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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사는 프로듀서-110화 (111/601)

110화 박명 (6)

머릿속에 온갖 불길한 생각이 피어올랐고 불안한 심정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걸까.

전생에 겪었던 참사를 알고도 이번 생에 또 겪어야만 하나.

나는 이번에도 막지 못하는 건가.

자그마한 흐름은 바꾸더라도, 커다란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걸까.

왜 이러한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지.

아픈 추억이라고 외면하지 말고 처음부터 임은혜와 가까워져야 했는데.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았을까.

난 왜 이리도 이기적일까.

내 능력을 너무 과신했다.

회귀하고 늘 성공했기에, 이번에도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너무 안일했다.

지켜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만큼은 임은혜를 곁에서 지켰어야 했는데.

최근 한 달 동안 그녀를 만났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임은혜가 슬픈 감정을 숨기고 웃는다는 걸 알았고.

악플에 상처받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두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다.

그렇기에 차마 위로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감정을 알고 있다는 걸 말하면, 임은혜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해야만 했다.

악플이란 가시에 갈기갈기 찢겨 버린 그녀의 손을 잡아 주어야 했다.

단순히 옆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지끈-.

편두통이 더 심하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차마 더 이상 전화를 걸 자신이 사라졌다.

아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어졌다.

쏴아아아-.

하늘에선 하염없이 겨울비가 떨어졌다.

가슴팍에선 온갖 후회와 미련 그리고 자괴감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와이퍼로 지워내도 가슴에 사무친 감정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난 왜 이렇게 무기력한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빠앙-!

갑자기 들려온 경적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아니다.

막을 수 있다.

막아야만 한다.

살릴 수 있다.

살려야만 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받는 이: 임은혜

-전화 좀 받아 봐요.

-받는 이: 임은혜

-은혜 씨가 책임지지 않아도 돼요. 그럴 필요 없으니까 이상한 생각 말아요.

-받는 이: 임은혜

-탓하려고 전화한 거 아니니까 일단 전화 좀 받아 주세요.

-받는 이: 임은혜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받기만 해요.

-받는 이: 임은혜

-집으로 갈게요. 합정 로즈힐 맞죠?

-받는 이: 임은혜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받는 이: 임은혜

-거의 다 왔으니까 가면 문 좀 열어 줄래요?

-받는 이: 임은혜

-진짜 걱정돼서 그러니까 전화 한 통만 받아 줘요. 부탁할게요.

연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지만, 임은혜는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쉬지 않고 대답 없는 문을 한참이나 두드렸다.

계속되는 무응답에 속은 점점 더 타들어가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있는 합정까지는 가까워지지 않고 있었다.

도로 위에서 마치 멈춘 듯한 느낌.

내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자, 택시 기사는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거 사고 난 것 같은데?”

“예?”

“원래 양화대교가 빗길에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거든.”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실제로 차는 꿈쩍도 못 하고 있는 상태.

“여기가 길이 안 좋아서 차 빠지려면 한참 걸릴 텐데. 총각, 아무래도 좀 늦을 것 같아.”

고개를 내밀어 도로를 확인했지만,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시간은 9시 30분을 넘기고 있는 상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기사님, 저 내릴게요.”

“여기서?”

그는 혼비백산하며 나를 만류했다.

“큰일 나. 여기 전부 자동차야.”

“저쪽에 도보 있어요.”

“안 돼. 게다가 비까지 이렇게 내리면 정말 사고가…….”

“내린다고요!”

나도 모르게 욱하고 소리쳤다.

“빨리 문 열어 주세요.”

나는 지갑에 있는 모든 지폐를 다 털어서 기사에게 건네고 내리자마자 합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비는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빗길에 발이 미끄러졌지만, 멈추지 않고 달리며 임은혜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뛰었지만, 대교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비로 흠뻑 젖었지만,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빗속을 달리고 또 달리기를 얼마 쯤 지났을까.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임은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아 침착되어 있는 목소리.

-왜 자꾸 전화를 걸-.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약 버려!”

휴대폰 너머의 임은혜의 호흡이 일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약 버리라고!”

숨이 가빠 왔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소리쳤다.

“왜 전화를 안 받아!”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임은혜는 한참이나 말을 고른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해결할게요. 내일이면 정리될 거야. 그러니까 더 전화하지 않아도 돼요.

심장이 철렁였다.

“누가 해결해 달라고 했어요? 왜 은혜 씨가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냐고요!”

-제가 선택한 거예요. 안 그래도 정말 힘들었는데…… 이젠 내가 못 버티겠어.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억울함이나 슬픔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떠한 감정조차 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

-쉬고 싶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열심히 살아 보려 했는데. 살고 싶어서 진짜 노력했는데……. 너무 힘들어. 내가 이 세상에 없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그 따위 개소리하지 말라고!”

이성을 잡을 수가 없었다.

“살고 싶다며. 그러면 X발, 빌어먹을 악플러한테 지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그녀는 생각을 굳힌 듯 목석같은 목소리를 냈다.

-너무 지쳤어.

“그러면 활동을 쉬면 되지, 죽긴 왜 죽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악플러들은 끝까지 괴롭힐 테니까. 내가 없어지면 그놈들은 죄의식이라도 느낄 테니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그녀가 받은 상처가 전해져서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오히려 악플러들은 웃을걸. 그렇게 싫어하던 당신이 죽었으니까. 당신을 그렇게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어요?

-…….

“은혜 씨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놈들이 멈출 것 같아? 아니, 절대 아니야. 자기를 처벌할 사람이 없어졌다고 더 날뛸걸?”

-그러면 어떡해요. 난 더 버틸 힘이 없다고요.

임은혜는 흐느낌을 꾹 참으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너무 아파.

손이 떨려서 휴대폰을 놓칠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버텨. 이 악물고 버티라고. 그러다 이가 다 갈려 나가면 주먹 꽉 쥐고 버텨.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꽉 쥐고 그냥 버티라고.”

연신 자동차 경적이 울려 댔다.

“당신만 힘들어? 당신만 힘드냐고! 이 X같은 세상, 아무리 험난하고 고난스러워도 다들 욕 한 마디 뱉고 술 한 잔에 털어 버리고 버티잖아.”

도로 위의 헤드라이트가 쉴 새 없이 반짝였다.

“왜 부정적인 것만 봐. 네 SNS에 매번 응원하며 선물해 주고 너를 대신해서 악플러들과 싸워 주는 팬들을 보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답게 그들에게 은혜라도 갚아.”

거리의 가로등이 점멸했다.

“네가 그렇게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데. 널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족들은, 매니저는. 그 많은 팬들은 어떡하라고!”

발걸음을 멈췄다.

눈앞에는 어느새 임은혜가 사는 아파트가 우뚝 솟은 채 서 있었다.

그녀가 사는 층은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고 어둠에 휩싸여 있는 상태.

넓은 집에서 홀로 외로이 구석에 앉아 무릎을 감싼 채 절망에 빠져 있는 임은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아…….”

나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힘들면 그냥 울어요. 눈치 보지 말고 그냥 울어 버리라고.”

하늘을 가득 채우던 비는 콘크리트 벽에 막혀 더 이상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샘에 눈물이 다 닳도록. 흐느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냥 펑펑 울어. 힘들면 티내고 아파해요. 힘든 게 당연한 거야.”

다시금 손이 떨려 왔다.

“그래도 버티기 힘들 때는…… 그냥 도망가. 다 놓아 버리고 저 멀리 도망가. 왜 남들이 던지는 돌을 다 맞으면서 견디려고 그래.”

더 이상 임은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삶이 매번 행복해. 그러니까 아프고 지칠 때는 농땡이도 피우고 응석도 부리라고요.”

그러나 그녀가 듣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인기 있으니까 감당하라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다 X까라 그래. 힘든 건 힘든 거고, 아픈 건 아픈 거야. 왜 그걸 감당해야 되는데. 왜 청춘이라고 아파야 되는데. 내가 아프다잖아. 내가 힘들다잖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신은 행복할 권리가 있어. 그 누구도 그걸 막을 수 없다고. 설령 그게 당신 본인일지라도 말이야.”

목이 메어 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살아남으라고. 남들처럼 이 빌어먹을 세상 탓하면서, 욕하면서. 억척같이 살아남으라고.”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정적이 흐른 끝에야 임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저 조금 쉬어야 될 것 같아요.

뚝.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이런 빌어먹을.”

쾅!

주먹으로 벽면을 내리쳤다.

손이 욱신거려 왔지만,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곧장 빗물이 뚝뚝 흐르는 옷을 욱여 잡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그녀가 사는 15층으로 올라갔다.

1502호.

과거에도 온 기억이 있다.

그녀를 바래다주기 위해 문 앞까지 왔었으니까.

이번 생에선 어떻게 주소를 알고 왔냐고 물어보면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초인종을 눌렀다.

역시나 응답은 없었다.

다시금 벨을 눌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불이 꺼져 있어도 임은혜가 집 안에 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흔한 인기척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

문을 두드렸음에도 반응이 오지 않았다.

서서히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에이, 아닐 거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 든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임은혜! 문 열어!”

쾅쾅!

세게 두드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 순간.

“PD님?”

엘리베이터에서 헐레벌떡 내린 누군가가 익숙한 목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강준수 PD님 맞으시죠?”

다름 아닌 임은혜의 매니저, 김 실장.

그는 긴가민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강 PD님 맞으시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계세요? 아니, 그것보다 왜 그런 꼴이 되셔서…….”

그의 안일한 태도에 버럭 화가 솟구쳤다.

“그런 거 물어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안에서 임은혜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흥분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일단 문부터 열어요!”

“아, 네. 네!”

김 실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어락을 눌렀다.

임은혜의 성격상, 매니저의 전화도 받지 않았을 터.

안 그래도 우울한데 스캔들까지 터졌으니 그도 걱정이 되어서 온 것일 테니까.

다행히 매니저답게 김 실장은 임은혜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의 입력 직후, 도어락이 열렸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허어어…….”

김 실장은 당황한 낯빛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약.

바닥엔 수면제가 쏟아진 채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온갖 불길한 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X발.”

아닐 거야.

아닐 거라 생각하며 다급하게 쏟아진 약이 이어져 있는 침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임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자리에서 선 채로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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