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얽히고설켜도 끝내 (1)
“앵글은 괜찮아요?”
“예. 한번 보시겠어요?”
VJ가 보여 준 카메라 화면엔 버스킹 무대가 선명히 찍히고 있었다.
“괜찮네요.”
“네. 오히려 비가 와서 더 운치 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황정무가 말했던 게 바로 이런 점이다.
비가 올 때 야외 촬영을 하면, 그림은 정말 기가 막히니까.
신나는 템포 위주의 곡 선정이기에 분위기가 조금 맞지는 않지만, 그건 편집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한 부분이기에 심려하지 않아도 될 터.
그때, 황정무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강 PD, 이거 천막 치지 말자고.”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어. 카메라에도 잘 나오는 거 같고, 천막 치면 괜히 폼 잡는 것 같잖아. 우비 입고 열정을 보여 주자고.”
“알겠습니다. 이 정도 부슬비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나는 스태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천막은 설치하지 마시고 장비에 우천 비닐 잘 덮어 주세요.”
“예.”
나는 악기를 조율하고 있는 멤버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선 밟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스피커나 앰프를 포함해서 장비들은 감전될 가능성이 없는 안전한 장치들로 구비했다고는 해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네, PD님.”
“그러면 10분 뒤에 바로 버스킹 시작하겠습니다.”
버스킹 무대 주변으로 모이는 관객들은 평소에 비해 훨씬 적었다.
홍사은 작가는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비가 와서 사람들이 지켜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우천 상황이기에 관객 수가 적을 거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적었다.
보통 무대를 설치하다 보면 하나둘씩 모여들어 빙그르르 둘러쌀 정도는 되지만, 지금은 우산을 쓰고 가다가 얼핏 보고는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지금 당장 반응은 안 좋을 수도 있는데, 비가 오는 데다가 관객까지 없는 상황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면, 시청자들에겐 그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더 좋긴 하네요.”
잠시 후, 이수정 PD가 나에게 다가왔다.
“준비됐습니다, 출연진들 입장시킬까요?”
“그래, 한번 해 보자고.”
나는 손뼉을 두 번 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버스킹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자리로 가 주세요!”
***
투두둑. 투둑.
“이런 망할 놈의 기상청 녀석들.”
내일까지 변함없이 부슬비가 올 것이라던 예보와는 달리,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일기예보는 맞았던 적이 없어.”
스태프들 사이에서 지켜보던 매니저들이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PD님, 그림은 괜찮게 나오고 있나요?”
이러다가 본인들의 연예인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봐 우려가 되는 것일 테지.
나도 머리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었다.
카메라로 찍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빗줄기가 굵어진 탓에 녹음되는 음향의 품질이나 녹화되는 화질이 양호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철수할 수도 없었다.
황정무를 포함한 출연진들이 이번 빗속의 버스킹을 준비하면서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은 다름 아닌 ‘열정.’
관객이 적을 뿐이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공연을 하다가 비가 조금 굵어졌다고 철수하는 모습을 보여 줘 놓고 방송에서는 ‘열정’이라고 포장한다면, 분명 현장에 있던 관객들로부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터.
리얼을 추구하는 방송에서 거짓을 가미할 수는 없었다.
이수정 PD가 면접에서 말했던 ‘적당히 사기를 치는 것’과 ‘거짓’은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니까.
“현민아, 지금 몇 곡 남았지?”
오현민 PD는 리스트를 흘긋 확인하고는 말했다.
“지금 연주하는 곡 제외하면 두 곡입니다.”
나는 매니저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앙코르 없이 기본 곡만 하고 철수하도록 할게요.”
평소의 버스킹에서는 관객들의 환호에 힘입어 앵콜에 앵앵콜까지 하는 경우가 다분하지만, 오늘은 관객도 많지 않고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다.
“감사합니다, PD님.”
“아닙니다.”
마침 김철승의 기타 연주를 끝으로 곡이 완주되었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출연진들을 향해 말했다.
“예정된 두 곡만 더 부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네.”
박시완이 조심스레 마이크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감싼 채 걸어 나왔다.
“잠깐, 물 한 모금만 마시고 갈게요.”
이에 최창식은 드럼스틱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나는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10분 쉬었다가 진행하겠습니다.”
최창식이 화장실로 떠난 뒤, 나머지 출연진들은 자연스레 팬들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 주거나 사인을 해 주는 등의 시간을 가졌다.
잠깐의 휴식 시간에 처음부터 자리를 지켰던 몇몇 관객을 제외하고는 하나둘씩 떠나가고 있었다.
황정무는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준 뒤, 스태프들의 천막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묻은 비를 털어 주며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어, 당연하지.”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푸근하게 웃음을 지었다.
“비 올 때 야외 촬영 한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게다가 우비까지 쓸 수 있으니 이 정도면 훌륭하지.”
“기본 곡만 끝내고 얼른 숙소로 돌아가서 한잔하시죠.”
“좋지. 이런 날은 뜨끈하게 국물에 소주로 몸을 녹여 줘야 되거든.”
“아까는 파전에 막걸리였는데 바뀌었네요.”
“비가 많이 오잖아.”
황정무는 능청스레 말했다.
“이게 또 강우량에 따라서 주종(酒種)이랑 안주가 바뀌는 법이거든.”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 태풍이 오면 보드카를 마셔 줘야 돼. 그래야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취해서 발 닦고 잠들거든.”
그때, 팬서비스를 마치고 온 박시완이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PD님, 선배님. 무슨 이야기하고 계십니까?”
“끝나고 술 한잔하려고 메뉴 정하고 있었지. 시완이 자네도 올 거지?”
“그럼요. 회식은 당연히 가야죠. 준비 기간 동안 회식 없었던 게 얼마나 서운했는데요.”
“하하하, 그래. 이게 남자들 마음은 다 똑같다니까.”
저번 선물 이후로 다행히 박시완도 멤버들 사이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특히 황정무와 친해진 덕이 컸고.
이대로만 가면, 아마 ‘컴백 프로젝트’가 끝나고도 계속 연이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나눴을까.
박시완이 문득 시계를 확인하고는 주변을 살폈다.
“최창식 선배님이 많이 늦네요.”
“그러게요.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여기서 화장실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
5분이면 갔다 올 거리지만, 벌써 20분이 다 되어 가는 상태.
큰 거라면 모를까, 분명 물을 많이 마셔서 간다고 했는데.
“현민아.”
나는 멀리 있던 막내 PD 오현민을 불렀다.
“한번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최창식 씨 언제 오냐고 물어봐 봐.”
“알겠습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들려는 찰나.
“PD님!”
저 멀리서 막내 작가 공주연이 황급히 뛰어왔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가 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무슨 일 있어요?”
“최창식 씨가 일반인들이랑 시비가 붙은 것 같아서요.”
“시비요?”
이런, 어쩐지 늦는다 했더니만.
“그게…….”
“일단 가 봅시다.”
뒤따라오던 황정무와 박시완은 손을 뻗어 만류했다.
“혹시 모르니까 여기서 대기하고 계세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괜히 다른 연예인까지 엮였다가는 더 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까.
나는 이수정 PD와 오현민 PD를 데리고 공주연 작가가 이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공주연 작가는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때 폭행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같았어요.”
“폭행 사건이요?”
“네. 예전에 최창식 씨 자숙하게 만들었던 그 ‘부산 꼼장어집 폭행 사건’의 가해자들이요.”
이거 완전 미친놈들이잖아.
언제 적 사건인데 이제 와서.
게다가 이미 대법원에서 정당방위로 무죄 판결까지 받았는데 촬영장까지 찾아와?
‘컴백 프로젝트’가 이미 전파를 타며 화제가 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게 분명하다.
아무리 이번 촬영 장소가 부산이라고는 해도, 대충 시비나 걸려고 찾아온 게 아닐 터.
“현민아.”
“예, 선배님.”
나는 옷깃 위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이거 남는 거 하나 가져와.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그를 뒤로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얼마 걷지 않아, 저 멀리서 비를 맞으며 언성을 높이고 있는 최창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가 세 명인 걸 보니, 부산 꼼장어집 폭행 사건의 가해자 녀석들이 전부 찾아온 모양.
나는 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 촬영 중인 프로그램 PD입니다. 잠깐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아이고, 이제 PD 양반까지 불렀네?”
나를 흘기며 비꼬는 목소리에 최창식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이 새끼들이 진짜…….”
최창식은 이미 얼굴까지 붉어진 상태.
“제가 이야기할게요.”
이수정 PD에게 눈길을 주자, 그녀는 최창식을 진정시키기 위해 뒤로 데려갔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남자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PD 양반.”
셋 중에 가장 덩치가 큰 대머리 녀석이 껄렁하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요즘 TV에도 나오고 기사도 엄청 나오더만.”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그를 바라봤다.
“우리 같은 피해자들은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엄청나게 마음이 아파. 저릿저릿하다고. 막 TV보면서 치가 떨려. 나를 때린 녀석이 저렇게 웃으며 TV에 나오고 있구나, 생각만 해도 억울하다고.”
피해자는 개뿔. 성희롱에 폭행까지 저지른 녀석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자빠졌다.
“진짜 눈물 나.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가족들까지 슬퍼한다고.”
녀석은 소매를 걷어 팔에 난 상처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거 흉터 보여?”
그는 최창식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나는 TV 볼 때마다 예전에 저 인간한테 맞았던 이 부위가 시리고 아프다고. 후유증이라는 건 평생 가는 법이잖아. PD 양반도 공부 많이 했으니 잘 알 거 아니야?”
얼마나 더 지랄할까 싶어서 조용히 들었다.
그러나 녀석은 멈추지 않고 점입가경,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씨불이기 시작했다.
“최창식 저 인간 때문에 우리 세 명 다 나란히 빵에 다녀왔어. 거기 얼마나 춥고 배고픈지 알아? 그런데 나오고 보니 일을 못 해. 왜?”
그는 다시금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팔이 시리다고. 힘을 주면 아파.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싶어도 저 인간 때문에 빨간 줄이 그어져서 취직을 못 해. 그런 상황에서 뻔뻔하게 최창식이 공중파에 나와서 얼굴을 비치고 있어. 어떻게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고.”
범죄자 녀석들이 말하는 본새하고는.
뒤에 있던 최창식은 이를 갈며 녀석들을 쏘아봤다.
“우리가 더 많이 맞았는데, 저 녀석은 무죄고 우린 폭행죄야. 말이 돼?”
‘당신들이 먼저 쳤으니까 말이 되지.’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최대한 차오르는 분노를 눌렀다.
여기서 화내는 건 녀석들이 원하는 일.
괜히 말릴 필요 없다.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사과는 바라지도 않아. 그런데 말이야.”
그제야 녀석은 양아치스러운 본색을 드러냈다.
“나만 바라보며 입 벌리는 아기 새들이 집에 있다고. 밥을 먹여야 되는데 누구 때문에 아프고 취직도 못 해서 ‘생활비’가 없어.”
‘생활비’에 힘을 주어 말하는 걸 듣는 순간, 직감이 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질질 끄나 했더니만.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직까지 말을 못 알아먹나? 더 쉽게 말해 줘야 돼?”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정색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돈을 달라 이겁니까?”
원하는 말이 나왔는지, 순식간에 녀석들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히쭉 휘어졌다.
“아, 역시 PD 양반이 오니까 이제 말이 좀 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