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133화 (134/601)

133화 늘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2)

“안녕하세요, PD님.”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에 단아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예은 씨.”

“통화로만 이야기하다가 뵙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진즉에 뵀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작가들과 미팅은 몇 차례 진행했지만, 나는 촬영과 편집 때문에 오늘이 첫 만남이었다.

“아닙니다. 바쁘신데 어쩔 수 없죠.”

나와 인사를 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진예은.

MBS의 기상캐스터 출신으로 현재는 딸이 한 명 있는 주부이자, ‘원더우먼이 간다!’에 출연할 3번째 인물.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올해 29살로 출연진 중 가장 젊다.

“그나저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네?”

“아이 말이에요.”

“아, 그거야 당연하죠.”

진예은이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아이가 본인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촬영장에 데려와도 되겠냐고.

어리기도 하고, 워낙 본인과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해서 어린이집에 보낼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당연히 수락했다.

프로그램 기획의 방향성만 생각하면, 현장에서 우리 제작진이 아이를 봐줄 요량까지 있었으니까.

물론, 진예은도 폐를 끼치지 않고 싶다며 어머니가 직접 와서 아이를 본다고 했다.

“전혀 개의치 마세요. 저희도 분위기 밝아서 좋을 것 같은걸요.”

그때,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엄마!”

어린 여자아이가 도도도 달려와 진예은의 품에 안겼다.

“우리 딸 왔어?”

진예은은 아이를 안으며 사랑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오고 이써요.”

아직 아이라 그런지 발음이 샌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몇 개월이라고 했죠?”

“이제 28개월이에요.”

그녀는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샛별아, 삼촌한테 안녕하세요, 해야지.”

애가 어찌나 귀여운지, 아이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함박 미소가 지어졌다.

또렷한 눈망울에 오뚝한 코. 앙증맞은 붉은 입술에 우유 같은 순백색 피부.

어떻게 28개월짜리 아이가 이렇게 이목구비가 선명한지 모르겠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할 정도.

진짜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다.

“샛별이, 안녕.”

“안녕하데요.”

진예은은 아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애가 다른 말은 잘하는데 ㅅ(시옷) 발음을 잘 못 해요.”

그게 문제가 아닌데요.

귀여워서 미치겠는데요 진짜로.

내가 원래 아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귀여운 아기는 처음 봤다.

워낙 부모님이 선남선녀다 보니,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모양.

“아이가 엄마를 쏙 빼닮았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때, 대기실의 문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더해졌다.

“PD님이시죠?”

고개를 돌려 보자, 진예은과 닮은 중년의 여성이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진예은의 어머니다.

“어유. 안녕하세요, 어머님.”

“반가워요.”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인사했다.

“아이는 녹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제가 잘 보고 있을 테니 염려치 마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촬영장에 얼마든지 들어오셔도 돼요. 아이한테도 촬영장 구경하는 건 새로운 경험이 될 테니까요.”

똑똑.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막내 작가가 찾아왔다.

“PD님, 이제 촬영 시작 시간입니다.”

“예.”

나는 진예은을 보며 말했다.

“가시죠.”

우리는 아이를 뒤로하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말이 촬영장이지, 회사에 있는 작은 회의실이다.

첫 촬영이니 오늘은 인터뷰가 주 내용이니까.

우리는 간단한 근황 인터뷰를 끝내고 늘 그렇듯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예은 씨께서는 요리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요리의 한 분야인 제과제빵에 관심이 있어요.”

“제과제빵이라면, 베이커리 쪽인가요?”

“네. 맞아요.”

“어떻게 그쪽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특별한 동기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진솔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빵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레 빵을 사 먹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빵집 사장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하지만 그쪽과 관련이 없는 분야로 진학하셨죠?”

“그렇죠. 실은 저도 조리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려고 하다가, 부모님께서는 그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며, 지금은 공부에 충실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결국 그 말씀을 따라 인문계에 진학하고, 운이 좋게 기상캐스터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결혼을 하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그녀는 옅게 웃음을 지었다.

“저희 딸이 빵을 엄청 좋아하는 거예요. 저처럼 빵순이더라고요. 이제 28개월 된 아이가 이유식을 뗀 뒤부터 밥보다 빵 종류를 선호하는 걸 보고, 유전자의 힘이 세긴 세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드디어 미뤄 뒀던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렸을 때의 꿈 말씀이시군요.”

“네. 근데 단순한 빵집 보다는, 제가 커피 쪽에도 조금 관심이 생겨서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 뒀거든요. 그래서 베이커리 카페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진예은의 인생 제2막은 베이커리 카페를 여는 것.

“지금도 제과제빵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게 창업을 하려면 단순히 자격증만으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죠. 사업이라는 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공부할 것이 엄청 많더라고요. 그리고 베이킹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어서 프랑스 유학도 잠깐 생각해 보긴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육아를 생각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친정어머니가 도와주고 계시지만, 제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건 무리니까요. 물론, 금전적인 면도 영향이 없지 않고요.”

“그렇군요.”

“그래서 베이커리 카페를 차리는 꿈 자체를 접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진예은은 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작가님께 섭외가 와서 ‘아, 이 프로그램과 함께라면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전하게 되었어요.”

나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에서 질문을 꺼냈다.

“프랑스 유학은 베이킹에 대한 공부 때문에 꿈꾸셨던 거죠?”

“그렇죠. 프랑스가 베이킹의 본고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4년마다 프랑스에서 ‘제빵 월드컵’이라는 게 열리거든요.”

“제빵 월드컵이요?”

“네. 세계 대회인데 가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요.”

“4년마다 열리면 다음은 언제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아마 다음 달에 열릴 거예요.”

순간,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프랑스에 유학을 가 보는 게 꿈이었던 주부.

한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제빵 월드컵.

그리고 그곳에서 짧게나마 배워 와 한국에서 베이커리 카페를 성공적으로 차리는 진예은.

머릿속에 그림이 착착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PD로서의 직감이 왔다.

시청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흥행의 예감이.

* * *

“제빵 월드컵 일정 자세히 파악해 보고, 우리 제작진이 들어갈 수 있는지, 촬영 협조 가능한지 한번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확정되기 전까지는 프랑스 유학 계획은 진예은 씨한테 알리지 말고. 괜히 헛바람 불어넣는 것처럼 보이면 실망만 커지니까.”

“예. 그러면 일정 확인되는 대로 새롭게 촬영 구성안 작성해 보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나는 홍사은 작가에게 업무 지시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깐 HY엔터 연습실 좀 다녀올게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편성 일정이 바뀐 탓에 팀이 진예은과 천유나의 촬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물론, 천유나 쪽은 커다란 틀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내가 직접 갈 필요는 없어서 이수정 PD와 오현민 PD가 현장을 담당하고 있는 상황.

그렇더라도 메인 PD로서 짬이 날 때마다 HY엔터에 방문하고 있다.

천유나와 더불어 주로 보는 얼굴은 김채이.

그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으니까.

본인도 그걸 알기에 뼈 빠지게 노력하고 있고.

김채이는 HY엔터로 이적한 뒤부터 솔로 데뷔를 위해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어 준비하고 있다.

그중 가장 비중이 큰 건 역시나 다이어트.

저번에 들은 바로는, 식사량도 극악으로 줄이고 하루에 8시간씩 운동을 한다고 하니 살이 빠지지 않을 수가 없겠지.

심지어 보컬이나 댄스 연습을 합친 것보다 운동 시간이 더 많으니 말할 것도 없다.

그 자그마한 체구로 버틸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

그렇기에 더욱 그녀의 솔로 데뷔가 기대되긴 했다.

드림소다에서 탈퇴한 뒤, 확 달라진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 주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니까.

아쉬운 게 있다면, 프랑스에 가게 될 경우에는 김채이의 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아마 프랑스에 가게 되면, 천유나 편의 첫 6화 촬영 분량은 마무리될 테니, 오현민 PD만 남겨 둬도 될 테지.

그때부터는 몇몇 포인트를 제외하면 본 촬영에서의 타임랩스 및 큐튜브를 위한 리얼리티 촬영만 진행될 테니까.

지이잉.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임은혜.

한 일주일 만에 연락하는 것 같은데.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강준수입니다.”

-PD님 바빠요?

“아니요. 운전 중이에요. 말씀하세요.”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방금 ‘원더우먼이 간다!’ 재방송 보고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하하, 잘 봤어요?”

-네. 재미있네요.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어디 가세요?

“HY엔터요. 촬영 때문에.”

-아, 역시 워커홀릭이라니까.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 벌써 관객 400만 넘었던데요? 축하해요.”

-고마워요.

무려 2주 만에 400만이다.

지금 기세라면, 공약 약속의 기준이었던 500만은 충분히 돌파할 터.

“조만간 가수 데뷔하셔야 될 것 같던데요?”

-안 그래도 지금 연습실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영화 끝내고 휴식기인데 일하는 기분이라니까.

“진짜로 앨범 내는 거예요?”

-관객들과의 약속인데 당연하죠. 물론, 거창하게 앨범까지는 아니고 디지털 싱글로 한 곡만.

“와, 대박.”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뭔데요?”

-저번 시사회 때 기억나요?

임은혜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 뮤직비디오 찍어 주시기로 했잖아요.

“아하하. 은혜 씨,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그래요? 제가 생각해 본다고 했지, 약속은 안 했거든요.”

-와, 기억하시네.

그녀는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안 해 줄 거예요?

“음,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촬영 일정이 빡세거든요. 채이 데뷔 큐튜브까지 생각하면 앞으로 한 3, 4달 정도는 여유가 없을 것 같은데.”

임은혜는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돌려서 거절하는 거예요? 아니면 진짜 바빠서 그런 거예요?

“정말로 바빠서 그래요. 저 지금 프로그램 방영 중인 거 알잖아요.”

-그러면 전 한참 뒤라도 괜찮은데.

“노래를 그때 발표해도 돼요?”

-아니요. 먼저 발표하고 뮤직비디오는 나중에 공개하는 거죠.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는 다른 가수처럼 곡을 홍보하려고 뮤직비디오 찍는 게 아니라,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곡을 내는 거잖아요?

홍보가 크게 필요치 않은 경우에 실제로 노래를 내고 나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가수도 종종 있긴 하다.

임은혜가 실제 가수도 아니니, 뮤직비디오는 ‘덤’이기에 오히려 나중에 발표하면 팬들이 기대하지 않다가 선물을 받은 격이 되니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알겠습니다. 제가 찍어 드릴게요.”

-위에 허락 같은 거 안 받아도 돼요?

“옛날엔 필요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CN엔터에 처음 들어왔던 신입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 정도는 직접 정할 수 있다.

이번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앞으로의 프로그램도 그럴 테지.

-아싸.

임은혜는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한 거예요!

“그럼요. 올해 안에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원더우먼이 간다!’와 김채이 데뷔 리얼리티 이후에 정해진 일정은 없으니 아마 가능하긴 할 것이다.

“노래는 언제쯤 나와요?”

-글쎄요. 아직 가사가 완전히 나온 게 아니라서 조금 더 봐야 될 것 같아요.

“연습실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제가 가사를 직접 쓰고 있어서, 연습실에서 직접 부르면서 적거든요.

“오, 은혜 씨 작사도 해요?”

-기회가 왔으니까 한번 도전해 보는 거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 보겠어요?

“기대할게요.”

-네. 완성되면 말해 드릴게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PD님한테는 꼭 들려주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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