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스치기만 해도 인연인데 (6)
이수정 PD를 포함한 우리 스태프들은 모두 퇴근하고, 나 홀로 회식에 참석했다.
“아, 진짜요?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어요?”
“네. 사실, 방송에는 못 냈지만…….”
내가 맡은 프로그램을 흥행시킨 게 이런 자리에서도 자연스레 도움이 되었다.
임은혜가 ‘컴백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마지막 화까지 전부 본 덕분에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게 어렵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술까지 한두 잔 들어가니, 가까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와, PD님이랑 코드가 잘 맞는 것 같아. 나 이렇게 대화 잘 통하는 사람 오랜만이야.”
“그래요?”
“네. 나중에 PD님이 제작하시는 프로그램 같이 해 보고 싶어졌다니까요. 시간 되면 또 우리 촬영장 놀러오세요.”
“그럴게요.”
그때, 박희준 감독이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2차 가자고! 노래방 어때?”
“오, 감독님. 좋습니다!”
남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자연스레 그에게 동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한성은 배시시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PD님도 2차 가실 거죠?”
“아니요. 저는 이제 피곤해서 들어가 쉬려고요.”
“에이, 같이 가요.”
“내일 촬영 있잖아요. 게다가.”
일부러 목소리를 살짝 높여서 임은혜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신촌까지 가려면 한참 걸려요. 지금 출발해도 1시 넘어서 도착할걸요.”
“어?”
역시나.
임은혜는 외투를 챙기다가 내게 다가왔다.
“PD님, 신촌 사세요?”
“네.”
나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은혜 씨도 그쪽 사세요?”
“저는 합정이요.”
그녀는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촬영장에서 만날 게 아니라, 동네 친구 하면 되겠네!”
과거에도 사는 곳이 가깝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어 저녁에 한두 번씩 만나다 친해졌었지.
“이럴 게 아니라, 저랑 같이 가요.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태워 드릴게요.”
“에이, 너무 민폐일 것 같은데. 매니저님도 귀찮으실 테고.”
그때 그녀의 매니저가 옆으로 다가왔다.
“아닙니다. 같이 타고 가시죠. 어차피 가는 길이라 괜찮습니다. 지금 택시 타시면 할증까지 붙어서 비쌀 거예요.”
“그렇게까지 말해 주신다면야, 감사히 타겠습니다.”
“네. 그러면 먼저 차 빼 둘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매니저가 떠난 뒤, 나는 박희준 감독을 비롯해 스태프들과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한성도 마지막 남은 대방어를 한 점 입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히 가세요, PD님.”
“그래요. 한성 씨도 내일 촬영이니까 너무 늦게까지 달리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내일 봬요!”
“그래요.”
2차를 노래방으로 갈 것이냐, 술을 마실 수 있는 노래타운으로 갈 것이냐며 행선지를 논의하는 제작진을 뒤로하고 나는 임은혜와 자연스럽게 식당 앞으로 나왔다.
“실장님이 조금 늦네요.”
“차를 멀리 주차하신 것 같아요. 아까 이 근처에 차 댈 곳이 없더라고요.”
“아, 그러면 안에서 조금 더 있다가 나올 걸 그랬나.”
“금방 오실 거예요.”
그때, 문득 그녀와 신촌에서의 추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이 앞에 24시간 카페 있던데 커피 한 잔 들고 갈까요?”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상하게 술을 마시면 커피가 당기더라고요.”
“어, 저돈데?!”
“그러면 같이 가시죠. 커피는 제가 살게요.”
“아, 좋죠. 매니저한테 카페로 오라고 할게요.”
우리는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근처의 24시간 별다방 카페.
나는 주문대 앞에서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은 뭐 드시죠?”
“김 실장님은 아메리카노요. 시원한 걸로 샷 추가해서. 이 추운 겨울에도 아이스만 먹는다니까요.”
“그러면 샷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나는 늘 그렇듯이 주문했다.
“저는 리스트레토 비안코 따뜻한 거로 한 잔이요. 은혜 씨는 뭐 드실래요?”
옆을 돌아보자, 임은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저도 그거요.”
주문을 마치자, 그녀는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내 소매를 잡으며 물었다.
“PD님 원래 그거 드세요?”
“네?”
“리스트레토 비안코요. 이거 메뉴판에 없는 커피라서 진짜 웬만한 사람들 모르는데.”
너에게 배웠다.
10년 전에.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취향이 바뀌지 않았다.
“친구가 알려 줬어요. 마셔 보니까 맛있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저도 여기 체인점 오면 늘 이것만 마시거든요.”
“저도요.”
“우리 진짜 공통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녀의 취향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다만, 마음 아픈 게 있다면.
과거에 나누었던 추억들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
회귀라는 게 온전히 장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씁쓸한 생각도 들었지만, 짐짓 그 감정을 숨겨 냈다.
회귀를 했기에 과거에 지키지 못했던 사람을 지킬 수도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니까.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나오자, 마침 임은혜의 매니저가 차를 몰고 도착했다.
임은혜는 차를 타자마자 아메리카노를 운전석으로 건넸다.
“실장님, 여기 커피. PD님이 사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PD님.”
“천만에요.”
나는 임은혜의 옆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이게 쓰지 않고 뒷맛이 고소해서 맛있어요.”
“맞아요, 맞아. 이게 산미가 부드럽고 깊은데 은근 깔끔해요.”
“부담스럽지도 않고. 그래서 술 마시면 당긴다니까요.”
“아, 어떻게 나랑 생각이 이렇게나 똑같지? 제가 이 커피 좋아하는 이유가 딱 PD님이 말한 그 자체거든요.”
임은혜는 너무 좋다는 듯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PD님, 신촌 사신다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혹시 서교동에 있는 ‘산해궁’ 가 보셨어요?”
“아, 거기 고량주 맛있죠. 칭따오랑 고량주를 딱 소맥 비율로 섞으면 과일 향 나면서 맛있거든요.”
“대박! 역시 아실 것 같았어. 제가 김 실장님한테도 고량주랑 칭따오 섞는 걸 몇 번이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는 끊기지 않았다.
오히려 술자리에서보다 텐션이 높으면 높았지, 낮아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임은혜에게 10년 전처럼 설레거나 떨리는 감정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정신적으로나마 나이를 들었고, 좋아했던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일 테지.
그렇기에 더욱 다행이었다.
그녀를 사심 없이 대할 수 있기에 과거와 같은 감정의 소모가 일어나지 않을 테고, 제3자의 시선에서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을 터.
그렇기에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테고, 과거와 같은 불상사를 마주하지 않을 테니까.
“PD님.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다음 주에 산해궁에서 같이 고량주 한잔할까요? 이야기하다 보니 당기네.”
“좋죠.”
* * *
‘나의 일상 다이어리’의 두 번째를 맡은 이한성 편도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한시아와 미스터 쿼카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며 착실하게 큐튜브의 구독자를 쌓는 데 성공했고.
그 뒤로 출연한 블랙다이아를 비롯해 나와 연이 없던 인물들까지 섭외하며 자연스레 흥행가도에 들어섰다.
“벌써 50만이네요.”
구독자 수 50만.
큐튜브를 시작한 지 3주 만에 거둔 쾌거였다.
“올해 목표는 이뤘네요.”
처음 ‘나의 일상 다이어리’의 제작을 시작할 때 우리가 세운 목표는 2021년 안에 50만 구독자 수를 보유하는 것.
새해를 한 달이나 앞둔 12월 1일에 그 목표를 달성했다.
“잘하면 올해 100만 구독자까지 찍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욕심은 내더라도 무리는 하지 말자고.”
“물론이죠.”
“저번에 말했던 섭외 건은 확정됐어?”
“예. 드림소다가 OK 하긴 했는데, 지금 당장이 아니라 컴백 시기에 맞춰서 촬영을 했으면 하더라고요. 아직 멤버들이 준비가 안 되었나 봐요.”
아무래도 최근 몇 달 동안 공백기였던 탓에 개인 활동을 하는 멤버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체중이나 피부 관리, 헤어 등을 가꿀 시간이 필요할 터.
일반 연예인이 아니라, 신인 아이돌이니 더욱 그렇겠지.
“그래. 그러면 우선 미팅 날짜만 잡아서 알려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드림소다에서 선배님을 아는 친구가 있던데요?”
“어, 맞아. 얼마 전에 동기 프로그램 놀러 갔다가 같이 회식했거든. 거기 출연진으로 나왔었더라고.”
아직도 기억난다.
한시아와 친구였던 드림소다의 메인보컬 김채이.
엄청나게 소심했었지.
“그러면 사전 미팅에서 선배님도 참석하시도록 준비할까요?”
“그렇게 해.”
“예.”
이수정 PD의 질문이 끝나자, 김시원 작가가 입을 열었다.
“PD님. 그리고 연예인들이 최근에 얼굴을 많이 보인 만큼, 저희가 처음에 기획했던 대로 전문직 일반인들도 한번 섭외해 보면 어떨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후보는 있어요?”
“네. 요즘 한창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중증외상센터의 백강혁 교수나 대검찰청 반부패부 최서준 부장검사라면 직업 윤리도 잘 지키는 거로 유명한 데다가 몇 번 매스컴을 탄 적이 있어서 대중들에게 낯설지도 않아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검사는 공무원인데 괜찮으려나?”
“최근 들어서 검찰이 이미지 쇄신 차원으로 투명한 윤리 정신을 홍보한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출연료는 받지 않고 전액 기부하는 것으로 알려졌고요.”
“그러면 둘 다 한번 섭외해 봐요.”
“알겠습니다.”
그때 이은솔 작가가 내게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PD님. 이거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뭔데요?”
“해외 구독자 수 비율입니다. 최근에 많이 늘고 있어요.”
아직 5%에 불과하지만, 콘텐츠 자체가 전부 한국어로 진행되는 걸 생각하면 꽤나 높다고 볼 수 있는 수치.
“번역 외주 섭외해야겠는데?”
“한번 알아볼까요?”
“괜찮은 사람으로 알아봐요. 우선은 영어, 중국어, 일어 정도만 해 보고 반응 좋으면 더 늘리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해외 구독자가 늘어난다면, 단순히 국내 스타보다도 국외에서도 이름을 알린 K-Pop 가수들이 출연했을 때 포텐이 터질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다음 촬영에 유나희 한 번 갈까요?”
작가들의 눈빛이 빛났다.
“유나희면 무조건 환영이죠.”
“조회 수 대박 날걸요?”
“해외 조회 수만으로도 미스터 쿼카 넘을 수도 있어요.”
‘역시 유나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단숨에 만장일치 의견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유나희는 제가 직접 섭외해 볼게요.”
시키지 않아도 홍사은 작가는 스스로 일을 맡았다.
“유나희 씨 촬영 구성안은 오늘 내로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역시 든든하다니까.
“그래요.”
나는 서류를 덮으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올해까지 최대한 큐튜브를 키워 둬야 해요. 내년부터는 MBS에서 예능 신작까지 동시에 진행해야 되니까 정신없을 겁니다. 연말이라 바쁜 거 알지만,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네, PD님.”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와 곧장 유나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한참이나 울리고 나서야 그녀가 응답했다.
-……여보세요.
완전히 잠긴 목소리.
“자고 있었어요?”
-……네.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자요? 해가 중천에 떴구먼.”
-어제 녹음한다고 밤샘 작업 했거든요?
유나희는 특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잔소리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요.
“저 큐튜브 하는 거 알고 있죠?”
-알죠. 나한테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거 출연 한 번 하실래요?”
-저 외출 잘 안 해서 재미없을 텐데.
“집에 있는 ‘일상’을 담는 거죠. 프로그램명이 괜히 ‘나의 일상 다이어리’겠어요?”
-집이요?
“네. 제가 직접 나희 씨 댁으로 갈게요.”
-생전 안 그러다가 촬영한다니까 친절한 척하는 것 봐.
그녀는 까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람 잘못 사귀었다니까.
“에이, 왜 그래요? 우리 사이에.”
-어휴, 알아서 해요.
“허락한 거죠?”
-네. 더 자야 되니까 끊어요.
“잘 자요. 좋은 꿈 꾸-.”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나희는 전화를 끊었다.
은근히 츤데레라니까.
휴대폰을 넣으며 사무실을 향해 돌아서자.
“깜짝이야.”
작가들이 창문으로 우르르 몰려 있었다.
“됐어요?”
“섭외 성공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유나희다 보니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
“예. 나희 씨 집에서 촬영하기로 했어요.”
“대박!”
작가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방송에서 유나희 집 최초 공개하는 거 아니야?”
“그럴 거야. 유나희 워낙 비밀주의잖아.”
“와, 조회 수 폭발할 것 같은데?”
잠깐만.
집을 최초 공개하는 거였어?
이렇게 쉽게 수락해도 되나 미안할 정도.
역시 유나희, 의리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