞에서 내비칠 줄은.”

‘그 일’이 귀족들 사이서 시들긴 했다지만, 명백히 잊힌 것은 아니다. 떠들기 좋아하는 그들은 공작이 정부를 들인 것을 그 일과 연관 지을 터.

그렇게 된다면 귀족들의 여론은 자연스럽게 클로에를 동정하겠지.

황제의 허가로 인해 이혼 절차를 밟게 된다고 하더라도 뒷얘기까지 막을 수는 노릇. 귀족이자 왕족인 클로에가 이혼한다는 건 기필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비난을 피할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덜 받아야만 했다.

그냥 빵을 훔치는 도둑과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 그릇된 선택을 한 도둑이 다르듯.

“다행입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와 이혼할까 해요. 다행히 협조적인 조력자를 만났거든요.”

늘상 침착하게 굴던 쿤도 장난에는 못 이기는지 미처 웃음을 참지 못했다.

“좋은 분을 만나셨나 봅니다. 그럼, 이혼 후엔 어찌하실 겁니까?”

“그건…….”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클로에 혼자서도 몇 번씩 고뇌해보았지만,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아 뒷전으로 미뤄둔 상태였다.

그 무모함이 지금에야 이리 선명하게 드러날 줄은.

“굳이 상기시키고 싶진 않았는데, 미안해요. 하지만, 클로에도 알다시피 사회에서 이혼은 용납되지 않는 일인지라 친우의 안위가 걱정되었습니다.”

황제의 도움을 받아 이혼하게 될 시,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도피할 수 있게 되나, 반대로 적잖은 피해를 받게 된다.

왕실은 명성을 잃은 딸을 되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낙인이 찍혀버린 그녀를 받아줄 가문도 달리 없을 테니, 마땅한 직업을 구하는 것도 현실적으론 힘들다.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은 모아둔 돈을 가지고 시골 영지에 내려가는 것 정도이려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신 거라면, 그 협조적인 조력자를 또 이용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의 묘한 질문에 클로에가 스리슬쩍 되물었다.

“이용이라면?”

“가령, 빈자리를 메꾸는 용도라든가.”

이윽고 쿤이 냉큼 대답했다. 마치 그녀의 반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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