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109화 (110/601)

109화 박명 (5)

“……아는 사이야?”

어윤중 팀장은 자신이 들은 게 맞냐는 듯 놀란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비행기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과거를 헤집자, 상념들 사이로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면 아까 라운지에 같이 있던 남자도 잭슨 킴 오빠 마자요?

그래.

LA에서 잭슨 킴 사건을 해결하고 몽골 촬영을 위해 경유지 홍콩으로 갈 때 탑승했던 그 비행기.

무려 일등석에 탔는데, 나를 찾아와 ‘블라인드 미션’을 잘 보고 있다고 했었지.

지금으로부터 1년도 더 된 만큼, 그때 보았던 모습보다 성장하긴 했지만, 확실히 그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엘리샤였나?”

아니,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것 같은데.

구면에다가 너무 어려 보여서 그런지 영 입에 안 붙는다.

“엘리샤 맞죠?”

“네, 맞아여!”

그녀는 땡그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사마르 빈 엘리샤예여.”

“허허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아는 건데?”

영문을 모르는 어윤중 팀장이 내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지만, 어찌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나중에 말씀해 드릴게요.”

엘리샤는 자리에 앉더니 코를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일찍 와야 되는데 죄송해여. 소울코어 팬 사인회에 갔는데 행사가 비 때문에 지연돼서 엄청 늦어져써여.”

기억난다.

그때도 잭슨 킴 팬이었지.

이동열 CP는 연신 이 상황이 적응이 안 되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엘리샤에게 물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저 15살이여.”

엘리샤는 당돌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 달에 새해가 되면 한국 나이로는 17살이여.”

그녀는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놀라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이치고 키가 조금 작긴 한데, 저희 가문이 늦게 크는 체질이거든여.”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괜차나여.”

예상했던 것보다 나이도 더 많다.

그나마 다행이다.

초등학생이 투자를 하는 거라면 변덕을 걱정해야 할 테지만, 적어도 저 정도 나이라면.

게다가 이 대리인이라는 사람까지 붙어 있으니 계약 이행에 관한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터.

무엇보다 직접 진행하는 게 아니라, JM컬처를 통해서 진행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JM컬처의 팀장은 우리가 걱정할 거라 생각했는지, 조심스레 설명을 덧붙였다.

엘리샤는 모로코에서 유명한 재벌집의 막내딸이며 K-Pop에 관심이 많아서 팬으로 시작해 직접 투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

놀라운 게 있다면, ‘블라인드 미션’을 통해 K-Pop과 한국 예능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잭슨 킴을 알게 되어, 그의 소속 그룹인 소울코어의 팬이 된 것.

즉, 나로 인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프로그램이 폐지되며 잭슨 킴 자체를 알지 못했을 테니까.

이것 또한 일종의 나비효과.

머릿속에 하나둘씩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내가 전생에 모로코 자본이 들어왔던 걸 몰랐던 게 아니라, 실제로 없었던 것이다.

JM컬처가 해외 자본의 투자를 받는 것도, 눈앞의 이 엘리샤라는 꼬마 아이가 회사의 지분을 차지하는 일 또한 없었을 테고.

그러니 이번 생에 처음으로 알게 된 게 정상적인 일이라는 사실.

국내도 아니고, 해외다.

그것도 무려 지구 반대편에 가까운 모로코.

이거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끼치는 영향이 훨씬 더 지대한 것 같은걸.

조금 더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엘리샤는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한 번 뵈었던 적이 있으니 직접 만나서 인사하고 싶었어여.”

“기억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신작도 기대할게여. PD님 프로그램 너무 재미써여.”

“고마워요.”

“아, 참. 그리고 이번에…….”

불편하던 분위기는 엘리샤로 인해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대화 주제 자체가 계약에서 프로그램의 내용으로 넘어간 것도 큰 이유였고.

워낙 상황이 독특했으니까.

자연스럽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던 도중,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스타일보의 최주호 기자.

자리가 자리인지라, 나는 거절을 누르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이잉.

이번엔 이수정 PD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또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걸려 오는 전화.

엘리샤와 JM컬처 직원들은 친절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화 받으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급한 것 같네요.”

나는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들었다.

“어, 무슨 일이야?”

-선배님. 지금 어디세요?

약간은 다급한 목소리.

“계약 건 때문에 JM컬처 사람들 만나고 있어. 아까 말했던 그 사람들.”

-아, 그렇구나. 그러면 혹시 기사 못 보셨어요?

“기사?”

-네. 방금 기사 떴거든요. 아무래도 확인하셔야 될 것 같아서요.

왠지 모를 불안한 직감이 들었다.

“누구 기사인데? ‘나의 일상 다이어리’ 출연진이야? 아니면 차기 프로그램 후보? 무슨 사고라도 터진 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기사예요.

“……뭐?”

-선배님에 대한 기사가 났어요. 지금 바로 링크 보내 드릴 테니까 확인해 보세요.

갑자기 내 기사라니.

무슨 상황인지 아직 파악이 되지 않는다.

나는 곧장 그녀가 보내 준 페이지에 들어가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단독!] 영화배우 임은혜, 핑크빛 열애 중? 데이트 현장 포착!>

-최근 박희준 감독의 영화 ‘백야’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열연을 펼치고 있는 영화배우 임은혜가 열애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지난 13일, 임은혜는 한 남자와 집 근처에서 소탈하게 공원 데이트를 즐기는 등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열애 상대는 모 제작사에서 프리랜서 PD로 근무하는 K모 PD.

-사진

-해당 PD는 MBS와 큐튜브에서 높은 화제성을 기록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최근 스타 PD로 이름을 알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임은혜가 소속된 HS엔터테인먼트에 본 기자가 직접 해당 사실에 대한 문의를 하였으나, 소속사에서는 적극적으로 열애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라클일보 홍라희 기자

사진은 다름 아닌, 홍대 놀이터에서 나란히 앉아 버스킹을 보고 있는 임은혜와 내 모습이었다.

물론, 내 얼굴은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사진 속 주인공이 나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

어이가 없는 것은 기사에 첨부된 사진이 기자가 직접 찍은 게 아니라, 버스킹 가수가 노래하는 영상의 구석에 잡힌 우리 모습을 캡처한 것이라는 사실.

내 이름도 그저 K모 PD라고 적혔을 뿐이지, MBS와 큐튜브에서 최근 이름을 알렸다고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방송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사 내용만 봐도 나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터.

대놓고 쓴 것이나 다름없다.

그 증거로 댓글에서도 이미 강준수 PD라는 의혹이 나오고 있는 상태.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워낙 악플의 대명사로 알려진 임은혜라서였을까.

댓글창은 더욱 심각하게 그녀를 욕하고 있었다.

-어휴, X발. 얘는 또 연애하니?

-걸레년.

-어떻게 얘는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냐?

-└열애설이 어떻게 사고임?

-└임은혜가 하면 사고임.

-헐, 저거 강준수 PD 아님? MBS랑 큐튜브면 빼박인데.

-거기다가 K모 PD면 백퍼센트 강준수지ㅋㅋㅋ

-아니, 강준수 PD한테는 언제 꼬리쳤대?

-역시 임은혜! 연말에도 역시 기사가 나는구나.

-진짜 얘는 셀럽이면 일단 추파 던지고 보나 보네.

-더럽다, 더러워.

-대체 뭐가 예쁘다고 남자들은 얘랑 만나냐?

-└잘 대주니까ㅋㅋ

-암! 욕은 먹어도 연애는 해야지~~

-얘는 진짜 싸 보임.

-신인 때 뜨려고 이용당한 우리 하인성 오빠가 불쌍하다ㅠ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좀 죽으세요.

엄청난 수위의 악플들.

순식간에 머리가 어질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과거에는 뜬 적이 없는 기사다.

실제로 썸을 타고 사귀기 직전까지 갔음에도 전혀 보도될 낌새도 없었던 기사가 갑자기 터져 버리다니.

오늘 그녀와 주고받은 문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 그래도 오늘 오전부터 상태가 안 좋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임은혜가 기사까지 본다면…….

순식간에 10년 전의 그 기억이 머릿속을 잠식하려 했다.

손끝이 떨려 왔다.

지금 당장 가야 한다.

임은혜를 직접 만나서 그녀를 막아야 한다.

뒤늦게 따라 나온 어윤중 팀장이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강 PD, 왜 그래?”

“……팀장님.”

그는 걱정스레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괜찮아?”

“죄송합니다. 지금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갑자기? 지금 안에…….”

그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지만,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무리 좀 부탁드릴게요.”

나는 그 말을 남기고 가게 밖으로 달음박질쳤다.

“강 PD! 준수야! 강준수!”

뒤에서 어윤중 팀장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쏴아아아.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택시!”

그러나 호우 때문일까.

늘 보이던 빈 차는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택시!”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택시는 예약이라는 빨간 불빛을 빛내며 지나칠 뿐이었다.

우산도 없이 나온 터라, 어느새 겨울비가 머리칼을 흠뻑 적시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오로지 임은혜에게 가야한다는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저 건너편에서 빈 차 표시등을 켠 택시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빗길을 가르며 다가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차도로 뛰어들어 가드레일을 넘어 택시를 붙잡았다.

끼이익!

급하게 멈춰 선 택시에 탑승하자, 기사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이, 총각. 그러다 사고 나!”

“죄송합니다. 합정으로 가 주세요.”

“합정이면 반대편에서 타야 되는데. 내가 요 앞에 횡단보도에 내려 줄 테니까-.”

“제발요. 돌려서라도 가 주세요. 더블, 아니 더더블로 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간절하게 빌 듯이 애원했다.

룸미러로 흘긋 나를 확인한 기사는 말없이 요금기 버튼을 눌렀다.

와이퍼가 빗물을 갈랐고, 차는 합정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움직여 임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들려온 건.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에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메시지를 남기길 원하시면…….

젠장.

주먹으로 무릎을 콱 내리치고는 다시금 전화를 걸었다.

한 통, 두 통, 세 통…….

택시에서 내내 전화를 걸었으나, 임은혜는 연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망할.

하필 이럴 때 기사가 터지다니.

손끝을 넘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조금 더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버스킹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나?

머릿속에 자괴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내가 진즉에 그녀에게 가 있어야 했는데.

좋은 조건의 계약이라고 너무 욕심을 부렸다.

오늘은 피했어야 했는데.

젠장.

젠장.

젠장!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휴대폰 너머에서는 계속해서 부재중이라는 기계음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합정에 도착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얼마든지 전생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다.

그 나비효과들을 보고 미리 직감했어야 했다.

나는 휴대폰을 보며 속으로 빌었다.

제발 좀 받아라.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그러나 돌아온 건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

한 번만 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녀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 댔다.

받지 않는 통화를 얼마쯤 걸었을까.

열여섯 번째 발신을 할 무렵.

지잉지잉.

그녀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보낸 이: 임은혜

-민폐 끼쳐서 미안해요. 내가 책임질게요.

심장이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