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131화 (132/601)

131화 선택의 갈림길에서 (8)

“강준수입니다.”

“정준이오.”

더블제이, JJ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정준은 걸걸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듣던 대로 호남형이시구먼.”

희끗희끗 새어나온 머리칼은 60대 중반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친근하게 말을 이었다.

“이름에서 ‘준’ 자는 무슨 준 자를 쓰나?”

첫 대화부터 말을 낮췄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러려니 했다.

“준걸 준(俊) 자를 씁니다. 대표님은요?”

“아쉽네. 나는 높을 준(峻)을 쓰거든.”

정준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누군가와 동석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타이밍에 맞춰서 장한나 대표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간만에 뵙네요, 대표님. 잘 지내셨죠?”

그녀의 등장에 정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같이 온다는 사람이 장 본부장일 줄은 몰랐는데.”

“이제 장 본부장이 아니라, 장 대표입니다.”

“아아, 그래. 얼마 전에 HY엔터로 갔다지?”

“맞습니다.”

“그래, 잘됐구먼.”

그는 장한나 대표와 악수를 한 후, 우리를 소파로 안내했다.

“일단 앉지.”

정준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장한나 대표에게 말했다.

“자네 로드 시절이 어제 같은데 벌써 대표라니, 세월 참 빨라.”

“그러게요. 저도 연예계라는 곳이 워낙 빠르게 돌아가니까 시간 가는 걸 모르겠더라고요.”

“권 이사도 잘 지내지?”

WG의 권태식 이사를 묻는 것일 터.

“예, 뭐 늘 똑같죠.”

“다행이구먼.”

정준 대표는 온화한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PD님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굉장히 궁금하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HY엔터 대표님까지 모셔 오셨다니 말이야.”

이런 스타일은 길게 끌어 봤자 오히려 말린다.

연륜에서 나를 압도하기 때문.

단도직입적으로 가야 한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드림소다의 김채이, 저희한테 넘겨주시죠.”

“허허…….”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것도 잠시, 정준은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를 싹 지워내고 사나운 눈빛으로 돌변했다.

“나는 강 PD님과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저번 촬영도 그렇고 몇 번 협조까지 했는데 말이야.”

“비즈니스라는 건 상황에 따라 늘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정준은 도리질을 했다.

“강 PD님은 대화에 여유가 없구먼.”

옆에 있던 장한나 대표가 답변을 촉구했다.

“사담으로 쓸데없이 시간 잡아먹는 것보다는 낫죠.”

그녀는 코를 찡긋하며 덧붙였다.

“대표님이나 저나 시간이 돈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렇지.”

정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도 결론부터 말하지.”

그는 턱을 치켜들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왜 김채이를 줘야 하지?”

거절의 의사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아직 카드를 꺼내지 않았으니까.

여기서부터는 나의 구역이다.

장한나 대표는 내게 일임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났고.

내가 온전히 일 대 일로 대화를 이끌 차례.

나는 정준 대표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림소다 7명을 모두 잃는 것보다는 김채이 한 명만 잃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들고 온 태블릿 PC를 꺼내 그에게 동영상 하나를 보여 주었다.

‘나의 일상 다이어리’에서 김채이가 왕따를 당하는 장면 및 얼마 전, 더블제이에서 박하연의 심부름을 하며 일방적으로 욕을 먹고 괴롭힘을 당하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영상.

그의 한쪽 눈썹이 불만이라는 듯 역으로 휘어졌다.

“보아하니 여기 가수들을 맡고 계신 구한철 팀장님은 알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영상에는 굳이 담지 않았습니다만, 저에게 못 본 척해 달라고 말씀해 주신 것도 알고 계실 텐데요.”

약간의 블러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구한철 팀장이 말하는 모습은 찍히지 못했다.

그 대신 그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선명하게 녹음되었다.

“흐음…….”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잘 먹혀들었다.

원래 남을 속일 때는 온전히 거짓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팩트 90%에 거짓 10%를 섞는 게 더 효과적이니까.

나는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아, 참. 얼마 전에 찌라시까지 돌았으니 대표님도 모르실 리가 없겠네요.”

내가 태블릿 PC의 화면을 끄자, 정준은 찡그렸던 인상을 펴더니 비릿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그래서 이걸 터뜨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요.”

나 또한 그에 응답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터뜨릴 생각이 없으니까 이렇게 직접 뵈러 왔죠.”

정준 대표의 인상이 순식간에 험상궂게 변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이깟 표정 따위에 기가 죽을 만한 소인배가 아니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손끝을 모은 채 무릎 위에 올렸다.

“HY엔터에서 김채이에 대해 정식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심기 불편한 숨소리만 내뱉었다.

“까놓고 말해서 드림소다 센터도 아니고, 김채이입니다. 굿즈 판매도 최하위권이라고 들었고요. 다른 멤버에 비해 타격이 적을 거라는 건 대표님이 제일 잘 아시잖습니까? 대표님 정도면 바로 계산 나오실 텐데요.”

“…….”

“억지로 데리고 있는 것보다 지금 놓아 주는 게 회사 차원에서 손해가 적을 겁니다. 평소처럼 ‘상품’으로 생각하시면 결정하시기 쉬울 텐데요.”

연예인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건 더블제이가 가장 심하다.

3대 엔터임에도 급이 되지 않는 연예인들은 이미지보다는 돈을 생각해 온갖 행사와 팬미팅, 하류 광고 등에 갈아 넣어 수익을 창출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연예인들에 대한 마인드는 정준 대표보다는 차라리 HS엔터의 박호원 본부장이 더 양호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물론 도긴개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정준 대표는 쉽게 김채이를 넘겨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일반 연습생이나 계약이 끝난 연예인도 아니고, 활동 중이면서 계약 기간도 남아 있는 아이돌의 멤버 하나를 탈퇴시키는 일이니까.

이건 사업을 넘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가는 일이라고 생각할 테지.

아니나 다를까, 정준 대표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가 제안을 거절하면 터뜨릴 배짱은 있고?”

“그럼요.”

나는 얄밉게 대답했다.

“저야 손해 볼 거 없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공익을 위해 일했다고 보일 테니 도움이 된다고 봐도 되겠네요.”

그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휘었다.

“혹시 제 배짱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JBC 신입 시절부터 내 행보는 방송계에 익히 알려졌다.

3대 엔터 대표라는 사람이 모를 리가 없지.

정준은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어째 협박으로 들리는데.”

“에이, 스카우트 제의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나는 슬쩍 장한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뒤로 물러나 있던 그녀가 개입할 차례.

“드림소다 기준으로 위약금은 충분히 맞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굳어 있던 정준의 표정의 완화되기 시작했다.

“아직 계약 기간이 꽤 남아 있어서 위약금 액수가 크다는 걸 알 텐데. 더블제이에서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지도 알 테고.”

계약할 때 받은 계약금의 3배를 물어주는 것은 기본이고.

남은 계약 기간 동안 벌어들일 수익까지 물어줘야 한다.

즉, 활동한 기간 1년 동안 1억을 벌어들였다면.

일반적으로 7년이라는 계약 기간을 생각할 때, 6년간 벌어들일 금액을 계산해 위약금으로 6억 원을 지급해야 된다는 것이지.

드림소다가 데뷔한 지 이제 겨우 2년이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위약금 액수는 적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사업적’인 마인드로 생각하는 정준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일이 아닌 것이지.

아니, 오히려 이득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김채이의 빈자리는 새로운 멤버를 추가하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 어떻게든 채워 수입을 충족시킬 테니까.

“그 위약금을 전부 드린다는 겁니다.”

장한나 대표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대표님은 드림소다 지키고, 비인기 멤버 계약 해지해서 위약금도 챙기시고.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순간, 정준 대표의 입꼬리가 짙게 휘어졌다.

“역시 HY엔터의 자금력이 세긴 세.”

예상했던 대로다.

이런 식의 계산이 나왔으면, 정준이 마다할 리가 없지.

어차피 붙잡고 있어 봤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을 테니까.

“위약금은 계산해서 보내도록 하지.”

그는 방긋 웃으며 의자를 짚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일어서려던 그를 붙잡았다.

“저희는 말 그대로 스카우트 제안을 드린 겁니다. 김채이 양의 잠재력과 실력을 보고 말이죠.”

이게 가장 중요하다.

“더블제이도 동의를 한 거고, 멤버들도 불화를 일으킨 적이 없는 거죠.”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정준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의 입은 내가 직접 통제하지. 김채이의 미래를 위해서 보내 주는 걸로.”

이 내용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

김채이가 멤버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서 구해 주기 위해 우리가 그녀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본인이 모르도록 하기 위해서다.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보다는,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게 장기적으로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스카우트를 받아서 가는 거라면, 자존감도 심어 줄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18살 여고생의 입장에서는 왕따 당한 과거를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것이란 이유가 가장 컸다.

“그건 걱정 말게. 어차피 우리도 드림소다 팬덤 관리해야 하니 알리지 않아야 되는 건 마찬가지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계약 해지 서류 기다리겠습니다.”

* * *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PD님이 다 하셨죠. 저야 옆에서 거들은 게 전부니까요.”

“협상이 잘 끝나서 다행이네요.”

“네. 정준 대표가 돈을 제일 우선순위로 생각한 덕분에 잘 정리가 되었네요.”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핸들을 잡은 지 오래지 않아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천유나.

“예, 강준수입니다.”

-PD님, 방금 막 채이와 이야기 끝내고 나왔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계획했던 대로예요. 계약 문제와 향후 가수로서 활동할 수 있는지를 제일 걱정했는데, 그 부분이 해결되면, 나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저희도 잘 이야기됐습니다.”

-정말요?

천유나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진심으로 기뻐했다.

-잘됐네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유나 씨가 고생하셨죠.”

그녀는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참, 채이가 물어보더라고요. 어떻게 자신에 대해서 알았냐고요. 실력과 잠재력을 보고 데려온다고 하니까, 궁금했나 봐요.

“뭐라고 답변하셨어요?”

-강준수 PD 추천으로 관심 갖고 보게 되었다고 했죠.

“……예?”

-완전 감동한 눈치던데요?

나는 장난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이렇게 제 이름을 파신 겁니까?”

-조금 왜곡되긴 했지만, 어쨌든 PD님 덕분인 건 사실이잖아요?

“허허허…….”

이거 다음에 만날 때 완전 부담스럽겠는데.

-내비게이션 소리 들리는데, 지금 운전 중이세요?

“예. HY엔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 그러면 장한나 대표님도 같이 계시는 건가요?

“옆에 계세요.”

-그러면 혹시 시간 괜찮다면, 커피 한잔할 수 있냐고 물어봐 주실 수 있나요?

장한나 대표는 그녀의 물음에 직접 대답했다.

“그럼요. 이제 우리 프로듀서 되실 분인데, 당연히 미리 만나 뵈어야죠. 채이 양 데뷔 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요.”

-하하하, 듣고 계셨구나. 그럼 제가 지금 HY엔터로 갈까요?

“네. 오시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순탄하게 더블제이와의 협상이 정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김채이가 HY엔터에 잘 적응해서 솔로로 성공적으로 데뷔하기를 기다리는 것뿐.

무엇보다 기쁜 건 김채이가 드림소다 멤버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멤버들과 함께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홀로 있을 때만 볼 수 있었던, 그녀의 환한 미소가 머릿속에 아른거려 왔고.

절로 내 입가엔 미소가 피어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