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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사는 프로듀서-167화 (168/601)

167화 손에 넣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아주 탐스럽게 (6)

“반갑습니다, 강준수입니다.”

“챠오펑입니다.”

챠오펑.

조금은 벗겨진 듯한 머리에 2 대 8로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

중국판 넷플릭트라고 불리는 ‘아이차이’의 한국 지부장이다.

한국 드라마 및 영화, 예능에 대한 투자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인물로, 중국으로 진출하는 한국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꽉 쥐고 있는 인물.

“둘만 만나는 건 조금 아쉽네요. 작가님 의견도 들어보고 싶었는데.”

보통의 미팅이라면, 중국 측에서도 챠오펑을 포함해 각종 부서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한국 측에서도 담당 PD인 나를 포함해서 캐스팅 디렉터, CN미디어 팀장, 담당 작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대거 출동해 미팅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오늘 미팅에선 통역을 제외하면 챠오펑과 나뿐이었다.

“거추장스럽게 여러 명을 달고 와서 산만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최고 결정권자 두 명이서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물론, 속내는 따로 있었다.

신율희 작가를 위해서였다.

그녀가 지금 당장 외출을 할 수 있다고는 하나, 건강에 악영향이 미치는 건 당연한 사실.

본인은 나와야 되면 나온다고는 말했지만, 그렇게 바라던 조연 오디션도 병실에서 본다고 했는데, 이런 협상과 관련해서 불러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조만간 방사선 치료까지 재개한다고 할 정도인데 어떻게 불러내겠는가.

게다가 한 번 나오게 되면, 다른 투자자와 미팅을 할 때도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입장에서는 본인들을 얕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

결국 이렇게 처음부터 1:1로 만나서 담판을 본다면, 다음 투자자를 만나기에도 수월할 테지.

“상해에서부터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이,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음 주에 한국 지부로 들어와야 했는데, 조금 일찍 들어온 거라고 생각하죠, 뭐.”

우리는 오래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준수 PD님 작품이 최근 한국에서 크게 화제를 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중국에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전략이죠.”

평소와 달리, 겸손을 떨지 않았다.

한국 투자자를 만날 때는 ‘운이 좋아서’라든가, ‘얼떨결에 맞았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예의겠지만, 그와 달리 중국 투자자를 만날 때는 오히려 강하게 어필해야 한다.

겸손은 오히려 만만하게 보일 수 있으니까.

“오늘 뵙자고 하신 건 판권 때문이겠죠?”

“예, 맞습니다.”

나는 이번 드라마에 대해 정리한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이번 드라마의 중국 방영권에 대해서입니다.”

“좋은 드라마는 늘 탐이 나죠.”

챠오펑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대본, 감독, 작가 모두 중요한 요소입니다만, 우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건 따로 있습니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배우겠죠?”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번 드라마는 단순히 내수용으로 제작할 생각이 아닙니다. 해외,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 진출까지 생각하고 제작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챠오펑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가방에서 프로필 리스트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저희가 관심 있는 배우 목록입니다.”

그들의 리스트는 크게 두 안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톱급의 인기를 누리는 남자 배우들의 목록이 있는 A안.

권상현, 최우국, 김일준 등.

이름만 봐도 화려했다.

그중에서도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박성현’.

역시 있을 줄 알았다.

나는 기쁨을 숨기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B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국내에서는 인기가 있을지라도, 중국에서 인지도는 약간 떨어지는 인물들.

나는 B안의 목록을 대충 훑어보기만 하고 프로필북을 덮었다.

“벌써 다 보셨나요?”

챠오펑의 놀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B안은 안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예?”

“B안은 고려 대상에 없거든요.”

내 대답을 예상치 못했는지,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강준수 PD님께서 첫 입봉이라고 들었는데, 배포가 장난이 아니시군요.”

“드라마에서는 처음이지만, 예능에서 굴러 가며 정점을 찍은 짬이 있죠.”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B안에 있는 배우들을 고려할 거라면, 애초에 미팅 자체를 잡지 않았을 겁니다.”

“PD님께서 화끈하신 게 아주 마음에 드네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A안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죠.”

챠오펑은 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A안에 있는 배우를 주연으로 섭외할 경우, 편당 12만 달러를 쳐 드리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편당 12만 달러라.

16부작라는 걸 생각하면, 한화로 약 23억 남짓.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박성현의 몸값을 생각하면 절대 만족할 만한 액수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부족할 정도지.

애초에 나는 편당 15만 달러. 즉, 한화로 30억 정도를 생각하고 이 자리에 왔으니까.

내가 대답을 유보하자, 챠오펑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희 쪽에서도 리스크를 지는 겁니다. 작가님의 건강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우리 쪽에 약점이 있다는 걸 알고서 금액을 낮춘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다른 안을 꺼내지 않으면 더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새로운 카드가 필요하다.

“여배우 쪽은 관심 없으십니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요.”

“선택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당연히 중국 쪽에서도 남자 배우만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왔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류 스타가 드라마를 통해 아시아권에 진출했을 경우, 그 영향력은 남배우가 여배우보다 훨씬 더 크니까.

남녀의 문제나 차별이 아니라, 해외에서의 수요 차이다.

“여배우만으로는 따로 조건을 걸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A안에 있는 남자 배우에 더불어 여배우까지 합쳐질 경우를 여쭤보는 거죠.”

“흐음…….”

챠오펑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A안에 밀리지 않는. 즉, A급 여배우까지 주연으로 확정이 된다면, 편당 20만 달러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8만 달러가 추가되었다.

한화로 총 40억.

그러나 챠오펑이 말하는 A급 여배우는 국내에서 A급이 아니라, 중국에서 A급 대우를 받는 인물들을 말하는 것일 터.

중국에서 통하는 남배우들은 꽤 있을지 몰라도, 국내 여배우 중 중국에서 A급으로 통하는 인물은 굉장히 소수다.

드라마와 영화계에서 잘나가는 임은혜만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고 인기가 있지만, 해외에서 인지도는 상당히 낮으니까.

주연으로 고려하고 있는 한시아는 두말할 것도 없다.

지금 촬영 중인 영화가 개봉하고 해외 진출까지 하면 모를까, 그걸 기다리기엔 너무 먼 시간이다.

중국에서 A급 대우를 받는 여배우들 리스트를 한번 뽑아 봐야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할 생각으로 물었다.

“한보라 정도면 A급이겠죠?”

재작년, 박성현이 출연했던 ‘사랑스런 그대의 밤’에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던 인물로 그녀 또한 박성현과 함께 한류 스타덤에 오른 인물.

그러나 챠오펑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따지자면, ‘최소’ 한보라죠.”

중국에서 그녀의 인지도가 상당한데도 이렇게 말할 정도면, 허들이 정말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더 협상의 여지는 없을 터.

그쪽에서도 여배우를 포함시켰다는 건, 한 발 물러났다는 뜻이니까.

“알겠습니다. 두 사항 모두 고려해서 캐스팅하도록 하죠.”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챠오펑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랜만에 중국을 강타할 한류 드라마가 필요한 시점이거든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조만간 캐스팅 완료하고 연락드리죠.”

* * *

“찌라시도 돌지 않는 걸 보면, 다행히 기자들에게 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성현 섭외 및 중국 투자자와 만나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단 숨기고 있었다.

게다가 챠오펑에게는 투자가 확정이 되더라도, 기사화하지 말고 임시적으로 보류해 달라고 양해까지 구해 둔 상태.

터뜨리기 전에 다른 쪽과 협상해야 할 게 있으니까.

“그렇다면 문제될 건 없고.”

어윤중 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중국과 이야기는 잘 끝났다는 거네?”

“예. 캐스팅만 하면 됩니다.”

“다행이네. 고생했다. 잘했어.”

“아닙니다. 투자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된 거니 안심하긴 이릅니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A급 여배우가 굉장히 중요하겠는데?”

“예. 그게 제일 어려울 것 같아요. 일단 리스트 한번 쭉 뽑아 주세요.”

“그래. 근데 정말 얼마 없을 거야. 한보라 이상이면 국내에 10명이나 되려나? 그중에서 현역으로 뛰는 배우들까지 고르면…… 어후, 진짜 힘들겠는데.”

“일단 한번 가능한 데까지는 해 봐야죠.”

주연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시아와 유나희 중 한 명이라도 캐스팅이 불발될 경우, 그 자리에 섭외할 생각이다.

아마 둘 다 캐스팅에 성공하는 건 어려울 테니까.

“A안에 있는 남자 배우들도 한번 물밑에서 접선해 볼까?”

“아니요. 일단 보류해 주세요. 어차피 모든 기획사로 대본은 돌렸으니, 관심 있다면 봤을 겁니다.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아요.”

최선의 선택은 박성현이다.

괜히 다른 쪽으로 보험을 들어 두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양쪽 모두 놓칠 수가 있는 법이니까.

자존심이 중요한 배우판에서는 더욱 그렇지.

평범한 배우들이라면 몰라도, 톱 배우들은 ‘쟤를 섭외하다가 까이니까 나한테 오네?’라며 반항심부터 드는 게 사실이니까.

“일단 박성현 측이랑 미팅 잡힌 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월요일이요.”

“사흘 남았네.”

“예. 그때는 팀장님도 같이 가 주세요.”

“당연하지. 박성현 정도면 거기 대표가 나올 거거든. 내가 또 이중석 대표랑 연이 있잖아.”

“그래요?”

“응. 예전에 그 친구 로드 시절에 담당 연예인이 내 프로그램 고정이었거든.”

그는 슬쩍 내게 몸을 기울이며 작게 말했다.

“근데 그 이중석 대표가 돈을 좀 밝혀.”

“아, 그래요?”

“응. 거기 출신한테 들어보니까 대표 마인드가 그래서인지 배우나 직원들도 같이 돈에 절여진다더라고.”

“아, 역시 팀장님 정보왕이시네요. 아니, 인맥왕이신가?”

“이쪽에서 조금만 구르다 보면 다 그러잖아. 너도 만만치 않잖아.”

“팀장님에 비할 바는 못 되죠.”

우리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고 일단 박성현이 어떤 마음일지가 제일 문제인데…….”

“그렇죠. 혹시 거기 매니저나 실무급 중에서 아는 사람 없어요?”

“글쎄…….”

그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 선에선 없네. 너는 박성현이랑 친한 연예인 중에 아는 사람 없어?”

“제가 당사자들이랑 친하긴 해도, 그 인맥까지 알기는 어렵더라고요.”

“하긴, 연예인들이 원체 비밀이 많아야지.”

“일단 미팅 준비만 확실하게 해 두겠습니다.”

“그래. 월요일 오후 2시지?”

“네. 당일 오전에 한 번 더 말씀드릴게요.”

“알았다. 조심히 퇴근하고.”

“예, 들어가세요.”

* * *

“좋은데?”

박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내려놓았다.

“이거 느낌 있네.”

그의 매니저, 박동찬 실장은 핸들을 잡은 채 룸미러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보는데?”

“‘오늘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닐지라도’.”

“아, 오주당?”

“응. 요즘 화제라며?”

“담당 PD가 조금 유명하거든.”

“형은 이거 대본 읽어 봤어?”

“어. 괜찮던데?”

“역시 형도 대본 보는 눈 있다니까.

박성현은 흡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읽다 보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청춘들의 몽글몽글한 감성을 자극하는 느낌? 뭔가 지금까지 보던 양산형 드라마들이랑은 감성이 달라.”

“신인 작가라 그런가 봐.”

“어쩐지 클리셰에 절여지지 않았더라. 재능도 있는 것 같아.”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성완이도 괜찮다던데?”

“성완이?”

“내 사촌동생.”

“아, 박시완 말하는 거야?”

“응.”

본명은 박성완. 예명은 박시완.

“걔도 대본 좀 보거든.”

“어, 저번에 들은 것 같다.”

“맞아. ‘사랑스런 그대의 밤’도 걔가 골랐잖아.”

박성현의 첫 히트작이자, 그를 톱스타덤에 올려 놓은 그 드라마도 박시완이 골라 준 작품이었다.

“시완이가 말하기로는 대본도 좋은데 PD님이 너무 좋다고 하더라고.”

“PD? 그 친구도 드라마 했었나?”

“아니, ‘컴백 프로젝트’ 말이야. 강준수 PD가 예능 출신이잖아.”

“아, 맞네. 박시완이 ‘불후’ 밴드 보컬이었지?”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다고 엄청 칭찬하더라고.”

“그 정도야?”

“응. 대본이 구려도 어떻게든 띄울 정도로 능력이 된다고 적극 추천하던데.”

“에이, 그게 가능해?”

“그건 모르겠는데, 일단 편집 실력은 좋은 것 같아.”

“하긴, 드라마 시작 전부터 화제 끄는 거 보면, 확실히 방송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긴 해.”

“한번 만나 보고 싶어.”

“안 그래도 월요일에 미팅 잡아 뒀다고 했잖아.”

“아, 그게 이거구나.”

“그러니까 내가 그 대본 읽으라고 했지.”

“역시 우리 형이라니까. 난 형 말고 다른 매니저랑은 일 못 할 것 같아.”

“알았으면 회사에 어필 좀 해 봐.”

“안 돼. 형 승진하면 내 로드는 누가 봐? 보너스 많이 줄 테니까 나랑 평생 가자.”

“됐거든.”

박동찬 실장은 슬쩍 룸미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들어갈지, 말지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잖아?”

“그렇긴 하지.”

박성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딱 ‘그것’만 해결되면 좋겠는데.”

“근데 그걸 그쪽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못 하면 어쩔 수 없지. 신선하긴 해도, 좋은 대본은 이거 말고도 많잖아?”

“그렇지. 너 원하는 데도 엄청 많고.”

“응. 내가 굳이 목 멜 필요는 없지.”

“그래. 미팅은 부담 갖지 말고 마음 편하게 하자고.”

“알았어. 형만 믿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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