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44화 (45/601)

44화 떡상의 신호탄 (6)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강 PD, 톡 왔나 보다.”

“아, 네. 죄송해요. 무음으로 바꿔 둘게요.”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며 휴대폰을 들었다.

“누군데?”

나는 메신저의 알림을 끄고는 휴대폰을 소파로 휙 던졌다.

“있어요, 귀찮게 하는 사람.”

임성진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었다.

“오, 우리 강 PD 썸 타나?”

“그런 거 아닙니다.”

나는 반대로 받아쳤다.

“그리고 썸은 선배님이 타시는 거 아닙니까?”

“이 자식 많이 컸네?”

“선배님한테 배운 거죠.”

나는 클클대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전혀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은근히 조금 보이더라고요. 코너 밀어주는 거나…….”

“에헤이, 내가 얼마나 공적인 사람인데. 공과 사는 구분하지.”

“그러신 분이 사전 답사 핑계로 러시아에 단 둘이 가십니까?”

“일이라니까, 일. 작가 중에 러시아어 할 줄 아는 사람이 현영이밖에 없는데 어떡해?”

“뉘예, 뉘예. 그러시겠죠. 그래서 사귀신 지 얼마나 되신 거예요?”

“얼마 안 됐어. 이제 한두 달 됐나?”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 선배님이? 아니면 조 작가님?”

나는 장난스럽게 아차 싶었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을 바꾸었다.

“아, 작가님이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해야 되나?”

“얼른 나가서 준비나 해, 인마.”

“이렇게 쫓아내시는 겁니까?”

“야간 미션 준비해야지. 안 할 거야?”

그가 눈을 부라리던 그때.

지이잉-.

이번엔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은 메시지를 날리던 사람과 동일한 인물.

아이고, 알람을 끄니 전화가 오네.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안 와도 돼.”

“저 안 오면 조 작가님 부르시려고.”

“너 이 자식 진짜…….”

“제가 선배님 사랑하는 거 알죠?”

나는 사랑의 총알을 탕탕 쏘며 방을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네, 유나희 씨.”

-아니, 왜 메시지 답장 안 해요?!

바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요?”

-답장을 안 하니까 그렇죠! 왜 읽지도 않아요?

……하아.

“씻고 있었어요.”

-남자가 무슨 샤워를 한 시간이나 해요?

음.

조금 날카롭네.

사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샤워는 20분 정도 걸렸지만, 나머지 40분은 귀찮아서 안 읽은 거니까.

까놓고 말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의상 편하게 문자하라고 말은 했는데, 오늘부터 다짜고짜 연락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

게다가 한두 번도 아니고 쉬는 시간 내내.

-유나희: 있잖아요, 제임스 카터 감독님 영화 ‘안개 속에서’ 다시 보고 있거든요? 그거 숨겨진 미장센 찾아냈어요. 17분 50초 보면 주인공이 분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유나희: 제임스 카터 인터뷰 보셨어요? 제가 링크 보내 드릴게요.

-유나희: 아, 맞다. 이번에 감독님 또 새로운 독립 영화 준비하고 계시다는데 소식 들었어요?

-유나희: 나중에 ‘춤추는 꽃’ 한 번 봐보세요. 그거 진짜 대사 한 줄 한 줄이 미쳤어요. ‘내 하루하루 1분 1초가 오직 너로 가득 채워지고 있어.’, ‘여느 때와 같았지만, 당신 때문에 여느 때와 달랐던 하루였어요.’, ‘흘러가는 바람에 꽃이 살랑일 때마다 내 심장은 요동칠 뿐이었다.’ 이거 봐요. 제가 알아보니까 이거 각본도 제임스 카터 감독님이 직접 쓰셨대요.

-유나희: PD님은 이런 영화 쪽에는…….

제임스 카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런 내용으로 쉴 새 없이 문자가 오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니까.

-답장 진짜 안 할 거예요? 샤워한다고 거짓말까지 치고?

아무래도 온종일 까이겠다 싶어 능청스레 둘러댔다.

“사실, 다음 게임 준비하고 있었어요. 출연진들한테는 비밀이라 말을 못 한 거고요.”

-일을 그렇게 오래…… 아, 막내 PD님이셨지.

임성진 PD님이 서브라고 불러 주긴 했지만, 구태여 토를 달진 않았다.

-그러면 인정해야죠. 일한다는데, 뭐…….

많이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래도 일한다니 수긍하는 모습.

-근데 다음 미션은 뭐예요?

“당연히 비밀이죠.”

-와, 우리 사이에?

“출연진이랑 PD 사이니 더욱더 비밀을 지켜야죠.”

-됐어요.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뒤, 유나희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나저나 PD님은 어떤 영화 좋아해요? 아직도 그걸 안 물어봤네.

나는 장난스레 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제임스 카터 감독님 말고 다른 거 물어보는 건 처음 보네요. 나희 씨는 다른 사람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예의상 물어본 거거든요?

유나희는 급 짜증을 내면서 소리쳤다.

-끊어요!

“하하, 장난…….”

뚝.

내 웃음소리도 듣기 전에 끊은 것 같다.

성질머리가 진짜 더럽긴 더럽다니까.

그때, 저 멀리 있던 김연희 작가가 날 불렀다.

“강 PD님, 나온 김에 이거 준비 좀 도와줄래?”

“아, 네. 뭐 하면 돼요?”

* * *

“내일은 기상 미션이 없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다들 손뼉 치고 좋아했을 말이지만, 이제는 다들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냈다.

“순순히 쉬게 할 리가 없어.”

“‘기상 미션은 없지만 잠은 못 자게 해 드립니다.’ 이런 거 아니에요?”

“다른 미션 있죠?”

“이제 출연진분들이 너무 잘 아시네.”

임성진 PD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예상하셨다시피 지금 새로운 미션이 있습니다. 이번 특집은 바로 납량 특집이죠? 게다가 오후 10시가 넘은 캄캄한 시간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아, PD님…….”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제발 하지 마요!”

임성진 PD는 흡족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바로 담력 테스트입니다!”

그의 말에 출연진들의 얼굴에 낙담한 기색이 드러났다.

“하…….”

“망했다.”

더 불평이 나오기 전에 임성진 PD는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혼자 가면 무섭고 위험할 수 있으니 2인 1조 팀으로 하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대신 VJ분들을 포함해 어떤 스태프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카메라도 저희가 들고 가요?”

“예. 맞습니다. 그 대신 담력 테스트 장소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게 위로예요?”

“위로는 말 대신 보상으로 해야죠.”

보상이라는 말에 출연진들의 눈이 반짝였다.

“쉬는 동안 다들 방 확인하셨죠?”

“네. 방이 6개나 있던데요? 방마다 이름도 붙어 있고.”

“오늘은 1인 1실입니다. 그리고 1등 팀에게는 가장 넓은 방을, 2등 팀에게는 중간 방, 꼴등 팀에게는 제일 좁은 방을 드릴 겁니다.”

“좁은 방은 거의 고시원 수준이던데…….”

“그러니까 꼭 1등 하셔야겠죠?”

“진짜 악마야, 악마.”

“PD님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아, 참고로 빨리 들어온다고 해서 1등이 아닙니다. 평소와 달리 마이크에 데시벨 측정기를 달아드릴 건데 제일 높은 수치를 기록한 사람이 꼴등입니다. 즉 최대한 소리를 지르면 안 되겠죠? 그리고 게임 중에는…….”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잭슨 킴이 손을 들고 물었다.

“아, 그런데요, PD님.”

“네.”

“그런데 이번에는 게스트로 나희 씨가 오셔서 5명인데 2명씩 팀을 짜면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해요? 설마 혼자 가요?”

“아닙니다.”

임성진 PD는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강준수 PD님이 마지막 한 분과 함께 가실 겁니다.”

“혼자 안 가서 다행이네.”

“혼자 가야 됐으면 그냥 포기하고 꼴등 방 갔을 거야.”

“팀은 어떻게 정하나요?”

“뽑기로 정합니다.”

그렇게 선정된 결과.

첫 번째 팀은 잭슨 킴과 박형준.

두 번째 팀은 신미소와 한시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나희와 내가 한 팀이 되었다.

작가들은 이 결과를 보자마자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 PD님이 잭슨 킴이랑 한 팀이 되었어야 하는데.”

“진짜 아쉬운데. 그래야 그림이 딱 나왔을 텐데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팀 만들 때 우리끼리 조작이라도 할 걸 그랬나?”

“둘이 남남 커플 케미가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저기요, 작가님들. 다 들리거든요?

* * *

“두 번째 팀 출발해 주세요!”

신미소와 한시아는 시작부터 서로 팔짱을 끼고 천천히 출발했다.

앞 팀과의 간격을 두기 위해 찾아온 잠깐의 대기 시간.

유나희는 입을 닫은 채 홀로 도도하게 서 있었다.

“나희 씨, 귀신 안 무서워하세요?”

“소리 안 낼 자신은 있어요.”

통화할 때와 달리 그녀는 카메라가 켜진 내내 쌀쌀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

그녀는 은근히 나를 가소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PD님은 무서워하시나 보네.”

“그럴 리가요.”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귀신 자체를 안 믿거든요.”

“그러면 아주 조용히 통과해서 1등 하면 되겠네.”

“나쁘지 않죠.”

머지않아 찾아온 우리의 차례.

임성진은 음흉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 눈빛을 보아하니 귀신 세팅을 아주 어마어마하게 준비해 놓은 모양인데?

“자, 유나희팀 출발해 주세요!”

“네.”

우리는 한 발자국 떨어져 걸어가기 시작했다.

예고했던 대로 VJ를 포함한 어떠한 스태프도 따라오지 않았고.

내가 카메라를 들어 우리를 셀프 캠으로 찍었다.

“산속에 들어오니까 추운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유나희는 짧게 대답하며 태연하게 걸었다.

이 여자, 진짜 귀신 안 무서워하나?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우워어어!”

처녀귀신 분장을 한 스태프가 큰 소리를 내며 뛰어 나왔다.

“어,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나뿐이었다.

슬쩍 옆을 돌아보자, 유나희는 미간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입은 꾹 닫고 있는 상태.

“진짜 안 무서워하나 보네.”

“……얼른 가기나 해요.”

그렇게 한 1분쯤 걸어갔을까.

쿵!

“뒤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아요?”

“모르겠는데.”

쿵! 쿵!

“나는 것 같은데요? 땅 울리는 소리 같은데.”

우리 둘이 동시에 뒤를 돌아본 순간.

새파란 조명이 점멸하며 이마에 부적을 붙인 강시가 육중하게 두 발을 모아 뛰어오고 있었다.

“뛰, 뛰어요!”

유나희와 함께 달려 강시를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웨에에에에!”

이번엔 좀비 분장을 한 스태프들이 튀어나왔다.

“엄마야!”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주춤했다. 그런데 옆에서는.

“으읍!”

비명도 아닌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유나희가 눈을 꼭 감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설마 데시벨 측정기에 소리 안 들어가게 하려고 일부러 참고 있는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서우면 소리 질러도 돼요.”

그녀는 태연하게 눈을 뜨더니.

“제가 어, 언제 무서워했다고 그래요?”

다시금 홀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저기 방금 말까지 더듬으신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예요.”

“아닌 것 같은-.”

푸드드득-.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큰 소리를 내고서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순식간에 날아갔다.

“으으읍!”

“저기 나희 씨?”

“…….”

유나희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무서우면 손이라도 잡아 드려요?”

“하나도 안 무섭거든요?”

다시금 유나희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지만.

몽달귀신, 처키 분장, 달걀귀신도 모자라 착신아리 BGM에 온갖 괴담에 어울리는 오르골 버전의 엘리제를 위하여까지.

결국 유나희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럼에도 놀라운 건.

“읍!”

여전히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것.

누가 유나희 아니랄까 봐 진짜 독하다, 독해.

“괜찮아요?”

유나희는 다리를 모아 안고 도리질을 했다.

“힘들면 좀 쉬었다 갈래요?”

그러나 그녀는 이내 포커페이스를 되찾고서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다.

“갈 수 있거든요? 무서워서 앉은 게 아니라, 벌레가 지나가서 그런 거예요.”

유나희는 씩씩하게 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조금만 천천히 가요.”

혼자 찔렸는지 유나희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다리가 아파서 그런 거니까 오해하지 말고.”

“안 하니까 걱정 마요.”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유나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밤에도 하얗게 보일 정도니 얼마나 창백한지는 가늠이 안 갈 정도였다.

그것도 모자라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놀라울 따름이다.

“땀이 너무 많이 나는데 진짜 괜찮겠어요?”

“더워서 그런 거거든요? 더워서.”

그녀는 날 쏘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도 열대야 때문에 날씨가 너무-.”

콰직-.

그때, 유나희가 바닥에 있는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뜨렸고, 그 탓에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그녀가 넘어지기 직전.

나는 팔을 뻗어 넘어지려는 유나희를 받아 냈다.

“조심해요.”

유나희는 이 상황에도 입을 다물고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이런데도 참으려고 하다니.

오히려 안쓰러움이 느껴질 정도다.

이 정도면 단순히 미션 때문에 참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 힘들면 쉬자니까.”

유나희는 어색하게 일어나며 헛기침을 했다.

“얼른 앞장이나 서요. 더워서 빨리 숙소 가서 씻고 싶으니까.”

진짜 이 정도면 고집도 똥고집이다.

설득하기를 포기하고서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 걸음을 앞으로 옮기자.

꾹.

옷깃이 뒤로 끌렸다.

정확히는 유나희가 내 소매를 잡고 있었다.

“방금 다리 다쳤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유나희의 발목을 살폈다.

그러나 유나희는 슬쩍 발을 뒤로 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움직이는 걸 보면 다친 건 아닌 것 같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러게 무서우면 진즉에 손잡으라니까.”

유나희는 기가 찬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PD님이 길 잃을까 봐 그런 거거든요?”

그러면서도 유나희는 슬쩍 손을 뻗어 내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얼른 오기나 해요. 또 넘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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