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환기 (4)
“뭐야?”
세트장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도착한 야외 촬영장의 분위기는 굉장히 침체되어 있었다.
“길훈아.”
나는 미리 도착해 있던 AD를 불러 물었다.
“분위기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최길훈은 슬쩍 배우들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성현 씨가 대본에 불만이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대충 정리한 이야기를 들었다.
박성현이 본인의 분량이 줄어든 것에 불만을 품고 스태프들을 헤집어 놓은 것.
어느 정도 예상했던 그림이라 당황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틀 전에 대본을 건네줬는데도 연락이 없었던 탓에 촬영장에서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은 했으니까.
다만, 내가 없을 때부터 크게 난리를 피운 것은 꽤나 의외였다.
“지금 박성현 씨 어디 있어?”
“밴에 타고 계신 것 같아요.”
“저기 있는 242허 4106 맞지?”
“예.”
그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물었다.
“직접 가시게요? 제가 불러와도 되는데.”
“됐어. 이런 건 내가 해결해야지. 촬영 준비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나는 스태프들을 뒤로하고 박성현이 타고 있는 밴의 문을 두드렸다.
“성현 씨. 강준수입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박성현이 얼굴을 드러냈다.
“어…… 안녕하세요, 감독님.”
걱정했던 것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분명 붉으락푸르락하며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을 줄 알았는데 그와 달리, 조금은 창백해 보인달까.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들어오세요.”
나는 박성현의 옆자리에 탑승해 운전석을 보며 말했다.
“박 실장님. 잠깐만 자리 좀 비워 주시겠어요?”
그의 매니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흘긋 박성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대본에 대해 항의를 할 때 공식적인 과정을 거쳤다면 모를까, 아무리 매니지먼트라고는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감독과 배우, 둘이 해결할 일이니까.
“예.”
차의 문을 닫고 하차했다.
그리고 온전히 둘만 남은 공간.
먼저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성현 씨.”
그는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었다.
“저기 성현 씨?”
“네? 아, 네. 감독님.”
“조감독한테 전해 들었어요. 대본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그는 머리를 꾸벅이며 사과했다.
박성현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당황스러운 기운이 피어났다.
뭐야.
얘 왜 이래.
내가 예상한 그림이 아닌데?
분명 대본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고 내가 그걸 잘 달래서 촬영에 임하려고 했다.
그게 안 되면 강하게 팩트를 들이대며 찍어 누를 각오도 하고 있었고.
그러나 이건 박성현이 벌써 꼬리를 내린 느낌이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면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니요. 없습니다.”
설마 아예 하차해 버리려고 이러는 건가?
오히려 걱정이 들 정도.
괜히 심각해지는데.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번 대본 수정으로 인해 불만이 있으시면 말씀하셔도 돼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제가 설명 드리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추가적으로 대본 수정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아뇨, 없습니다. 없어요.”
박성현은 손사래까지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괜히 제가 난리를 피웠어요. 죄송합니다. 사과드릴게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지금 대본에 더 불만을 제기하지는 않겠다는 뜻 같은데.
다만, 평소 박성현의 태도를 생각하면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제가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나요?”
“……아니요.”
짐짓 망설였던 걸 보니, 뭔가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 따로 물어볼 사항은 없고요?”
“예.”
“30분 뒤에 촬영할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제가 그…….”
박성현은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제 촬영 분량을 뒤로 좀 빼 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 머리가 아파서 감정 몰입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오늘 마무리 촬영까지 이곳에서 진행되니 제일 후미로 미뤄둘게요. 많이 아프신 건 아니죠?”
“예. 그냥 가벼운 두통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문제 있으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정 안 되겠으면 말씀하시고요.”
“아닙니다. 촬영엔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잡고 인사했다.
그리고 밴의 문을 열려는 찰나.
“아, 감독님.”
“예?”
“혹시나 해서 말인데…….”
박성현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임은혜 씨랑 어떤 사이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예?”
“아니, 다른 뜻은 없고요. 그냥 이번 작품만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신 것 같아서요.”
“특별한 건 없습니다. 이번 작품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동료예요. 한 1년 가까이 되었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더 물어보실 건 없죠?”
“네.”
“그러면 촬영 준비하러 가볼게요.”
“예. 이따가 시간 맞춰서 나가겠습니다.”
“네. 쉬어요.”
나는 박성현을 뒤로 하고 밴에서 내렸다.
그와 이야기하는 게 걱정이 되었는지, 최길훈 AD를 포함한 몇몇 스태프들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여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 준비하라니까.”
“준비는 다 끝났어요. 그런데…….”
최길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정리 됐나요?”
“응. 박성현 씨 분량만 오늘 후미로 미루면 될 것 같아.”
“아하.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혹시 박성현 씨 무슨 일 있었어? 아까 네가 이야기한 것치고는 조금 상태가 이상하던데?”
“아, 그게…….”
그는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한참을 망설였다.
“뭔데?”
“그러니까 그게 은혜 씨가 데리고 가긴 했는데…….”
그때.
“감독님!”
뒤에서 임은혜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최길훈은 흠칫하더니.
“선배님. 일단 촬영 일정 바뀐 것부터 공지해야 될 것 같으니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는 옆에 있던 스태프들과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바로 촬영장으로 섞여 들어갔다.
임은혜는 방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요.”
나는 그녀의 옷을 살피며 말했다.
“은혜 씨 오늘 의상, 대본이랑 완전 찰떡이네요.”
“그래요? 다행이다.”
“아, 참. 은혜 씨 혹시 성현 씨랑 무슨 이야기하셨어요?”
그녀는 박성현이 타고 있는 밴을 흘기고는.
“왜요, 성현 씨가 무슨 이야기했나요?”
“아니요. 은혜 씨랑 친하냐고 물어보길래 친하다고 했거든요.”
“아하, 저도 별것 없었어요.”
임은혜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대본 수정한 거 봤는데 말이에요. 다다음 촬영 신에서는…….”
* * *
“컷! 오케이!”
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촬영에 돌입하기 전까지 박성현이 살짝 넋을 놓고 있는 바람에 많이 걱정했지만, 역시나 프로라는 걸 증명하듯 카메라가 돌아가자 빠르게 집중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3번의 트라이만에 완전히 페이스를 되찾았고, 적은 NG를 뒤로하고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성현 씨 고생 많았습니다. 서연 씨 수고했어요. 나희 씨도 고생했어요. 은혜 씨 연기 진짜 좋았어요. 다들 조심히 들어가요.”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나는 배우들을 인사를 하며 배웅한 뒤, AD 최길훈을 불렀다.
“길훈아.”
“예, 선배님.”
“이제 슬슬 우리 종방연 식당 예약해야 될 것 같거든.”
“아, 그렇네요.”
마지막 방송까지는 앞으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한두 명도 아닌 만큼, 괜찮은 식당이라면 예약하기 힘들 수도 있으니 미리 잡아 두는 게 좋을 터.
“생각해 놓으신 곳 있으세요?”
“응. 저번에 갔던 그 북경오리 식당 있잖아. 종로 쪽에 있던 곳인데 어디더라?”
“아, 그 저희 PD들 데리고 갔던 곳이요?”
“응, 맞아. 갑자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저도 그 식당 입구는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요.”
껍질도 바사삭하고 살도 부드러워서 진짜 맛있었는데.
어디더라…….
그때, 뒤에서 임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유덕이요.”
“네?”
“그 식당 이름 말이에요. 유유덕이라고요.”
“아, 맞다!”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유유덕이었지.”
“맞아요. 유유덕이예요.”
최길훈도 기억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로 예약할까요?”
“그래. 우리 16화 마지막 방영일 맞춰서 예약해 둬.”
“알겠습니다.”
AD가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비우자, 문득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났다.
“어, 그런데 은혜 씨는 어떻게 아셨어요? 거기 스태프들끼리 간 것 같은데. 은혜 씨도 같이 갔었나?”
“아니요.”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종로에 북경오리 요리로 유명한 식당 하니까 거기가 떠오르더라고요.”
“아, 그러셨구나.”
“네. 그러면 저도 들어가 볼게요. 내일 세트장에서 봬요.”
“예, 들어가세요.”
임은혜는 생긋 웃으며 매니저와 함께 떠나갔다.
근데 뭔가 이상한데.
임은혜가 대답할 때 ‘유유덕이라는 식당이 아닐까?’ 하는 느낌보다는 왠지 그곳이라고 확신하는 느낌이었는데.
기분 탓인가?
내가 피곤해서 잘못 들은 걸지도.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손뼉을 치며 스태프들에게 외쳤다.
“자자, 얼른 정리하고 퇴근합시다!”
* * *
지이이잉.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지만 나는 휴대폰을 보는 대신 뒤집어 무음으로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오후 9시 40분.
마감까지는 겨우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편집은 거의 끝나가지만, 마지막으로 윤색하는 과정을 진행 중이었다.
원래 마감을 할 때가 되면, 더 다듬고 싶은 부분이 생기는 게 PD들의 본능이니까.
휴대폰 진동은 여전했지만, 급한 일이 있으면 직접 편집실로 찾아오거나 직원을 보내겠지.
내가 마감 날에 이곳에 있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
사실, 마감보다 급한 일은 더 없기도 하고.
그렇게 한참 동안 마감에 집중하던 도중.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진짜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감독님?”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방문객의 정체를 확인했다.
“……은혜 씨?”
갑자기 예고도 없이 임은혜라니.
나는 당황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냥 지나가던 김에 회사가 보이길래…… 연락도 안 되고 해서요.”
“아아.”
그렇게 진동이 울리는 게 누군가 했더니만.
“은혜 씨였구나.”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더니.
-읽지 않은 메시지: 34건
전부 임은혜가 보낸 메시지였다.
“……뭘 이렇게 많이 보냈어요?”
“아니, 그냥…….”
임은혜는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많이 바빠요?”
“조금요.”
나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키보드를 잡았다.
“제가 10시까지 마감이거든요? 이제 한 10분 정도 남았는데 이것만 처리하면 되거든요? 곧 마무리되니까 잠깐만 기다릴래요?”
“네. 그럴게요.”
임은혜는 편집실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니, 제가 주변에 누가 있으면 집중이 안 되어서 그런데 휴게실 가서 기다릴래요? 3층 가면 저희 사무실에 있거든요. 가 보셨죠?”
“어딘지 알아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게실 말고 감독님 개인 집무실 가 있어도 돼요?”
“네. 열려 있을 거예요.”
“가서 기다릴게요.”
“금방 끝내고 갈게요.”
임은혜는 눈웃음을 지으며 편집실 문을 닫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여의도까지 들른 거람.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9분.
나는 다시금 빠르게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