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118화 (119/601)

118화 아버지는 여전히 청춘이다 (2)

일순 왁자지껄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했다.

작가들과 PD들은 두 손까지 모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

“후우.”

나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 휴대폰을 들었다.

잘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기대보다 낮을 때가 문제다.

이미 신입 PD들과 새로운 작가까지 왕창 뽑아 놓고 제작비까지 어마어마하게 받으며 크게 판을 벌여 놨다.

본 편성이 확정된 뒤에는 JM컬처뿐만 아니라, 각종 광고사에서 TV 광고와 PPL에 대한 문의가 줄을 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좋은 조건의 광고만 선택했는데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제작비는 웬만한 대하드라마에 못지않을 정도.

그러니 더욱 긴장이 될 수밖에.

이 시청률표에 앞으로의 향방이 달려 있으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안도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괜찮아요?”

“잘 나왔어요?”

작가들이 궁금하다는 듯 목을 쭉 빼고 물었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3.2%네요.”

“아, 잘 나왔네.”

“괜찮은데요?”

목표했던 15%를 달성한 건 아니기에 박수를 치거나 환호할 만한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우리가 정한 최소 수치인 12%는 넉넉히 돌파한 시청률.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충분히 선방했다고 볼 수 있었다.

“선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수정 PD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제 시작이지.”

“인터넷 반응도 괜찮고 실시간으로 뜨고 있는 기사도 좋아요. 도입부 흥미를 잘 끌었다는 의견이 많아요.”

따로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기사는 줄지어 올라오고 있는 상태.

<한지수의 복귀? 아니, 인생 제2막!>

<화제 속에 시작한 ‘원더우먼이 간다!’ 후기, 역시나 강준수 PD는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패션 디자이너로 새로운 도전, 과연 어떻게 그려낼까?>

<한 번 보면 멈출 수 없는 도입부. 한 줄 요약, Fascinating!>

<강준수 PD의 신작,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까?>

<토요 예능 선두 주자 KTS ‘오늘도 웃음폭탄’의 강력한 적수의 등장! 토요 예능 삼파전 시작…… 과연 그 승자는?>

“다들 기대가 커요.”

나는 잔을 들어 그녀의 잔과 경쾌하게 부딪쳤다.

“잘해 보자고.”

* * *

“준비되셨나요?”

“잠시만요.”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긴장한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떨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안하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그의 옆에 있던 딸이 조심스레 팔을 잡으며 물었다.

“아빠, 커피 한 잔 가져다줄까?”

“어, 좋지.”

이야기를 들은 막내 작가가 곧장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가져다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눈앞에 있는 부녀는 인생샷 챌린지, ‘아버지는 여전히 청춘이다’의 첫 출연진.

큐튜브를 통해 낸 홍보 영상을 보고 함께 앉아 있는 딸이 신청했고 작가들이 여러 가지 검토를 한 후에 첫 번째 대상으로 선발했다.

오늘 그는 메이크 오버를 통해 청춘 시절로 돌아가는 변신을 할 예정이다.

패션은 한지수가 담당할 테고, 그의 인생샷을 찍기 위해 헤어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리고 사진사까지 따로 섭외해 둔 상태.

그는 작가에게 받은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평상시대로 입고 와 달라고 해서 조금 후줄근하네요.”

그는 머쓱하게 옷을 살피며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확 변신하실 거니, 오히려 좋죠.”

나는 한 발자국 물러나며 카메라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면 시작해 볼까요?”

“예.”

“박 PD, 슬레이트 부탁해.”

“네!”

신입 PD는 호다닥 카메라 앞으로 다가가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슬레이트를 쳤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지수는 배우의 포스를 내듯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네, 안녕하세요.”

“시청자분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예.”

남자는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광탄면에 살고 있는 임종주라고 합니다.”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69년생 닭띠, 올해 54살이고요. 악기 공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오, 악기요?”

그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지수는 부드럽게 멘트를 이끌었다.

“어…… 기타 제작부서의 부장입니다. 기타 등등이 아니라, 악기 기타요.”

몇 마디를 하다 보니 살짝이나마 긴장이 풀린 모양.

한지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부장님이시네요.”

옆에 앉아 있던 딸, 임봉희가 못 말린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집에서 늘 이러세요.”

“다른 사람들은 늘 웃던데?”

“직원들이요?”

“응.”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직원분들. 늘 고생이 많으세요.”

일반인임에도 불구하고 부녀가 예능감이 나쁘지 않다.

느낌이 좋은데.

한지수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평소에…….”

* * *

“고생하셨습니다. 메이크 오버 전에 각각 인터뷰 한 번씩만 짧게 딸게요.”

“예.”

첫 번째는 아버지의 인터뷰.

그의 패션 디자인을 위한 절차였다.

혹시나 부담스러울까 봐 딸은 따로 작가와 함께 자리를 비운 상태.

한지수는 눈을 빛내며 질문을 시작했다.

“아버님은 평소에 옷은 어떻게 입으세요?”

“어…… 보통은 애기 엄마가 사다 준 옷을 입거나 이런 작업복을 입죠.”

임종주가 입고 있는 옷은 말 그대로 흔히 아버지들이 입는 패션과 다를 바 없었다.

동그란 무테안경과 꽤 낡아 보이는 운동화.

각은 찾아볼 수 없는 헐렁한 바지에 휴게소에서 구매한 걸로 보이는 익숙한 문양의 벨트.

가슴팍에 회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품이 큰 근무복.

근무복의 살짝 열린 지퍼 사이로 보이는 셔츠는 추레하게 처져 있었다.

“쇼핑은 따로 안 하시는 거고요?”

“보통은 그렇죠.”

“그러면 좋아하시는 취향이나 색상은 있으신가요?”

“너무 화사한 색은 별로인 것 같아요.”

“분홍이나 노란색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그런 건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러면 화이트나 밝은 베이지 같은 색은 어떠세요?”

“그건 괜찮을 것 같아요. 깔끔하니까.”

“예. 그러면 액세서리 같은 경우는…….”

인터뷰를 보다 보니, 왠지 모르게 자꾸만 나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에 근무복만 입고 다니시고, 따로 옷을 사기보다는 어머니가 사다 주신 옷만 입으시는 모습.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좋은 징조였다.

방송을 보면 시청자들도 아버지 생각이 날 테니까.

* * *

아버지와의 짧은 인터뷰가 끝난 뒤, 이번에는 딸과의 인터뷰 차례.

한지수는 활짝 웃으며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따님은 나름대로 패션 감각이 있으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오늘 아버지 옷은 따로 준비하신 건 아니죠?”

“네. 작가님이 평소에 입는 대로 입고 오라고 하셔서 진짜 평상시처럼 입으셨어요.”

“어쩌다가 이번 프로그램에 신청하시게 된 거예요?”

“아, 그게…….”

딸은 낮은 한탄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소에는 아버지 옷에 대해 잘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조금 이기적으로 들리실 수도 있는데, 제가 지금 취업 준비 중이거든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월세에 전기세, 식비, 통신비 등등 이것저것 지출을 생각하니까 저 먹고 살기도 바쁘더라고요. 제가 불효녀긴 한데…….”

“아니에요. 다들 그렇죠. 워낙 불경기잖아요.”

임봉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얼른 취업해서 부모님께 근사한 옷 한 벌 맞춰 드리는 게 작은 소망이었거든요. 그런데 자격증 따고, 스펙 준비에 봉사활동까지 이것저것 하다 보니 너무 멀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번 방송을 알게 되어서 신청하게 되었어요.”

“그러셨구나.”

한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어요?”

“저 올해 25살이요.”

“제 사촌동생이랑 동갑이시네. 민주라고 하는데, 그 아이도 지금 취업 준비하느라 엄청 바쁘거든요. 딱 그 동생 보는 느낌이에요.”

그녀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평소에 아버지는 옷 쇼핑을 좋아하시나요?”

“아니요. 가끔씩 옷 한 벌 맞추러 가도 입어보는 게 귀찮다고 사이즈만 보고 구매하시는 스타일이에요.”

“아, 어렵네요.”

“그렇죠?”

“그러면 오늘 봉희 씨의 역할은 하나예요.”

한지수는 임봉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지치시지 않도록 옆에서 응원해 주는 것. 할 수 있으시죠?”

“그 정도야 당연하죠.”

“네, 그러면 한번 가 볼까요?”

* * *

인터뷰가 끝난 직후, 우리는 옷이 구비되어 있는 한지수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들어가자마자, 임종주는 놀라움에 탄성을 터뜨렸다

“허어…….”

그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한지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이걸 다 입어 보나요?”

“아니요. 이거 전부 입어 보려면 3박 4일은 걸릴걸요? 이중에서 아버님께 어울리는 옷으로 제가 골라 드릴 테니 그것만 입어보시면 돼요.”

“아하.”

“그러면 한번 시작해 볼까요?”

한지수는 생각해 놓은 게 있는 듯, 거침없이 위아래 세트로 옷을 한 벌 골라 가져왔다.

“저쪽에 탈의실 들어가셔서 갈아입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그가 카메라 앵글에서 사라진 뒤, 한지수는 다시금 옷을 고르며 임봉희에게 말했다.

“오늘 아버님 스타일은 조금 캐주얼하게 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댄디한 느낌으로.”

“좋을 것 같아요.”

오래지 않아, 임종주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영 옷이 어색한지 어깨를 으쓱이며 거울 앞에 섰다.

“괜찮나요?”

아버지들 특유의 멋진 옷을 입었을 때의 부끄러운 기색.

왠지 모르게 아버지의 점퍼를 사 드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아버지도 딱 저런 모습이셨는데.

임봉희는 손뼉을 치며 임종주에게 다가갔다.

“어, 아빠 좋은데?”

“핏이 아주 좋아요. 아버님이 스타일이 나오시네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조금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이걸로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 * *

“한 번만 더 입어볼게요. 이게 왠지 딱일 것 같아요.”

벌써 3시간째.

오전 9시가 되기 전에 시작한 촬영이었지만, 벌써 정오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힘든데, 계속 옷을 갈아입는 아버님이 얼마나 힘드실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혼자 백화점에서 쇼핑해도 카페에서 두어 번은 쉬어 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

“아빠, 안 힘들어?”

“어, 괜찮아.”

말과 달리 목소리는 조금 지친 상태.

웬만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멈추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계속해서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정말 화려한 변신이 가능할 것만 같은 느낌.

다만, 이제는 조금 쉬어 갈 타이밍이었다.

나는 한지수를 불러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것만 입어보고 점심 먹을까요?”

“네. 그러죠. 근데 이번 옷이 최고일 것 같아요. 더 안 입어봐도 될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때.

벌컥.

탈의실 문이 열리며 새로운 옷으로 환복한 임종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스태프들 사이에선 낮은 감탄이 새어나왔다.

한지수는 드디어 찾았다는 듯 흡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또한, 놀란 건 마찬가지.

임종주는 어색하게 팔을 벌리며 물었다.

“이번엔 괜찮은가요?”

“괜찮은 수준이 아니에요.”

한지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최고예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정도로.”

“아빠, 내가 봐도 그래.”

한지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안경 하나를 집어 건넸다.

“이거 한번 써 보실래요?”

광복 직후에나 쓸 것 같았던 무테안경은 지적이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뿔테 안경으로 바뀌었다.

품이 넉넉해서 늘어졌던 근무복의 기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와인색 티셔츠에 짙은 녹색 블레이저가 자리 잡았고.

통이 너무 커서 바지 속이 공기 반, 다리 반이었던 슬랙스는 마치 맞춤복을 입은 듯 깔끔한 핏으로 떨어져내려 복숭아뼈에서 멈췄다.

그에 더불어 때가 묻었던 운동화는 깔끔하게 광나는 검은색 로퍼로 바뀐 상태.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 세련되고 도회적인 느낌이 풍겨 왔다.

보는 내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질 지경.

이거 진짜 말 그대로 ‘인생샷’을 찍을 수 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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