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위기는 언제나 기회와 함께 찾아온다 (5)
화장실에 들어가던 남자를 황급히 따라갔다.
“승철 씨.”
“네?”
그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PD님이시죠?”
“예, 맞습니다.”
“안 그래도 인사드리려고 했었는데 잘됐네요. PD님 덕분에 잭슨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다른 친구들까지 만났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시간 내서 와 주셨는데 제가 더 감사하죠.”
얼굴이나 말투를 보아하니, 다행히 술에 취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하나 여쭤볼 게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어떤 거요?”
“제가 조금 전에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그 졸업 앨범 관련해서 말씀하신 것 중에 궁금한 게 있어서요.”
“아…….”
김승철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술 마시면 비밀이 없어지는 게 술버릇이라…… 하하핫. 혹시 실수한 건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혹시 그 졸업 앨범을 사 간 사람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해서요.”
“글쎄요.”
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수상한 사람이긴 했어요. 왜 구매하는지는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달러로 송금하는 방법을 모른다며 비트코인으로 준다고 하더라고요.”
“배송지는 기억나시나요?”
“한국의 무슨 사물함? 공공장소 쪽으로 보낸 것 같더라고요.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형민 이 자식도 생각보다 더 꼼꼼하게 수를 쓴 듯했다.
“저도 처음에는 조금 의심되어서 어떻게 알고 연락했냐고 물어보니까, 제 SNS에 ‘아서 국제학교 졸업’ 표시된 걸 봤다고 했어요.”
“연락도 SNS로 왔나요?”
“네. 확인 절차도 없이 바로 송금해 줘서 의심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보내 줬어요.”
“혹시 대화 내용 좀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예. 지금 바로 보여 드리죠.”
그는 휴대폰을 만지더니 놀란 소리를 냈다.
“계정이 사라졌네?”
“그래요?”
“예. 대화 내역은 남아 있는데 상대방 프로필은 없다고 나와요.”
그는 직접 휴대폰을 내게 보여 주었다.
“혹시 이것 좀 찍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나는 대화 내역을 그대로 휴대폰으로 찍으며 물었다.
“대화 날짜는 기억나시나요?”
“처음 연락 온 게 아마 지지난 주였나?”
내가 우형민 CP와 만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 날.
“제가 아는 건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저도 굉장히 묘했거든요. 저도 오기 전까지는 무슨 사건인지 몰랐는데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제 졸업 앨범이 잭슨을 음해하는데 쓰인 것 같아서 영 불편하네요. 잭슨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아닙니다. 이야기해 주신 덕분에 한국에서도 의혹이 해명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면 좋겠네요.”
그는 후덕하게 웃으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것만으로도 배후가 우형민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건데.
김승철에게 접근할 때부터 이렇게 보험을 걸어 두었다면, 내가 파헤쳐도 증거가 나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러나 우형민이 배후라는 걸 알아낸 것은 큰 수확임에 틀림없는 사실.
아무래도 한국에 가서 임성진과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봐야겠는걸.
* * *
“고생하셨습니다!”
잭슨 킴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강 PD님, 그리고 카메라 감독님들 정말 수고 많으셨고 감사합니다.”
“됐어. 우리 일인데, 뭐.”
“잭슨 덕분에 일등석도 타 보고 좋은 경험 했지. 자네야 말로 마음고생 많았어.”
두 명의 VJ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그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강 PD님도 돌아가시죠.”
“예.”
나는 방으로 들어가며 미안한 목소리를 냈다.
“출연진은 혼자 방을 잡아 드려야 되는데, 작가들이 예약을 잘못 해서 방을 2개만 잡았다더라고요.”
“아니에요. 저 PD님이랑 같이 자는 거 좋은데. 설마 PD님은 저 싫으세요?”
장난까지 치는 걸 보면 다행히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것 같다.
덕분에 나도 웃음이 났다.
“그럴 리가요.”
“오랜만에 두런두런 이야기하시죠.”
잭슨 킴은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제가 최근에 아이돌 커플 하나 알아냈거든요.”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저 씻고 나올 테니까 우리 20대끼리 맥주 한 잔 콜?”
그는 말해 놓고 아차 싶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근데 PD님 너무 피곤하시려나?”
아무리 일등석이라고 해도 비행 피로는 적지 않다.
게다가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은 잭슨 킴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아이돌 커플이 누군지도 궁금하고.
“아, 괜찮습니다. 내일 한국 가면서 자면 되죠. 한잔하시죠. 콜.”
“그러면 금방 샤워하고 올게요.”
그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한국은 지금 오후 시간일 터.
곧장 임성진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았다.
바쁜가?
하긴, 이틀 뒤에 몽골 특집으로 가야 하니 한창 준비할 것투성이겠지.
그러나 이쪽 소식을 전달하기는 해야 할 터.
다음으로 홍사은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수신음이 울리고 나서 끊기기 직전에야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어딘가 다급한 목소리.
“홍 작가님, 저 강 PD인데 지금 바쁘세요?”
-아, PD님…….
그녀는 짙은 한숨을 내뱉고는.
-진짜 큰일 났어요.
또 왜.
잭슨 킴보다 더 큰일이 터질 리가.
분명 연예 뉴스 확인했을 때도 문제없었는데.
“무슨 일인데요?”
-지금 황민찬 PD님이…….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에 중간에 임성진 PD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구야, 신입?
-네. 방금 전화 왔어요.
-내가 받을게.
곧이어 임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신입. 촬영은 잘 끝냈어?
“예. 완전 결백하게 그림 나올 것 같습니다. 근데 혹시 민찬 선배한테 무슨 일 생겼습니까?”
-그 개새끼, 선배라고도 하지 마.
진심으로 화가 난 목소리였다.
다혈질인 모습은 몇 번이나 봤지만, 이렇게나 노여움에 가득 찬 모습은 처음인데.
-그 자식 사표 냈어.
“네?”
-퇴사했다고. 이 망할 놈이 내일부터 출근 안 한단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갑자기 무슨…….”
-TNC에서 스카웃이 왔다네? 허, 참.
TNC라면, 우리 JBC의 최대 경쟁사.
-잭슨 킴 때문에 블라인드 미션이 논란에 오르니까 아주 작정하고 흔들려는 거지. TNC에서 그놈한테 입봉시켜 준다고 했대. 그래서 가야겠단다. 이게 말이 되냐? 당장 이틀 뒤에 출국해야 되는데?
이런 썩을.
어쩐지 나에게 스카우트 제안이 왔을 때 반응이 수상하다 했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나갈 줄이야.
황민찬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인간 완전히 기회주의자였잖아?
“선배님. 그러면 촬영은…….”
-어떡하겠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가야지. 지금 게스트로 콜드레인까지 섭외해 뒀는데 버리고 튄 거라니까, 황민찬 이 망할 자식.
기존 멤버 세 명에 게스트 하나.
출연진만 무려 4명이다.
그런데 PD는 한 명.
절대 제대로 된 촬영이 불가능하다.
암만 작가진이 받쳐 주고 촬영 구성안이 있다고 해도 촬영 내내 4명이 함께 다닐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무려 몽골이다.
촬영 장소는 몽골의 시골 중에서도 시골.
편의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락이 쉬운 것도 아닌 지역.
그런 상황에 겨우 PD가 하나라니.
촬영이 무너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일단 대책 회의 중이니까 내가 나중에…….
이거 아무래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선배님. 저도 몽골 가겠습니다.”
-네가?
임성진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너 피로는 어떻게 하려고? 미국까지 갔다가 거기서 바로 오고. 게다가 몽골까지 오면 장난 아닐 거 아니야?
“프로그램이 망하게 생겼는데 몸뚱이가 문제입니까?”
-하아…….
그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건 임성진도, 나도 알고 있다.
그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할 수 있겠냐?
“해야죠.”
나는 그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장난기 섞인 말을 보탰다.
“몽골 가 보고 싶긴 했어요. 게다가 저 예방 주사도 다 맞았다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하하핫.”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카메라 감독님한테 테이프 넘기고 제가 바로 몽골 갈게요.”
-……고맙다.
“고마우시면 나중에 밥 한 끼 사 주십시오.”
-알았다. 몽골에서 보자. 티켓은 우리 측에서 다시 예매해 줄게. 지금 조 작가가 찾아봤는데 홍콩 경유라네.
“알겠습니다. 티켓은 그러면 이메일로 보내 주세요.”
-그래. 보내고 다시 연락할게.
“예.”
전화를 끊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제는 한국에 있었는데 지금은 미국 LA에 있고.
내일은 홍콩을 경유해서 몽골로 간다니.
이게 PD야, 여행가야?
회귀하고 나서 어째 일이 술술 풀린다 싶더니만, 전생에서 겪어 보지 못한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어쨌든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게 그나마 청신호겠지.
그래, 좋게 생각하자.
황민찬 그 배신자 녀석이 나간 덕분에 본의 아니게 임성진의 신임을 격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게다가 어떻게든 몽골 촬영만 잘 마무리되면 출연진이건, 스태프건 간에 결속은 더욱 끈끈해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이는 앞으로 블라인드 미션을 진행할 때는 물론이고, 내가 JBC에서 나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연출할 때도 분명 큰 힘이 될 터.
딱 몽골 특집까지만 버티자.
그러면 그 뒤는 꽃길이다.
“후우.”
차분하게 머리를 가라앉혔다.
과정이 어쨌건 간에 일단 잭슨 킴의 논란이 종식되는 건 시간문제다.
몽골 특집만 걱정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한결 낫네.
그래. 회귀까지 했는데 이 정도 위기는 와야 밸런스가 맞는 거 아니겠어?
이걸 기회로 삼으면 오히려 더 좋은 법이지.
띠링-.
휴대폰에 알림이 울렸다.
-보낸 이: 홍사은 작가
-비행기 티켓 QR코드랑 일정 및 링크입니다.
메시지에 나온 링크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눈을 다시 부비고 봐도 내용은 변치 않았다.
……미친.
21시간?
문제는 이게 비행 시간만 계산한 거라는 사실.
중간에 경유할 때의 대기 시간까지 합치면…….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해지려고 한다.
“왜요, PD님.”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잭슨 킴이 가운을 두른 채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요?”
“……술이나 마시죠.”
“예?”
“아무래도 취해야 될 것 같습니다.”
* * *
잭슨 킴과 두 명의 VJ는 라운지에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먼저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해 출발했다.
나는 경유를 위해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상태.
또 일등석이다.
이번에는 WG엔터에서 끊어 준 게 아니라, 블라인드 미션의 제작비로 지불한 일등석.
작가들이 안 된다는 걸 임성진 PD가 바득바득 우겨서 직접 결제했다고 한다.
다음 제작비에 문제가 생길 것 같긴 한데…… 뭐, 이건 메인 PD의 영역이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그나저나 홍콩까지만 해도 16시간인데…… 도착까지 어떻게 참는담.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타자마자 기내식을 주나 싶어서 문을 열었는데.
“안녕하세여.”
웬 꼬마 애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어, 누구니?”
대충 보아하니, 8살? 9살?
특이한 게 있다면.
“저 사마르 빈 엘리샤라고 하는데여.”
이름처럼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
히잡을 두른 걸 보면 중동 쪽 국가인 것 같은데.
어눌한 발음이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고 있긴 했다.
“혹시 블라인드 미션 PD님 마자여?”
히잡 사이로 땡글땡글한 눈이 날 바라보고 있다.
“예, 맞는데…….”
“아, 그럴 줄 알았어!”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제가 예전부터 진짜 진짜로 소울코어 팬이거든여. 그 중에서 잭슨 킴 오빠를 제일 좋아해서 방송 다 챙겨본단 말이에요. 거기서 PD 아저씨도 봤어여.”
“그러셨구나.”
“그러면 아까 라운지에 같이 있던 남자도 잭슨 킴 오빠 맞아요?”
어쩐지 퍼스트클래스 라운지인데도 왠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니.
“네, 맞아요.”
“아, 사진 찍을걸…….”
엘리샤는 아쉬워하는 듯하더니.
“PD 아저씨, 저 사인 하나만 해 주시면 안 돼여?”
“미안하지만, 아저씨는 연예인이 아니라, 사인이 없어요.”
“그러면 사진 한 장만…….”
피로에 절어 있어서 몰골이 말이 아닌지라 거절하고 싶었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아이는 해맑은 미소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모로코 오면 저한테 연락해여. 제가 재미있는 곳 데려갈게여.”
“고마워요.”
“진짜예여.”
꼬마 아이는 옆에 서있던 검은 양복의 사내를 두드려 명함 한 장을 받아 냈다.
애기 아빠인가?
그녀는 그 명함을 내게 건네더니.
“그러면 실례했습니다.”
공손하게 배꼽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명함을 보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랍어인가?
모로코가 무슨 언어를 쓰더라?
확실한 건 여기 나온 언어 중에 내가 해석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
다만, 진짜 아이의 명함은 아니고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명함이겠거니 생각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귀엽네.
요즘 K-Pop이 대세라더니, 이런 곳에서 잭슨 킴 팬을 만날 줄이야.
세상 참 은근히 좁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