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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공작부인을 넘겨주마 (46/46)


#46. 공작부인을 넘겨주마
2023.06.15.


클로에가 상석에 앉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의도치 않게 붙어서 밥을 먹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칼리스의 자리를 차지한 클로에를 헐뜯어야 마땅하지만 오늘은 넘어가기로 했다.

첫째로는 칼리스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공작가 내에서 클로에의 위치가 예전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오늘 클로에가 상석에 앉을 수 있던 것도, 공작부인의 결례를 감히 나무랄 자가 없었기 때문일 테니까.

‘저 여자는 내가 원하는 걸 매번 쉽게도 가져가.’

헬레나가 클로에를 흘끗 바라보며 생각했다.

헬레나가 탐나 했던 공작부인의 자리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도, 칼리스의 관심도, 사람들의 굴복도, 전부.

원래부터 고고했던 그녀를 짓밟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여기서였는데, 이젠 그것도 힘들어졌다.

오늘 저녁은 그녀가 좋아하는 칠면조 구이와 옥수수 수프로 준비되었는데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헬레나는 접시에 조금 올린 칠면조를 깨작깨작 씹어 먹었다.

“맛이 없나?”

“뭐?”

“그대가 좋아한다는 것들로 준비했는데, 별로인가 싶어서. 아니면, 나 또한 공작처럼 틀린 것을 준비했나.”

여정을 떠나는 칼리스가 특별히 헬레나를 위해 준비한 만찬인가 싶었는데, 클로에의 소행이었다니.

‘아주 본인 세상이야.’

그녀가 읽었던 예법서에 따르면, 올바른 대답은 ‘아닙니다.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였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클로에가 오늘 사건의 주범인데, 그런 사람에게 감사 인사라니! 헬레나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뚝 떨어져 있던 헬레나의 입맛이 이제는 아예 죽어버렸다.

“식사 후 일정이 따로 있나?”

“없어.”

“그럼 나와 함께하지.”

“……허, 내가 당신과?”

“악동도 없는데, 소소하게 담소나 나누어볼까 싶어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클로에가 덧붙였다. 그 우아한 손짓이 헬레나를 약 올리는 것만 같았다.

정작 헬레나는 살갗이 벌게질 정도로 거세게 입가를 문질렀기 때문에.

“저와 공주님이 함께 그런 걸 할 사이인가요?”

“그대에게 해줄 이야기도 있고.”

“여기서 하면 되잖아!”

“보고 듣는 이가 한둘이어야지. 이들 앞에서 꺼내기엔 다소 은밀한 이야기거든.”

“설마, 칼과 관련된 이야기인거야?”

“암,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있겠어.”

헬레나가 소리 나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포크 위에 살포시 올라가 있던 야들한 고기가 속절없이 접시 위에서 나뒹굴었다.

“갈 거면 지금 가든가. 빨리 끝내고 쉬고 싶으니까.”

“원한다면 그러마.”

클로에도 거부하지 않고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클로에의 테라스에 작게 놓은 티테이블 위에서 차를 들었다.

“예쁘구나.”

야외 전망을 바라보며 클로에가 읊조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화원의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헬레나는 여느 귀족 영애처럼 맞장구를 칠까 고민하다, 그냥 하던 대로 하기로 했다.

“이야기나 빨리 하지 그래?”

“하긴, 우리 사이에 사사로운 이야기는 필요 없겠지.”

티포트를 건네받은 클로에가 차를 달이고 온 시녀에게 물러가라 전했다.

다소 강압적인 말투에도 시녀는 온화하게 대응했다. 몇 주 전까지 그녀를 무시하던 사람 중 하나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헬레나의 잔이 채워지고 난 후 기다리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대와 계약을 하나 할까 해.”

“계약?”

“서로에게 좋은 일일 테니 들어보렴.”

클로에는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마른 목을 축이고자 잔을 들었다. 이윽고 차를 머금자, 가녀린 목선에 잠시 굴곡이 졌다.

“왕실과 칼리스가 작성한 계약서가 필요해. 집무실에 있는 금고에는 없으니, 그의 침실이나 다른 중요한 곳에 놓았겠지.”

그녀의 질문에 헬레나가 기가 찬다는 양 헛웃음을 뱉었다.

“지금 그걸 나더러 가져오라는 거야? 당신, 미쳤어?”

왕실과의 계약을 밝히기 무섭게 칼리스는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계약서까지 가져오라니.

그건 명백한 배반이 아닌가.

“나는 계약이라고 했고.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 했어. 끝까지 듣는 게 좋을 거야. 헬레나…….”

“…….”

“아르헨.”

헬레나 아르헨.

그 이름에 헬레나는 바보 같게도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가 가고 싶었지만, 여전히 지니지 못한 유일한 것.

그 이름을 칼리스도 아닌, 클로에가 처음으로 불러주었다.

“내가 얻는 게 뭔지부터 말해!”

“이 이름을 갖는 것이지.”

“……뭘 모르나 본데, 그 이름은 칼리스와 결혼하게 되면 자연스레 얻게 되는 것이거든?”

“아, 공작가에서나 불릴 그 이름 말인가?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

“여전히 사회적 지위도 없는 정부, 공작이 총애한다지만 실질적 권력은 아무것도 없는 남자라 그대를 부상시킬 수도 없지.”

듣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진실을 들으니, 마치 조롱을 받는 느낌이었다.

이번 탄신회로 헬레나는 제 처지를 잘 알게 되었다.

제가 아무리 날뛰어보았자, 또 칼리스가 저를 아무리 총애해보았자 공작가 밖의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다.

귀족사회에서 그녀는 신데렐라나 귀인이 아니라, 외부인이자 이방인이다.

“그럼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준다는 건데요?”

“네게 공작부인을 넘겨주마.”

“……뭐, 뭐라고?”

네 글자에 마침내 헬레나가 동요했다.

맑고 투명한 눈. 그 눈 너머로 클로에가 투영되었다. 먹잇감을 포착한 뒤에도 침착을 유지하는 그녀가.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헬레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것이 마음 끄트머리 속 아지랑이처럼 찬찬히 피어오르는 기대감이란 걸 알아챘다.

“말 그대로야.”

그렇다면 주저하지 않고 진실을 말해도 되겠지. 헬레나가 정말 그 자리를 고대하고 있다면, 꿈의 달성을 위해서라도 지조를 지킬 테다.

“칼리스와 이혼할까 해. 그렇게 된다면 그대는 자연스레 공작부인이 되겠지.”

“왕실이 이미 당신의 바람을 거부한 거로 아는데! 누굴 속이려는 거야!”

냉철함을 잃은 헬레나는 본래의 태도를 되찾았다.

더불어 클로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어. 방법은 찾았으니, 그 방법을 도와줄 증거만 확보하면 되거든.”

사실 황제가 이혼을 돕는 이상 증거 같은 건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클로에는 두 사람의 결혼이 사기극이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한낱 정부 때문에 결정된 이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어야 했으니까.

만일 이혼을 추진하는 명분과 그 명분을 뒷밤침해줄 증거가 있다면, 그녀가 황제의 도움을 받아 쉽게 이혼했다는 여론은 막을 수 있을 테다.

“내가 그대를 속일까 걱정하는 건가? 헬레나, 그대도 알잖아. 내가 이곳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

“내가 여기서 더 머물 이유는 없어. 칼리스의 옆을 원하는 그대라면 몰라도.”

클로에가 조용히 속삭였다.

두 사람을 간간이 스치는 바람도, 졸린다며 생떼를 쓰듯 노래 부르는 새도, 지나가는 개미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게.

“그, 그게 세간에 노출되면 칼리스의 거짓말이 들통날 거야! 그러면 그는 비난받겠지! 그걸 노리는 건 아니고?”

“그대가 쓴 기사의 화력이 얼마나 갔지? 한 달도 채 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게다가 이번에는 왕실도 함께 총알받이가 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건 칼을 배반하는 계약이야! 그 사람을 배신하면 나는……!”

본능과 이성이 충돌하는지, 헬레나는 큰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찬가지로 바람의 방향도 무시한 채로 아무렇게나 손이 흩날리고 있었다.

하염없이 외로워 보이는, 자그마한 손을 클로에가 감쌌다.

“배반?”

“…….”

“너를 두고 이익을 위해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칼리스의 행위는 배반이 아닌가? 돌아오고 나서도 나를 정실부인으로 두는 것은? 그뿐인가, 높은 자제들 앞에서는 네가 아닌 나를 당당하게 내세우는 파렴치한 행동까지.”

“……”

“이것들은 배반이 아닌가. 헬레나?”

헬레나는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의 옆자리를 원하는 건 당연한 거지. 나 또한 이해해.”

또, 저를 이해한다는 양 함부로 떠드는 여자에게 소리치지도 못했다.

“그러니, 가져가. 공작부인의 자리.”

“…….”

“당당하게 헬레나 아르헨이 되란 말이야. 말뿐인 안부인이 아닌, 공작가의 진짜 안부인.”

그녀는 이미 악마의 속삭임에 휘말린 후였기에.

***

향초를 피운 헬레나가 돌연 달력을 바라보았다.

칼리스가 저택을 비운 지 어언 여섯 번째 밤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음 날 오후쯤 그는 도착할 것이다.

‘오랜만에 보네!’

칼리스가 없는 저택은 무언가 허전했다.

클로에는 여전히 공작가를 제집처럼 여기며 활개를 치기 바빴는데, 이를 제지할 칼리스가 없으니 그 짜증스러운 모습이 돋보였다.

그리고 묘한 것은 고용인들이 헬레나와 거리를 둔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대우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칼리스와 함께할 때처럼 아주 상냥하게 구는 건 아니었다.

‘내가 탄신회 때 창피를 당해서일까?’

어쩌면 고용인들도 헬레나의 위치를 파악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공작의 사랑을 받아봤자 힘도 없는 평민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칼리스는…….’

공작이 사랑하는 여자이니 대우해 마땅하다고 주절거리던 자들이 바뀌니, 헬레나는 불안해졌다.

칼리스라고 변하지 않을 확신이 있을까?

‘그러니, 가져가. 공작부인의 자리.’

불현듯 클로에의 고아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당당하게 헬레나 아르헨이 되란 말이야. 말뿐인 안부인이 아닌, 공작가의 진짜 안부인.’

유별히 강하게 맞부딪히는 발음. 미세하게 섞인 숨소리.

그 악마의 회유.

헬레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를 죽인 발걸음이 이내 칼리스의 서재로 향했다.

빼곡하게 채워진 책들. 헬레나는 촛불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불을 비췄다.

‘다섯 번째 책장, 네 번째 칸.’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열쇠의 위치를 알고 있으라며 칼리스가 단단히 일러둔 적이 있었다.

다섯 번째 책장의 네 번째 칸. 그중 가장 오른쪽에 있던 책을 꺼낸 뒤 펴자, 책 중간 부분에서 움푹 파인 곳에 들어 있는 열쇠.

그 열쇠를 집은 헬레나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비싼 골동품으로 보이는, 책장 옆에 붙어 있는 장식품.

앤티크한 디자인으로 우편함을 꾸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금고였다.

헬레나는 자신이 방금 찾은 열쇠를 금고 구멍에 맞추었다. 이후 꽂혀진 열쇠가 꼬리를 비틀자,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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