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1)
똑똑.
“네, 들어오세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반가운 얼굴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PD님, 오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작가님.”
내가 찾아온 곳은 다름 아닌, 신율희 작가의 병실.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죠?”
“아니에요. 저 아침 일찍 일어나요.”
그녀는 특유의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그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오는 길에 생각이 나서요.”
회사에서 챙겨 준 홍삼부터 시작해서, 오는 길에 사 온 꽃바구니와 신율희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병원 앞 삼거리 토스트.
“여기 올려 두면 될까요?”
“네. 거기 두시면 돼요. 꽃은 저 주세요.”
들고 온 물건들을 한 쪽 테이블에 올려놓고 병상으로 다가가 꽃바구니를 건넸다.
꽃향기를 맡은 신율희 작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향기가 많이 안 나는 것 같은데. 제 코가 막힌 건가?”
“비누 꽃이에요. 물어보니까 알레르기 때문에 생화는 안 된다고 들어서.”
“아, 좋네요. 시들지 않고.”
그녀는 흡족스레 웃고는 옆에 있는 냉장고를 가리켰다.
“목마르실 텐데 저기서 마시고 싶으신 거 꺼내 드세요. 제가 챙겨드려야 되는데 지금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편하게 계세요. 이런 건 제가 또 잘하거든요.”
나는 너스레를 떨며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 두 개를 꺼내 왔다.
“오늘은 어머니가 안 계시네요?”
“은행 업무 볼 게 있어서 가는 김에 잠깐 집에 들렀다 오기로 했어요. 점심 한참 지나서나 오실 것 같은데.”
“아, 그러시구나.”
병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에게 음료 뚜껑을 따서 건네며 물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야 늘 똑같죠. 여기서 TV 보다가 심심할 때 노트북 좀 두드리고…….”
그녀는 말하다가 민망하게 웃었다.
“저 목소리 조금 이상하죠?”
“이상하진 않은데 조금 바뀐 느낌이 들긴 해요.”
“기침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쉬어가지고…… 조금만 양해해 주세요.”
“저번에도 기침하셨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거예요?”
“폐에 숙주 반응이 와가지고 그래요. 괜찮아요.”
그녀는 씩씩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게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한창 드라마 할 때보다 오히려 안색이 더 나빠 보일 정도니까.
“그래도 붓기는 많이 빠지신 것 같아요.”
“아, 맞아요. 얼마 전에 항암 치료 끝났거든요.”
나는 반색하며 물었다.
“오, 그러면 이제 회복 단계인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골수는 잘 맞아서 좋아지고 있긴 한데, 폐가 꽤 안 좋더라고요.”
매번 괜찮다, 건강하다고 말하던 그녀였는데 본인 입으로 안 좋다고 할 정도면 꽤나 상황이 나쁜 모양.
“한 군데가 아프니까 전체적으로 다 안 좋아지더라고요. 지금 면역력 자체가 높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얼른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음만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민망했는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참, 내일 출국하신다고 하셨죠?”
“네. 중국 상하이로 갑니다. 다 작가님 덕분이에요. 스토리가 워낙 좋아서 중국에서 진짜 잘 먹히고 있거든요. 인기가 장난이 아니라니까요?”
“에이, PD님이 잘 연출해 주신 덕분이죠. 드라마는 대본보다 연출이죠.”
“주거니 받거니 아주 훈훈하고 좋네요. 흐흐흐.”
“그러게요. 남들이 보면 비웃겠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중국에서 2박 3일 동안 일정 소화한 뒤에 바로 하와이로 갈 거예요.”
“와, 진짜요? 저번에 통화로 말씀하셨던 그 3박 4일 포상 휴가로 가는 거죠?”
“네, 맞아요. 작가님도 같이 가면 참 좋을 텐데…….”
신율희 작가도 아쉬운 듯 굳이 부정하지 않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 말고 재밌게 놀다오세요.”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제 몫까지 신나게 노셔야 돼요. 아셨죠?”
“네. 그럴게요. 사진이라도 보내 드릴까요?”
“아, 좋죠. 매일매일 보내 주세요. 사진으로 대리 만족이라도 하게.”
“하하, 알겠어요.”
그때, 문득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토스트의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 오기 시작했다.
“저 토스트도 사 왔는데 저거 따끈할 때 먹어야 맛있잖아요. 가져올까요?”
“어,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저었다.
“제가 요즘 밥을 잘 못 먹거든요. 두고 가시면 이따가 엄마랑 같이 먹을게요.”
“네. 알겠어요.”
그때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어윤중 팀장.
아마 내일 출국해서 소화해야 하는 중국 팬 미팅 때문일 터.
신율희 작가도 내가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걸 눈치 챘는지, 허리를 세웠다.
“오늘 바쁘다고 하셨잖아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제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
“아니에요.”
“제가 쉬고 싶어서 그래요.”
배려심으로 말하는 게 정말 고마울 지경이다.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나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게요.”
“조심히 가세요. 휴가 사진 꼭 보내 주시고요.”
“네. 쉬세요, 작가님.”
* * *
“PD님 오셨어요?”
“감독님 안녕하세요!”
“다들 오랜만입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정서연과 배정우 등을 비롯한 ‘오주당’의 출연진들과 스태프들.
드라마의 종영 이후 간만에 보는 얼굴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감독님은……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습니다. 진짜 어떻게 하루도 안 쉬고 일하세요?”
“하하하, 먹고 살아야죠.”
스태프들은 예전에 봤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출연진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이는 역시나 배정우.
‘오주당’이 종영하면서 그의 주가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촬영 당시에도 온갖 러브콜을 받았는데, 지금은 아예 팬덤 자체가 꽤 커진 수준까지 이르렀지.
지금도 사전 제작 드라마 하나를 찍으면서 영화까지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주연이라고 들었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을 터.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 성현 씨도 일찍 오셨네요.”
“네. 미리 와야죠.”
그에 반해 박성현은 살짝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클래스는 여전했다.
그가 ‘오주당’에서 배정우에게 살짝 밀렸을 뿐이지, 한 번 톱배우는 영원한 톱배우였으니까.
이들과 달리, 유나희와 임은혜는 커다란 변화까지는 없었다.
유나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국내외에서 탑을 달리고 있었고.
임은혜는 국내에서 탑을 넘어 해외까지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
“은혜 씨 요즘 신작 준비한다면서요? 해외에서도 동시 개봉이라고 하던데.”
“네. ‘오주당’ 때문인지 중국 자본으로 투자를 조금 받았거든요.”
이거 내가 다 뿌듯하다.
‘오주당’ 덕분에 중국에서도 임은혜가 많이 알려졌다는 뜻이니까.
“범죄 액션 장르라서 요즘 액션 스쿨 다니고 있다니까요.”
“벌써부터 기대되네. 나중에 꼭 볼게요.”
“제가 시사회 때 초대할게요. 아니지, 크랭크인 들어가면 시간 날 때 촬영장 한번 놀러오세요. 이번 연출 맡으신 총감독님이 ‘오주당’ 진짜 재미있게 봤다고 하더라고요.”
“오, 그래요?”
“네. 미장센 보고 감탄했다던데.”
“하하핫,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제가 진짜로 시간 한 번 내서 놀러 갈게요.”
“꼭 오세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입구 쪽에서 시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이미 연예인이 모여 있는데도 저쪽에서 소란이 날 정도면 주인공은 100% 그 사람이다.
“유나희 왔나 보네.”
임은혜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잠시 후, 인파 사이로 유나희가 도도하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누가 유나희 아니랄까 봐 제일 늦게 온다.
공항 패션이라고 신경을 썼는지, 잠자리 선글라스까지 쓴 채로.
그러나 다른 이유로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실실 웃음이 나왔다.
“나희 씨 오늘 옷 예쁘게 입었네요?”
“네, 뭐…….”
유나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피식피식 미소가 계속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그녀가 입고 온 옷은 하늘색 꽃무늬 원피스.
내가 선물한 옷이었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유나희와 나 외에는 없었다.
나도 외부에 말한 적이 없고, 그녀 또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성격은 아니니까.
역시 저 원피스 잘 골랐단 말이야.
그러한 뿌듯한 생각과 평화도 잠시.
“나희 씨, 덥겠다. 이 더위에 원피스라니.”
안 봐도 뻔하다.
임은혜지.
그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유나희 또한 질 생각이 없는지 방긋 웃으며 받아쳤다.
“아, 저는 몸에 지방이 없어서 여름에도 별로 더위 못 느끼거든요.”
……와우.
오자마자 또 한 판 서로 붙을 기세다.
나는 서둘러 둘 사이에 들어가며 중재시켰다.
“자자, 나희 씨도 왔으니까 바로 출국 수속 밟죠. 들어보니까 상하이에서는 벌써 공항에 팬들이 대기하기 시작했대요. 얼른 가 볼까요?”
* * *
“네. 확인되셨습니다. 들어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출국 수속을 밟고 있는데, 왠지 껌딱지 하나가 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돌아보니 유나희가 바로 뒤에 붙어 서 있었다.
“……뭐 하세요?”
그녀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뭐가요.”
“아까부터 제 뒤만 졸졸 따라오시는 것 같은데.
“같은 방향이니까 가는 거죠. 저도 비행기 타거든요?”
“…….”
뭔가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PD님 바보예요?”
유나희는 나를 째려보고는 휘휘 손짓했다.
“길 막지 말고 얼른 가기나 해요.”
……일단 수속 밟아야 되니 가긴 간다.
그렇게 유나희의 바로 앞에서 한참동안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도 역시나 전세기.
팬 미팅을 주최한 중국 측에서 제공한 비행기다.
몇 번 타 보긴 했지만, 전세기는 탈 때마다 대접받는 느낌이라니까.
흐뭇한 마음으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툭.
유나희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 옆에 있는 의자에 가볍게 던졌다.
“여기 앉으려고요?”
“왜요, 안 돼요?”
“아니, 그냥 묻는 거예요. 왜 화를 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하담.
“PD님 친구 없어서 혼자 앉을까 봐 불쌍해서 앉아 주는 거야.”
그녀는 무심하게 말하고는 들고 온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렸다.
도와줄까 물어보려는 찰나.
털썩.
내 옆에 있는 의자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콰직’ 짧은 파열음.
……설마.
조심히 옆을 돌아보니, 임은혜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유나희를 보고는.
“어머. 여기 나희 씨 자리였구나. 미안. 몰랐네.”
임은혜는 태연한 얼굴로 입을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흘긋 의자에 남겨진 반파된 선글라스를 보고는.
“에고, 선글라스가 부러져 버렸네. 나희 씨 진짜 미안. 내가 이따가 면세점에서 똑같은 걸로 사 줄게.”
순식간에 유나희의 안면 근육이 싸늘하게 굳었다.
……어후.
나 숨도 못 쉬겠는데.
왜 하필 내가 사이에 앉아 있을 때 이러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유나희는 이를 꽉 물더니.
“……싸구려만 사서 모르나 본데, 그거 면세점에서 안 파는 한정판이거든.”
임은혜는 두 손을 모으며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그렇다니까 더 미안하네. 수리비든 새것 살 돈이든 내가 배상해 줄 테니까 연락해.”
그리고는 지그시 눈웃음을 짓고는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우우…….”
유나희는 눈을 감고 호흡을 깊게 내뱉었다.
이거 진짜 화난 거다.
나 왜 여기 앉아 있는 건데.
도망가고 싶어.
그녀는 부러진 선글라스를 집어 들고 자리에 앉았다.
선글라스가 쥐어진 유나희의 손과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살벌하게 눈을 뜨고는.
“PD님.”
“네?”
“저년 머리채 잡아도 돼요?”
……저거 진심이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워워워. 그러지 마요.”
나는 유나희를 타이르며 그녀의 팔을 잡아 내 옆에 앉혔다.
“나희 씨가 참읍시다. 제가 나중에 좋은 선글라스 하나 사 줄게요.”
그녀는 이를 빠드득 갈며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내가 언제 한번 날 잡을 거야. 진짜로 날 잡고 아주…….”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시선을 피해 좌석에 붙은 모니터를 만지작거렸다.
살벌하다, 살벌해.
이거 팬 미팅 스케줄은 잘 소화할 수 있겠지?
그래야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