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119화 (120/601)

119화 아버지는 여전히 청춘이다 (3)

“영 어색한데.”

임종주는 어깨를 움직여 옷매무새를 살폈다.

평소의 입던 스타일과 180도 달리 젊어 보이는 댄디한 스타일이라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

그러나 패션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현재 임종주의 맵시는 조금 속된 표현으로 끝내주는 수준.

“아빠, 지금 완전 멋져.”

“그래?”

“응. 내가 본 아빠 패션 중에 최고야.”

그는 거울을 살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딱 핏이 좋을 수가 있지?”

딸, 임봉희의 물음에 한지수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보통 기성복들은 허리에 따라서 길이가 정해지거든요. 근데 저는 옷의 제작하는 라인 자체에서 허리와 길이를 따로 구분했어요.”

일반적인 옷이 95 사이즈, 100 사이즈 이렇게 구분이 되었다면.

한지수의 브랜드는 95 사이즈에 168cm, 173cm, 178cm.

100 사이즈에 168cm, 173cm, 178cm, 183cm 등.

이런 식으로 세부 분류까지 되어 있었다.

“평범한 시민분들은 길이 줄이러 세탁소 가는 게 엄청 귀찮잖아요? 한두 벌도 아니고 옷마다 줄이다 보면 은근히 지출도 적지 않고요. 그래서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도록 사이즈를 만들어서 핏이 잘 맞을 수밖에 없죠.”

“아, 어쩐지 길이가 딱딱 맞더라고요.”

임봉희는 감탄하며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빠, 이거 엄마 보면 깜짝 놀라겠다.”

“그러면 사진 한번 찍어서 보내 줄까?”

“안 돼. 엄마한테는 이따가 끝나고 직접 보여 줘야지.”

임종주의 아내는 지금 촬영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지, 인생샷을 찍는 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

딸은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 주기 위해 단순히 패션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것 정도로만 알렸다고 했다.

즉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변신하는 건 전혀 모르고 있을 터.

그렇기에 완전히 변신해서 직접 찾아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만 해도 기대된다.

“그러면 옷은 잠깐 벗어 두고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스태프들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반색하며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 * *

“아, 그러면 사내 연애 하다가 결혼하신 거예요?”

“그렇죠. 당시에는 지금 회사가 아니라, 중곡동에서 ‘세광 에이스’라는 회사를 다녔거든요. 마이마이 아시죠?”

“당연하죠.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맞죠?”

“예. 그것의 기판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만드는 전자 회사였는데, 제가 주임이고 애기 엄마가 라인 반장이었거든요. 제가 가끔씩 막걸리 마시고 취해서 늦잠 자고 그러면 애기 엄마가 회사에서 커버 쳐 주고 하다 보니 금방 가까워지더라고요.”

“그러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셨군요.”

“하하하, 그렇죠.”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주인공이 아내와 사랑에 빠졌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오전 내내 촬영하다 보니, 나름대로 긴장이 풀리기도 했고 옷을 골랐다는 후련함에 입이 풀린 모양.

덕분에 편집에 써먹을 만한 분량이 생겨서 좋기도 했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 그 당시에만 느낄 수 있는 연애 감성과 시대 감성을 알 수 있어서 좋았으니까.

아무리 내가 회귀를 하고 동년배들보다 오래 살았다고 한들, 그 시절의 감성은 느낄 수가 없는 법.

게다가 내가 PD라서 그런지,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감수성이 피어나고 창작 의욕과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하고.

“잠깐만요. 그러면 같이 이직하셨으면 지금도 같은 회사에 다니시는 거예요?”

“그렇죠. 업무가 조금 다르긴 한데, 애기 엄마도 같은 회사에 있습니다.”

“이야, 사내 연애만 거의 30년 가까이 하시는 거예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하하하.”

지금 임종주의 아내, 유귀옥은 광탄에 있는 악기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상태.

연차를 낸 임종주와 달리, 그의 아내는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다.

잠시 후, 아내에게 바뀐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도착했을 때는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직원들도 완전히 변신한 임종주의 모습을 보게 될 터.

부하 직원들이 확 바뀐 부장님의 모습을 보고 놀랄 모습을 상상하니 내가 다 짜릿할 정도.

이거 회사 직원들이 퇴근하기 전에 빨리 도착해야겠는데.

“이제 그러면 바로 인생샷 찍을 준비를 한번 해 볼까요?”

“네, 그러죠.”

“그러면 우선은 헤어부터 한번 만져 볼게요. 오 PD, 메이크업 아티스트님이랑 미용사 선생님 준비되셨지?”

“예. 바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아버님, 이쪽으로 오시죠.”

* * *

“……대박.”

완전히 바뀐 아버지의 모습에 딸, 임봉희는 입을 가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 아빠 맞아?”

아무렇게나 반곱슬로 헝클어져 있던 머리는 깔끔하게 투블럭으로 자른 뒤, 포마드로 정리해 근사하게 넘겼고.

약간의 잡티가 보이던 피부는 마치 청춘으로 돌아간 것 마냥 뽀송뽀송하게 구릿빛 피부를 빛내고 있었다.

그에 모자라, ‘댄디’라는 단어를 몸소 보여 주던 종전의 옷차림은 절대 그가 60년대 생에 25살이라는 자녀를 둔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었다.

처음의 옷차림이 푸근한 동네 아저씨의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화려한 중년을 즐기는 멋쟁이 삼촌이 된 느낌이랄까.

그는 영 본인의 모습이 어색한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조명판 앞에 섰다.

오늘 임종주의 인생샷을 찍어 주기 위해 어렵게 섭외한 사진사는 포신 같은 DSLR을 손에 들고 친절하게 촬영을 시작했다.

“포즈 한번 취해 보시겠어요?”

“음…… 어떻게 해야 하죠?”

“편하게, 자연스럽게 하시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팔짱을 껴도 되고, 우수에 빠진 듯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척을 하셔도 되고요.”

나는 한 발 물러나, 조용히 임종주가 인생샷을 찍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딸, 임봉희가 내게 다가왔다.

“PD님.”

“예.”

“신발은 디자이너님이 만드신 거 아니죠?”

“옷만 지수 씨가 디자인했고, 로퍼는 편집숍에서 직접 공수해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신발로 변경할까요?”

“아니요.”

그녀는 다시금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브랜드 론칭되면 지금 입으신 옷 그대로 사 드리고 싶어서요.”

듣고 있던 내가 다 흐뭇해지려고 한다.

“이따가 한지수 씨한테 한번 여쭤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촬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조명 한번 바꿔 볼게요. 이번엔 흑백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게 더 느낌 좋을 것 같거든요.”

그렇게 사진사는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고.

마침내 그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와, 대박.”

“무슨 일 있어요?”

“이거 보세요. 따님이랑 아버님도 직접 한번 보시겠어요?”

왠지 목소리에서 풍겨오는 느낌이 좋은데.

나도 조심스레 한 발자국 다가가 카메라와 연결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허어…….”

“미쳤다.”

“아버님, 장난 아닌데요?”

“이거 진짜 인생샷이에요!”

흔들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한 팔은 팔걸이에 걸친 채 기대어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에 물었던 파이프를 떼어 내고 있는 모습.

여기서 가장 핵심은 그러한 와중에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텅 빈 눈.

중년만이 풍길 수 있는 멋, 그 자체였다.

그저 사진 한 장만 봤는데도 마치 중년의 고뇌가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한 그런 느낌.

지금 이 사진 속에서는.

처음 이 장소에 올 때,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었던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중년의 ‘임종주’.

온전히 그 본인이 되어 있었다.

“괜찮게 나온 건지 모르겠네.”

그는 쑥스러운지 뒷목을 긁었다.

“아버님, 진짜 최고예요.”

“이거 프로필 사진 하시면, 동창회에서 스타 되실걸요?”

“하하, 그러려나?”

사진사는 뿌듯한 얼굴로 사진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더 안 찍어도 될 것 같아요. 아니, 이것보다 더 잘 찍을 자신이 없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올해 찍은 사진 중에 가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뒤늦게 다가온 작가들도 사진을 보고는 그 말에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아니, 100%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 마무리할까요?”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시간은 4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하죠. 이 정도면 시청자들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럼요.”

“예. 그러면 최소한의 인원만 남아서 마무리하고, 아버님과 저희는 광탄으로 이동하시죠. 직원들이 퇴근하기 전에 아버님의 모습을 보여 드려야겠어요.”

* * *

“아버님, 긴장되세요?”

한지수의 물음에 임종주는 머쓱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꾸미고 회사에 오는 건 처음이라 영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요.”

“다들 엄청 놀랄 거예요. 우리 임 부장님 맞으시냐고, 완전 바뀌셨다고. 사모님은 감탄하실걸요?”

“하하, 놀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5시 40분을 막 지날 무렵, 우리가 타고 있는 촬영 버스가 멈춰 섰다.

“도착했나 보네요.”

우리는 공장 건물 앞에 내려 간단히 촬영 준비를 마쳤다.

“이쪽이 제가 일하는 악기 생산 공장이에요.”

그리고 6시가 딱 지날 무렵.

공장에서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촬영팀을 보고 흠칫 놀라는 눈치를 보였다.

“카메라네?”

“오늘 부장님 촬영 때문에 방송국에서 올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건가?”

“아, 그건가 보네.”

“그러면 부장님도 오셨나?”

직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카메라가 찍고 있는 인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끝은 당연히, 임종주 부장.

그들이 알고 있는 회사에서의 임 부장이 아니라, 180도 변신해서 환골탈태한 임종주였다.

“어?”

“뭐야?”

“부장님?”

“부장님 맞죠?”

“어, 김 대리.”

임종주는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카메라를 향해 설명했다.

“아까 말했던, 우리 일 잘하는 김정훈 대리입니다.”

“아니, 부장님. 어떻게 되신 거예요?”

“제가 아는 부장님이 아닌데?”

“와, 안경도 바꾸셨네.”

줄지어 나오던 직원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깜짝깜짝 놀라며 임종주에게 몰려들었다.

“완전 멋있어요, 부장님.”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다니세요!”

“엄청 잘생겨지셨어요.”

“오늘은 부장님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멋져요.”

임종주는 부끄럽게 웃으며 얼굴을 감쌌다.

“아이고, 민망해라. 일부러 칭찬하지 않아도 돼.”

“아니, 오늘은 사바사바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입니다.”

“평소엔 사바사바하려고 한 건가?”

“에이. 그럴 리가요, 부장님!”

“정말 최고예요.”

“이렇게 다니시면 누가 부장님으로 보겠어요!”

직원들의 칭찬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지켜보는 내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정도.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익숙한 얼굴이 공장에서 걸어 나왔다.

“오잉?”

임종주가 보여 주었던 가족사진에서 본 얼굴.

그의 아내, 유귀옥이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여보.”

임종주는 여유 있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오늘 고생 많았어.”

“아니,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유귀옥은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방송물을 먹으면 반나절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하나?”

그녀의 익살에 스태프들과 직원들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것도 잠시.

임종주는 뒤에 숨겨 두었던 꽃다발을 아내에게 건넸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노란 장미야. 꽃말은 알지?”

노란 장미의 꽃말은 행복.

그리고 그 노란 장미를 감싸고 있는 파란 안개꽃.

“파란 안개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야.”

임종주는 아내를 지그시 바라보며 멘트를 날렸다.

“영원히 사랑해. 그리고 늘 행복하게 해 줄게.”

지켜보던 작가들과 여직원들이 눈을 반짝이며 온갖 감탄사를 내질렀다.

역시 연륜이다.

이렇게 여심을 사로잡는 거구나.

한 수 배웠다.

나중에 써먹어야지.

유귀옥은 꽃다발을 받고는 환하게 웃으며 남편의 두 눈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한 20년 만에 다시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것 같네.”

그녀의 눈빛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사모님이 또 한 번 아버님께 반하셨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