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헬레나의 실수 (45/46)


#45. 헬레나의 실수
2023.06.14.


휘황찬란했던 탄신 연회는 밤을 지새우면서까지 계속되었다. 공작가의 남는 방을 숙소로 제공하며, 그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까지 전부 가문의 몫이었다.

제아무리 헬레나를 인정시키고 싶어도 그렇지, 이건 사치나 다름없었다. 안 그래도 졸부로 무시당하던 가문에 악영향만 미치는 꼴이었다.

연회에 참여하는 둥 마는 둥 얼굴만 대충 내비치던 클로에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공작가의 장부를 뒤졌다.

‘자신이 공작가를 지키고 있는 이상 주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금고를 열 수 없다!’ 단언하던 집사는 클로에가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도 금고를 부술 기세로 열어주었다.

‘가관이군.’

올 한 해의 재정관리가 적혀 있는 장부를 읽던 클로에가 결국 혀를 찼다.

제아무리 왕실이 돈을 퍼준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낭비벽이 심할 줄은. 영지 관리비니, 뭐니 하며 타 갔던 돈들은 전부 그의 사치에 쓰였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 장부를 말의 똥을 닦는 데 써도 무관하겠다 싶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클로에가 허공을 바라보기 무섭게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문앞까지 들려왔다.

이윽고 당사자가 문을 부술 기세로 박차고 달려왔다.

“클로에!”

한쪽에는 왕가의 도장이 찍힌 서신을 들고서.

‘올 것이 왔군.’

클로에가 쓰고 있던 안경을 넌지시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죠. 공작? 술독에 빠진 채로 침대에서 허우적거리고 계실 줄 알았는데.”

“입 다물고, 이거나 봐!”

칼리스는 상대의 비아냥에 맞받아칠 여유도 없다는 양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들이밀어진 편지를 낚아채 읽었다.

편지에서는 왕실이 칼리스의 요구를 거절하고 있었다.

“왕실에서 공작가의 경비 신청을 거부한 게 그토록 문제가 되는 일인가요?”

“왕실에서는 원래 공작가에 매달 대금을 치르게 되어 있어! 그런데 그 약속을 깨는 게 말이 돼?”

“글쎄요. 사치스러운 연회는 왕실에서 처리해줄 경비 비용으로 쳐주지 않는가 보죠.”

그녀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자, 흥분해 벌게져 있던 칼리스의 얼굴이 익어 터질 토마토처럼 변했다.

“말이 그렇지, 내가 왕실에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칼리스는 이번 탄신 연회 대금을 왕실에 부친 것일 테다. 매달 증여하는 거액의 돈 중 대금을 제외한 값을 주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왕실이 생계비 지원을 끊은 것이었다.

“아, 말을 빼먹었군요. 왕실이 정부를 위한 대금을 지원할 필요성을 못 느끼셨나 보죠.”

“하, 내가 정부를 두었다고 지원을 끊게 했다? 이혼이 안 되니 이런 치사한 술수를 쓰는 건가? 어린아이 장난질도 아니고!”

콧김을 마구 뿜어내며 분노를 표출하는 공작을 보며 클로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 건 지금 생떼를 부리고 계시는 공작이겠죠. 돈을 안 준다고 이리 패악을 부리는 어른이 어딨습니까?”

“뭐? 그대가 모르는 대외비가 있는데, 그 돈은……!”

“저와의 혼인 계약이 성사되어 받는 돈이라고요.”

변명을 시도하던 공작은 클로에에 의해 제지되었다.

서둘러 다음 말을 이어야 하는데, 놀라 입조차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몇 배로 커진 흰자에 빨간 핏줄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두툼한 그의 쌍꺼풀이 한결 선명해졌다.

“그걸, 네가 어떻게……!”

“글쎄요.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왕실이 제게 알려주었을까요? 아니면, 그걸로 약점을 잡아놓아야 했던 당신이 내게 말해주었을까요?”

“고고한 척 빙빙 돌리지 말고, 누가 말했는지 순순히 물어!”

“예. 그러니 공작께선 생각해보세요. 그 둘 말고 또 누가 알고 있는지. 철없이 그런 비밀을 폭로할 사람이 과연 누군지.”

잇따라 공작의 눈이 차츰 수그러든다. 작아진 동공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린다.

난잡했던 시선은 곧 한 곳으로 정착했다.

클로에의 창틀 위에 다소곳이 올라가 있는 화분, 낯부끄러운 감정을 깨달은 소녀의 뺨처럼 지극히 사랑스러운 분홍색 꽃으로.

“제 청렴함을 알아주셨다면 이제 나가주시겠나요?”

“입 다물어. 엉뚱한 소리로 이간질하기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남자는 엄한 이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발걸음에 제 분노를 실으며 쿵쾅쿵쾅 걸어가던 칼리스는 문고리를 붙잡고 소리쳤다.

“축제 후 나와 헬레나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날을 위해 황궁을 방문할 생각이니,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애먼 짓은 멈추도록! 황제가 내 손을 들어주면, 그깟 왕실 따위 필요 없지.”

“아무렴요. 황제에게 바칠 선사품은 아끼시길 바라요. 남은 돈이 얼마 없어 영지를 관리하기도 벅차니까요.”

“닥치라 했어!”

고리를 부술 기세로 문을 연 칼리스가 곧 방을 나섰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충격을 견디지 못한 문이 흔들렸다.

“하여간.”

쯧, 혀를 찬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어찌나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던지. 뒤늦게 다가온 침묵이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헬레나와의 결혼을 위해 제국에 간다고.’

클로에가 탁상시계 옆에 놓은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구나.’

***

“헬레나!”

칼리스가 헐떡이는 목소리로 연인을 찾았다.

침대에 누워 독서하고 있던 헬레나가 놀라 그의 앞까지 다가왔다.

“네가 클로에에게 말했어?”

“뭘 말하는 거야?”

중요한 내용은 뺀 채로 무작정 묻는 칼리스에 헬레나는 불안해졌다.

무엇을 묻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가 묻는 내용에 헬레나는 관계가 없어야만 했다.

저렇게 역정을 내는 연인을 보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작년, 공주의 탄신 연회 전에 기사를 내보낸 헬레나를 다그쳤을 때는 제외하고서는.

“왕실과 나의 계약을 발설한 게 너냐고 물었어.”

“계, 계약?”

“그래! 왕실과의 협상 아래 진행되었던 계약 말이야!”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헬레나에게 고함이 떨어졌다. 큰 데시벨에 어깨가 움찔거렸으나, 헬레나는 놀란 척도 하지 못했다.

“그건…….”

문득 공주와의 첫 대면이 떠올랐다. 함께 차를 마시던 그날, 공주를 골리기 위해 누설했던 비밀이 무슨 문제가 된 건가?

자신은 그저 클로에를 곤경에 빠트리려고 아무 생각 없이 지껄였던 것인데!

“말해.”

“그니까, 칼, 그건…….”

“네가 모든 걸 망쳤어!”

헬레나가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이었다.

드물게 험악한 인상을 지은 칼리스가 상대를 향해 쏘아붇였다.

“헬레나, 너 때문에 모든 게 수포가 되게 생겼다고! 내가 애써 쌓아둔 모든 것들이……. 그저 한순간에…….”

거듭 마른세수하는 칼리스의 목소리가 절망에 빠져 있었다.

명예 없는 아르헨 공작가가 그나마 내세울 만한 것은 왕실의 보호와 돈이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가문을 적대시했고, 이젠 왕실의 지원마저도 끊겨버렸다.

이렇게 되다가는 예와 다를 게 없어진다.

한때는 명망 있는 가문이었으나, 조부모 세대 때부터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던. 내지는 빚만 떠안고 추락하게 된 그의 고향 말이다.

“아악!”

“칼, 내가, 내가 미안해. 철없어서, 멍청해서, 그냥 바, 바보 같아서어…….”

울먹이며 엉엉 우는 헬레나의 반응은 뒤집힌 속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칼리스는 홀로 분을 삭여야만 했으니까.

그나마 남은 제 사랑, 헬레나까지 저를 등진다면 그는 정말 빈털터리가 되어버려서.

“후……. 어떻게든 알아서 해볼 테니까 집에서 가만히 있어줘. 클로에는 제발 더 건들지 말고. 그냥, 그냥 분수를 알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그러면 호화로운 집, 옷, 음식, 다 네 것이 되잖아. 알겠지?”

“알았어. 가만히 있을게. 근데 칼은 어디 가려고?”

“황실에서 방문을 허가했어. 제국으로 잠시 떠날 예정이야.”

“아…….”

헬레나와 함께할 것이라던 제국 여행은 무산된 모양이었다. 내심 기대했건만, 이렇게 언질 없이 건너뛸 줄이야.

이 상황에 어리광을 부릴 순 없었으므로 헬레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열심히 연인을 배웅해주었다.

고용인을 불러 짐을 옮기도록 명령한 칼리스는 마지막으로 재킷을 입었다.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는 아르헨 공작가의 고유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문양을 빤히 쳐다보던 헬레냐가 중얼거렸다.

“저, 칼…….”

“말해.”

어느 때보다 딱딱한 어투. 그 차가움에 헬레나는 추진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아직 사랑하는 거지?”

애처로운 한 마디에 칼리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단순한 녹음의 눈에 담긴 감정은 의아하게도 복잡했다. 시선은 단호한데도 연인을 향한 애정은 모호했다.

“그럼.”

목소리 또한 떨림 없이 단호한데도, 음성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희미하기만 했다.

“……응. 잘 다녀와!”

“응. 내 사랑. 몸 조심히 잘 있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소리 없이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레나가 겨우 발걸음을 뗐다.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누운 그녀는 칼리스가 오기 전까지 집중해 읽고 있던 책을 발견했다.

「지성을 갖춘 여자가 되어라」 연회 때, 레리아나에게 수치심과 함께 받은 선물.

제 결함을 지적받아 미치도록 부끄러웠으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배움을 멀리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부끄러우나, 빌어먹을 클로에와 조금은 닮고 싶어서.

‘불안해.’

눈을 감은 헬레나의 앞으로 칼리스의 차가운 시선이 보였다.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스가, 칼리스가 날 떠나면 어떡하지?’

책에서는 한 번의 실수가 발목을 붙든다고 했다. 그리고 황궁의 일을 겪은 헬레나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칼리스는 실수를 눈감아주었다. 순진한 것이 죄는 아니라며, 그녀를 부드러이 토닥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안함이 그녀를 잡아먹었다. 쓸데없는 잡념은 서로를 좀먹으며 크기를 불려 나갔다.

“저, 헬레나 님……?”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몇 번씩이나 거듭된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헬레나를 위해 하녀가 방 안까지 들어왔다.

이내 헬레나가 얼굴을 덮고 있던 책을 치웠다.

“밥 먹을 시간이니?”

“네. 식사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응. 부탁해.”

평소라면 제멋대로 들어온 하녀를 나무랐을 헬레나가 오늘은 잠잠했다.

하녀의 안내에 받아 식사실에 도착한 헬레나는 뜻밖의 여자와 마주했다.

“반갑구나. 헬레나.”

클로에 아르헨.

함께 식사할 이유가 없는 여자가 친히 헬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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