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113화 (114/601)

113화 알고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1)

“좋은 아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D님.”

“강 작가님도요.”

2022년, 검은 호랑이를 상징하는 임인년의 해가 밝았다.

오늘은 새해의 첫 출근 날.

이사를 해서 굉장히 넓어진 사무실이었지만, 신입들이 들어온 덕분에 훨씬 더 북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작가들은 12명, 나를 포함해 PD만 8명.

강준수 사단 인원만 도합 20명이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사무실을 6층으로 옮긴 덕분에 좋은 점이 있다면, 사무실이 넓어진 건 둘째 치고 내 개인 공간이 생겼다는 것 정도?

물론, 전체 사무실의 한 쪽에 블라인드 유리를 통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독립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자율성을 가져다주는 것이니까.

“오셨어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PD님.”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나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며 개인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또 좁지도 않은 게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확실히 CN엔터로 합병이 되면서 스케일이 커져서 좋다니까.

일개 외주 제작사, 프로덕션 시절과는 확실히 달라.

모닝커피를 한잔하며 새 사무실에 적응을 끝마칠 무렵.

똑똑.

“선배님.”

이수정 PD가 살짝궁 문을 열며 물었다.

“회의 준비됐습니다.”

“어, 바로 갈게.”

나는 노트 하나를 챙기고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엄청 북적이네.”

“수가 수다 보니까요.”

20명이 한 회의실에 들어서니 적을 수가 없지.

나는 상석에 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신규 프로그램 제작에 착수할 차례입니다. 신입 분들도 ‘원더우먼이 간다!’ 콘셉트는 다 확인하셨죠?”

“예.”

“그러면 간단히 이야기하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원더우먼이 간다!’

신작 프로그램의 이름이자 강준수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두 번째 정규 예능.

이건 전생에 내가 만들어 본 프로그램이 아니라, 회귀 후에 떠올린 아이디어다.

막내 PD나 서브 PD로 있을 때는 보지 못했지만, 메인 자리에 올라오니 서서히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임신을 하며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는 김연희 작가를 보며 더욱 프로그램에 대한 확신도 들었다.

내가 커다란 소재를 잡고, 작가들이 세부사항을 짜서 지금은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는 상태.

프로그램의 포맷을 크게 말하자면, 일종의 ‘회춘 예능.’

현재의 예능판을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육아 예능이 유행하며 판을 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어린 아기들은 한글을 떼기도 전에 팬덤이 생기고 SNS 스타가 될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분석가들은 이걸 일종의 사람의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했다.

육아 예능이 유행하기 전, 가장 성행했던 예능은 다름 아닌 짝짓기 프로그램과 가상 결혼 프로그램들.

사람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뒤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을 그렸다는 것이지.

거기서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회춘 예능’을 기획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노인들의 삶을 그리겠다는 뜻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 들어와 과거에 비해 여권이 신장되며 남녀의 지위가 점점 더 평등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결혼과 육아로 인해 여성들이 경력이 단절되는 비율은 극심히 높은 편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인식 자체가 육아에 대한 책임을 남성보다 여성에게 있다고 보는 게 가장 큰 이유.

그렇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갔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방송판만 보더라도, 시즌제가 아니면 여성 PD들은 육아 휴직 후 복귀를 하려고 하면, 본인의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채워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그러나 아이를 낳은 뒤에도 여전히 업무에 복귀하고 다시금 경력을 이어가고 싶은 여성들이 많다는 건 주변을 돌아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 ‘원더우먼이 간다!’는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다시금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그리고 많은 토론과 토의 끝에 우리는 아이를 낳고 잠정 은퇴를 한 스타들 중 다시 사회를 나아가고 싶은 여자 연예인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제작을 결정했다.

아이의 육아는 남편이 맡을 수 있으면 맡기되, 그렇지 못한다면 출연진이 든든한 워킹맘으로 사회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제작진 측에서 보모를 포함한 기본적인 양육에 대한 지원을 해 주기로 한 것이지.

우리의 제작비가 워낙 넉넉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촬영 대상은 연예계로 복귀하는 인물들은 아닙니다.”

배우에서 다시 배우로, 가수에서 다시 가수로 컴백하는 건 우리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그들은 본인이 원하고 노력한다면, 자신의 소속사를 통해 충분히 조율 후 얼마든지 복귀를 할 수 있으니까.

“제2의 전성기가 아니라, 인생 제2막을 살고 싶은 분들을 지원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배우로 활동했던 연예인이 심리치료사나 요리사 등 새로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물론, 해당하는 인물들이 많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연예인들은 워낙 얼굴이 잘 알려져서 새로운 직업을 갖고 전향하는 게 쉬운 결정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출연진을 선발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저 내가 아는 전생의 기억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컴백 프로젝트’ 때는 오롯이 내가 출연진을 고르고 선발했지만, 그렇게 한 만큼 내가 아는 기억으로 한정되어 시야가 좁아질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기에 이번엔 작가들과 함께 많은 조사를 하고 수소문을 하며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는 여자 연예인들의 후보를 골랐고.

그 결과.

“첫 번째 출연자는 한지수 씨입니다.”

한지수.

2007년 유명 패션 잡지의 표지 모델로 데뷔를 하며 하이틴 스타로 이름을 알렸고, 2009년에 한국식 좀비 영화로 천만 관객을 기록하며 ‘한지수 = 망해도 중박’이라는 새로운 흥행 공식을 쓰며 이름을 날린 인물.

드라마와 영화에서 모두 흥행하며 연기력을 증명하고 인기까지 끈 화제의 스타.

전지헌, 송해교, 김태휘와 더불어 대한민국 4대 여신으로 불렸으니 미모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유명 샴푸 광고와 화장품 광고, 의류와 아파트 광고까지 섭렵하며 CF 스타로 대한민국 남심을 사로잡은 인물.

그러나 2015년,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돌연 일반인 신랑과의 결혼을 발표하며 동시에 은퇴를 선언해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을 자아냈던 배우다.

“한지수 씨요?”

미리 알고 있는 기존 강준수 사단 멤버들과 달리, 출연진에 대해 처음 들은 신입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박.”

“어마어마하네요.”

“그러니까 한지수 씨가 배우가 아니라, 다른 직업으로 제2의 삶을 산다는 거죠?”

“예, 맞습니다.”

“그러면 한지수 씨가 하고 싶은 직업은 어떤 건가요?”

“패션 디자이너라고 하시더라고요.”

패션 잡지 모델로 데뷔를 한 만큼, 그녀가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니나 다를까, 신입들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졌다.

“뭔가 잘 어울려.”

“딱 연상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느낌이 딱 오는데?”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주에 미팅 잡혀 있으니 자세한 건 인터뷰에서 들어보기로 하죠.”

* * *

“조금 늦으시네.”

현재 시각은 11시 10분.

막내 PD 하나가 조심스레 휴대폰을 들며 물었다.

“전화 한번 해 볼까요?”

“아니야, 괜찮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약속 시각인 11시보다 약간 지나긴 했지만, 오래 늦을 것 같으면 연락이 왔을 테니까.

연예계에선 은퇴를 한 탓에 매니저 없이 직접 운전해서 다니는 터라, 교통 체증이 걸릴 수도 있고.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지수가 들어왔다.

“어, 오셨네요.”

한지수는 들어오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자꾸 울어서 겨우 재우고 나오느라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네.”

그녀는 작가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으며 가볍게 숨을 고르고는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았다.

“지난 미팅 이후에 간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한 3주 됐나?”

급하게 온 티가 나는데도 목소리와 태도에서 은근히 기품이 느껴진다.

우아하고 단아하면서 또 고고한 느낌까지.

역시 한지수다.

‘분위기 깡패’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

두 아들의 엄마임에도, 지금 모습만 보면 웬만한 현역 아이돌들과 견주어도 압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한 스태프들도 다들 똑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내가 입을 열었다.

“아이는 잘 재우셨나요?”

“네. 지금은 시어머님이 봐주시고 계세요.”

“다행이네요. 앞으로는 사회에서 완전히 자리 잡으시기 전까지 저희 쪽에서 베이비시터 등 양육에 필요한 지원을 아낌없이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한지수는 흘긋 스태프석을 보더니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히 인터뷰고, 원하지 않는 부분은 전부 쳐낼 테니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마음은 편안하네요.”

연예계를 은퇴하고 일반인으로 지내는 만큼, 부담스럽지 않도록 촬영 장소를 방송국이 아니라, 카페로 정했다.

물론, 통째로 빌려서 일반인은 없는 상태고.

“바로 시작할까요?”

“예, 그러시죠.”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질문지를 꺼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은퇴하면 굉장히 여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아니더라고요. 연예인으로서 살다가 일반인으로 돌아갔더니 걱정했던 것보다는…….”

간단하게 근황 토크를 마치고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갔다.

“패션 디자이너로 꿈을 꾸고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쪽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지 궁금하네요.”

“이거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패션 쪽에 관심이 있었잖아요. 실제로 대학교도 그쪽 전공으로 진학을 했고.”

사전 조사를 하기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

당시에 모델과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연극영화과가 아니라, 의류학과로 진학을 해서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으니까.

그것도 무려 왕십리에 있는 명문대학교에 정시로 합격을 해서 더 화제가 되었던 바가 있고.

“물론, 학업과 연기를 병행하다 보니 얼마 다니지 못하고 휴학을 했죠. 그래서 디자이너와 관련된 생각은 잊고 지냈어요.”

그래서 보통의 연예인들이 연극영화과로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극영화과라면 어떻게든 졸업은 가능하게 해주니까.

“그 이후에 제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극심한 산후우울증에 걸렸었거든요. 대부분 오래지 않아 극복한다는데 저는 은퇴를 해서 그런지, 다시 연예인으로 복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후유증이 엄청 오래가더라고요. 그러던 도중 남편이 제게 다른 분야에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어요.”

“그러다 생각하신 게 패션 디자인이었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학해서 학교에 다니기엔 워낙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평범하게 다니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인터넷으로 공부도 해 보고, 개인 강습도 알아봤지만, 이게 그 정도로는 갈증이 해소가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복학을 결정하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학교에 처음 다닐 때는 어색하고 주변에서도 신기하게 봤는데 은퇴한 지 꽤 지났다 보니 다른 학생들도 금방 적응하더라고요.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얼마 전에는 무사히 졸업까지 했습니다.”

사전 조사할 때 기사로 난 걸 봤다.

한지수는 여타 연예인들처럼 꼼수가 아니라, 직접 학교에 다니며 과제를 하며 시험을 보고 학점을 따서 정직하게 졸업했다.

“그렇게 제가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하다 보니, 하나의 꿈이 생겼거든요.”

“어떤 꿈인가요?”

“제 첫째 아들이 이제 6살, 둘째 아들이 23개월이거든요.”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두 아들이 입을 옷을 직접 디자인하고 싶더라고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 코디를 제가 해 주고 싶어졌어요.”

“한지수 씨가 제작한 옷으로 말이죠.”

“네. 제가 직접 만든 브랜드의 옷으로요.”

“아드님들이 참 좋아하겠어요.”

“그래서 반드시 성공하고 싶어요.”

한지수의 눈에서는 모성애와 동시에 꿈에 대한 열정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더 좋았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목적 의식 때문에 그림 자체가 너무나도 좋았다.

은퇴한 톱스타 여배우가 두 아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주기 위해 패션 디자이너로 도전을 한다라…….

프로그램의 방향성을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에도 충분하고, 무엇보다 모성애가 여실히 드러나는 게 더욱더 인간미 넘쳐서 좋다.

이제 막 인터뷰를 시작했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흥행 예감이 들기 시작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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