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위기는 언제나 기회와 함께 찾아온다 (6)
“아이고, 삭신이야…….”
온몸에 안 쑤신 곳이 없다.
21시간의 비행 시간. 경유 대기 시간까지 합치면 총 24시간.
꼬박 하루를 이동한 끝에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했다.
몸이 아픈 건 둘째 치고 피로가 전혀 안 풀렸다.
일등석도 이러는데 평소에는 어떻게 이코노미석을 타고 다녔는지 상상도 안 된다.
물론, 귀국할 때는 당연히 이코노미로 돌아가겠지만, 굳이 지금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휴대폰의 비행 모드를 풀자마자 곧장 홍사은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가님. 저 지금 공항 도착해서 입국 심사 끝냈습니다. 어디에 계세요?”
-아, PD님 오셨구나…….
왠지 모르게 침울한 목소리.
-저희 두 번째 게이트 입구에 있습니다.
원래 이렇게 우중충한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황민찬 PD 때문인가?
촬영 분위기가 꽤 안 좋은 것 같은데.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일단 와 보세요. 전부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에 나는 서둘러 홍사은 작가가 말해 준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보이는 수십 명의 인파.
카메라 장비와 세팅까지 되어 있는 걸 보면 우리 스태프들이다.
“선배님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몇몇이 나를 흘긋 바라볼 뿐, 달갑게 맞이하는 인물은 없었다.
아니, 인사를 받아 주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다.
촬영 중인 것도 아닌데, 다들 왜 이래?
나는 슬며시 홍사은 작가에게 다가가 물었다.
“작가님. 분위기 왜 이래요? 누가 사고 쳤어요?”
“PD님,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저희 폐지된대요.”
“……예?”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에이, 장난치지 마세요.”
그러나 이내 옆에 있던 한시아가 사실이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예요, PD님. 방금 한국에서 연락 왔어요.”
그럴 리가.
왜?
대체 왜?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새하얗게 변했다.
잭슨 킴 사건 때문에?
그럴 리 없다.
지금 한국에 도착한 VJ들이 방송국에 테이프를 넘겼고, 임성진 PD의 동기가 그를 대신해 편집을 위한 기본 작업을 해 주고 있는 상태.
물론, 잭슨 킴에 대한 논란이 있긴 했지만, 머지않아 해명될 게 확실한 상황인데 폐지라니.
말도 안 된다.
아니, 임성진 PD가 이걸 받아들였을 리 없다.
나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임성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라이 씨.”
그는 거친 말을 내뱉으며 몸을 돌려 저 멀리 가 버렸다.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머리가 지끈지끈 거려 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흐윽…….”
옆에 있던 한시아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통곡만 안 할 뿐이지, 어깨는 계속해서 들썩거렸고 눈물은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상태.
이런 상황에도 출연자들은 아무도 그녀를 위로하거나 다독이지 않았다.
아니, 다들 뭐 하는 거야?
왜 이렇게 이기적이지? 폐지된다고 나 몰라라 하는 거야?
나는 다른 이들을 흘겨보고는 한시아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시아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걸 거예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고는.
“제가 한국에 가서 다시 알아볼게요. 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 상황도 잘 마무리되고 있는데 갑자기 폐지될 리가 없…….”
그런데 한시아는 내 손을 휙 쳐내더니 한껏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째려보며 앙칼진 목소리를 냈다.
“전부 PD님 때문이에요!”
“……예?”
“PD님이 편집을 못 하니까 망한 거잖아요.”
화살이 갑자기 나한테 온다고?
이거 뭔가 개연성이 안 맞지 않아?
“맞아. PD님이 잘못한 거예요.”
옆에 있던 신미소까지 다가와 한시아를 거들었다.
“진짜 이거 어떻게 배상할 거예요?”
뭔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그러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이거 뭐야.
회귀 부작용인가?
생각하기도 잠시, 내 입에서는 저절로 사과가 나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려던 그 순간, 저 멀리 있던 카메라에 붉은빛이 들어온 게 눈에 띄었다.
나는 그 VJ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걸 왜 찍고 있어요?”
그 대답은 한시아가 대신했다.
“왜 찍고 있냐고요?”
순간, 눈물범벅이던 한시아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지더니.
“깜짝카메라니까 찍고 있죠!”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이 뒤쪽에 있던 스태프들과 출연진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들려왔다.
“으하하하핫!”
“제대로 낚였네!”
“이야, 강 PD 어벙벙한 얼굴 봤어?”
“신입 한 방 먹었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VJ들이 다가와 가까이서 내 얼굴을 찍기 시작했다.
“하…….”
깜짝카메라라니.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허, 참…….”
출연진들은 언제 심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누구 하나 빠짐없이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진짜 이 사람들 대박이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거 진짜 제대로 뒤통수 맞은 느낌이다.
제일 크게 웃던 박형준은 겨우 진정하고 다가와 내게 물었다.
“PD님, 깜짝카메라라고 의심 안 하셨어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죠. 근데…….”
나는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아니, 출연자 깜짝카메라는 해도, 어느 프로그램에서 PD한테 합니까? 다들 폐지되어서 분노 조절이 안 되나, 아니 미친 건가 생각했다니까요.”
다시금 출연진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이건 진짜다.
내가 예능 PD로 10년 동안 일하면서 회의실에서 우리 스태프들끼리 짜고 깜짝카메라를 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출연진까지 끼고 녹화까지 되는 상황에서 하는 깜짝카메라는 겪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억울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말이 술술 나왔다.
“아니, 한시아 씨가 그토록 서럽게 우는데 모두가 못 본 체하는 거예요. 와, 진짜 다들 냉정하다. 이 사람들 못 쓰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으흐흐흐. 미안해요, PD님.”
한시아는 웃다가 배가 아파서 눈물이 나는지 또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신미소는 이미 자지러져서 바닥을 치고 있는 상태.
“어휴, 진짜 식겁했다니까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런데 확실하게 폐지는 안 되는 거죠?”
“크흐흐흡……. 네. 안 돼요. 왜 갑자기 폐지되겠어요?”
“아, 저 진짜 멘탈 부서지는 줄 알았다고요.”
나는 터놓고 하소연했다.
“저 미국에서 홍콩 갔다가 거기서 바로 몽골 왔어요. 24시간 걸려서 왔는데 오자마자 또 한국 갈 생각하니까 눈앞이 아찔하더라니까요.”
제일 크게 웃던 임성진 PD가 뒤에서 다가왔다.
“오는 데 얼마나 걸렸다고? 20시간?”
“대기 시간까지 24시간이라고요!”
“으하하하하핫! 놀랄 만하네.”
나는 계속 실소를 흘렸고, 박형준은 손뼉을 치며 천천히 다가왔다.
“분량 잘 뽑아 주신 우리 PD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는 내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다시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블라인드 미션 몽골 여행,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 * *
“고생했다, 신입.”
어느새 다가왔는지 임성진 PD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식겁했어?”
“아, 진짜 선배님이 제일 나빠요. 이거 선배님이 기획한 거죠?”
“……글쎄?”
이거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이 인간이 주범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웬 깜짝카메라예요?”
그는 스태프들을 스윽 돌아보며 말했다.
“사건 터지고 황민찬 PD까지 나가니까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은근히 처지는 분위기였단 말이야. 그래서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뭐가 좋을까 생각했거든.”
분위기까지 생각한다니, 역시 메인 PD답다.
“그러면 조금 멀어 보이는 연예인 깜짝카메라보다는 우리 스태프들끼리 속여야 더 재미있고 짜릿할 것 같더라고.”
이전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몰라도, 지금 스태프들을 보면 실제로 확실히 텐션이 올라가 있다.
이게 임성진 PD의 성과라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메인 PD의 역할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또 하나 배웠다.
다만, 문제는 그 타깃이 나였다는 것이지.
“그 희생양이 저였고요?”
“희생양이라니, 봉사활동 한 셈 쳐.”
“나중에 복수할 겁니다.”
“내가 속을 것 같아?”
그는 얄밉게 검지를 양옆으로 저었다.
“예능 짬밥만 15년이다. 속이고 싶어도 못 속여.”
“그 도전 받아들이죠.”
“하하하, 노력해 보라고.”
임성진 PD는 내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스태프들은 각자의 장비들을 챙기며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에 반해 나는 뭔가 힘이 쭉 빠진 느낌이라 구석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시아는 나를 발견하고 슬쩍 다가와 내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PD님, 놀라셨어요?”
“저리 가요. 저 아직까지 뒤통수가 얼얼하거든요?”
“아, 미안해요.”
“진짜 속았다고요.”
한시아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 직업이 배우인 걸 어떡해요? 연기는 리얼하게 해야지.”
“지금 엄청나게 얄미운 거 알죠?”
“아, 방송 때문에 그런 거예요, 방송 때문에.”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먹으로 내 팔을 톡톡 두드렸다.
“이해해 주실 거죠?”
“다음에 미션 엄청 빡세게 할 테니까 마음의 준비나 해 두세요.”
“와, 그러기예요?”
한시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새로운 게스트까지 왔는데…….”
“네. 그럴 겁니다. 제대로 각오하세요.”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콜드레인 씨는 어디 있어요?”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미소 언니랑 이야기하고 있을 거예요.”
콜드레인은 워낙 넉살이 좋아서 그런지 적응이 빠르다.
신미소와 함께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걸 보니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는 듯했다.
물론, 저 인간도 심각한 표정 연기로 나를 속인 건 괘씸하니까 미션 빡세게 할 거다.
나는 벽에 기대며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잭슨 오빠 때문에 침울할까 봐 걱정하셨나 보네요.”
“많이 했죠.”
“그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잭슨 오빠가 한국 도착하자마자 몽골 촬영 힘내라고 영상편지까지 보냈거든요. 그것도 완전 해맑게요. 덕분에 분위기 완전 업(Up)되었어요.”
잭슨 킴도 꽤나 생각이 깊다.
출연진 중에 제일 낫다니까.
“참, 그 문제는 잘 해결된 거예요?”
“몽골 촬영 끝내고 돌아간 뒤에 바로 편집해서 저번 방송분에 붙여서 내보낼 거거든요. 그거 나가면 아마 논란 종식될 겁니다.”
“진짜 다행이네요.”
한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잭슨 씨가 마음고생 많이 했죠.”
나는 코를 찡긋하고는 기지개를 켰다.
“다들 준비된 것 같으니 저희도 출발하죠.”
“네, PD님!”
* * *
몽골 촬영의 마지막 날.
“오늘의 미션은 몽골 상식 퀴즈입니다. 바로 첫 번째 문제 나갑니다. 몽골에서는 특이하게 이것을 연료로 사용해 겨울철을 따뜻하게 지낸다고 하는데 이것은 과연 무엇일지…….”
촬영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굉장히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메인으로 진행하던 잭슨 킴이 빠진 탓에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게스트로 온 콜드레인이 새로운 느낌으로 그 자리를 채워 주고 있어서 프로그램의 분위기가 완전히 색다르게 느껴진달까.
“이런 느낌도 괜찮네요.”
“네. 덕분에 녹화는 잘 마무리될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다행이죠. 3박 4일이 정신없이 흘러간 느낌이에요.”
“실제로 그랬죠. 잭슨 킴 빈자리 느껴진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다들 악착같이 분량 뽑았잖아요.”
잭슨 킴이 결백한 건 출연진을 포함해 스태프 모두가 아는 사실.
외부 요인에 의해 프로그램이 폐지되기 직전까지 가서 그런지, 오히려 더 우리끼리 힘을 모아서 단단해지고 돈독해졌다.
게다가 콜드레인까지 그간 임성진에게 진 빚을 갚는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물론, 내게 진 빚은 따로라며 언제든 불러주라고 말하는 건 비밀.
덕분에 분량이 너무나도 많아서 오히려 걱정이었다.
한 번의 여행을 4주로 편성하는 평소와 달리, 조금 더 늘려야 하지 않나 싶은 수준이니까.
“그건 그렇고 한국에서 편집은 잘되고 있대요?”
“정확히 말하면 편집은 아니고 싱크만 맞춰 주고 있어요. 아무래도 편집은 제가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요.”
홍사은 작가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진짜 일 중독이에요.”
“제 일인데 당연히 제가 해야죠.”
“어휴, 가자마자 또 고생하시겠네.”
“제 일인데, 당연히 해야죠.”
그녀는 안쓰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PD님, 완전 다크서클이 다리까지 내려온 거 알아요?”
그 말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피곤하긴 오지게 피곤하다.
긴 비행으로 인한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촬영하느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으니까.
게다가 PD라는 직업이 본디 출연진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기에 피로가 풀리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래도 가서 미국 녹화본만 편집하면 쉴 수 있으니 다행이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잭슨 킴에 대한 논란이 종식될 거라는 생각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 되어 가고 있다.
우형민 CP 그 자식, 다음 방송 보면 꽤나 열 받을 거다.
나를 엿 먹이려던 계획이 완벽하게 실패할 테니까.
물론, 이걸로 끝낼 생각은 없다.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 잊지 말라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