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235화 (236/601)

235화 하와이에서 생긴 일 (2)

하와이에서의 둘째 날.

조식을 먹을 때부터 스태프와 출연진들의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은 따스하기 그지없었고.

이런 날씨의 하와이에서, 그것도 프라이빗 비치에서 수영하고 놀 생각을 하니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감독님, 감독님.”

조식으로 간단하게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을 접시에 담아 온 임은혜는 내 옆자리에 앉으며 나를 불렀다.

“감독님도 수영복 가져오셨죠?”

“가져오긴 했는데 아마 입진 않을 것 같아요.”

“왜요?”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오늘 안 나가실 거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 맹장 수술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수술 직후에는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은혜 씨는 수영복 가져왔어요?”

“네. 래쉬가드 가져오긴 했는데…… 입을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

“입어야죠. 하와이까지 왔는데 안 놀면 아쉽잖아요.”

“그렇죠?”

“네. 저도 어차피 해변은 나갈 거예요. 파라솔 밑에서 일광욕이라도 해야지.”

임은혜는 반색하며 물었다.

“아, 비치는 나오시는 거예요?”

“그럼요. 하와이까지 왔는데 바다 구경은 해야죠.”

“그러면 저도 래쉬가드 입어야겠어요.”

“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놀아요. 하와이까지 왔는데 물도 안 들어가면 아쉽잖아.”

“음, 그런가?”

“그렇죠.”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먹어요.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네. 이따 봐요!”

* * *

“이야, 장관이다.”

“진짜 감탄사밖에 안 나오네요.”

황이나 PD가 함박 미소를 터뜨리며 내 옆에 섰다.

“바다도 바다인데, 저쪽 한번 보세요. 완전 그림이에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서는 임은혜를 비롯한 ‘오주당’의 출연진들이 모여서 비치발리볼을 하고 있었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그러게요. 이거 메이킹 필름으로 찍어서 큐튜브 올리면 구독자들 반응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이나 씨도 슬슬 일 중독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어휴, 이게 다 선배님 때문이에요. 오는 길에 편집 이야기하니까 일 생각나는 거잖아요.”

“하하하. 미안해. 이번 휴가 때는 좀 쉬자.”

“그래요.”

나는 해변에 설치된 파라솔 그림자 아래 있는 선베드에 앉으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한 명이 없는 것 같은데?”

“아, 유나희 씨가 아직 안 나오셨어요. 여기로 오는 길에 로비에서 봤어요. 곧 나오실 것 같던데요?”

“그래?”

유나희는 워낙 독고다이의 길을 걷는지라, 혹시나 안 나오나 했다.

“이모!”

그때, 뒤에서 꼬마 아이 하나가 와다다 달려와 황이나의 손을 잡았다.

사고로 세상을 뜬 언니 부부를 대신해 황이나 PD가 키우고 있는 조카딸.

회사 측에 양해를 구해 이번 휴가에 특별히 데리고 왔다.

기왕이면 좋은 경험을 시켜 주고 싶었으니까.

“지은아, PD님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내 배꼽까지 오는 키의 아이는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어, 안녕.”

공손하니 귀여운 게 ‘원더우먼이 간다!’에서 보았던 진예은의 딸, 윤샛별 생각이 난다.

“지은이가 몇 살이라고 했지?”

아이는 꼬무락거리며 손가락을 펼쳤다.

“저 아홉 살이요!”

이제 초등학교 2학년.

나는 주섬주섬 뒷주머니에서 손을 넣었다.

지폐 한 장이 손에 잡혔다.

50달러 권.

비상금으로 쓰려고 지갑 대신 가져온 거긴 하다만, 조금 액수가 크긴 한데…….

그렇다고 또 집어넣을 수는 없지.

“이걸로 맛있는 거 사 먹어.”

황이나 PD가 거세게 손을 저었다.

“어우, 아니에요. 선배님 안 주셔도 돼요.”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나는 황이나 PD의 손을 뿌리치고 아이에게 50달러를 쥐여 주었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이가 받아들기 무섭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땐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더 주세요.’ 하는 거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나희가 서 있었다.

태클을 걸려다가 멈칫했다.

의상이 상당히 파격적이었으니까.

비키니.

검은색 T자 밴드 상의에 X자로 스트랩이 교차된 하의.

그 위에는 시스루 느낌을 주는 새하얀 로브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왔어요?”

“네.”

유나희는 무심하게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래지 않아.

“이모. 나 바다 갈래!”

황이나 PD는 조카딸의 손에 끌려 바다 쪽으로 향했다.

그녀들을 포함해 출연진들과 작가들도 대부분 모래사장에서 뛰어놀거나 바다에 들어가는 등 놀기 시작했고.

결국 파라솔 밑에는 나와 유나희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평소와 달리, 왠지 어색한 느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희 씨는 물에 안 들어가요?”

“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바닷물 소금기가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데.”

어.

예상치 못한 대답인데.

“그러면 비키니는 왜 입은 거예요?”

“…….”

그녀는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태닝하려고요.”

“예?”

“거기 오일 있네. 줘 봐요.”

유나희는 무심하게 몸에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나는 햇볕이 잘 비칠 수 있도록 파라솔을 슬쩍 옮겨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나희는 오일을 바르다가 등에 바르지 못하고 낑낑대기 시작했다.

“어휴, 발라 줘요?”

그녀는 짐짓 망설이더니.

“……네.”

나는 오일을 쭉 짜서 등에 부드럽게 바르기 시작했다.

“아…….”

유나희는 단말마의 탄성을 내뱉으며 움찔했다.

“왜요?”

“아니에요. 조금 차가워서.”

유나희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고.

나는 그녀의 등에 덕지덕지 오일을 바른 뒤에야 옆에 있던 내 자리로 돌아왔다.

유나희는 돌아누운 채로 선글라스를 끼고 선베드에 넓게 누웠다.

나는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나희 씨 웬 선탠이에요? 지금까지 태닝한 거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냥요. 하면 안 돼요?”

“안 되는 건 아닌데, 난 나희 씨 지금처럼 하얀 피부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녀는 슬쩍 선글라스를 벗더니 내게 고개를 돌렸다.

“……팬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럴 것 같은데요?”

그녀는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수건으로 오일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게 휘휘 손짓했다.

“왜요?”

유나희는 살짝 발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파라솔이나 다시 당겨 와 봐요. 여기 햇빛 세잖아.”

나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시 파라솔을 끌어왔다.

우리는 그늘에 누운 채로 평화롭게 시간을 보냈다.

다만, 자꾸만 유나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유나희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자꾸 그렇게 힐끔힐끔 봐요?”

“나희 씨 팔 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PD님 변태예요? 왜 남의 몸을 막 봐?”

“아니, 무슨 생각해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마른 것 같아서 걱정되어가지고 봤다는 건데. 팔에 뼈밖에 없잖아요.”

“……아.”

유나희는 괜히 미안했는지, 입을 달싹달싹거린다.

“비키니 잘 어울리긴 해요.”

“당연하죠. 내가 오늘 이거 입으려고 다이어트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콘서트 때문이라면서요.”

“…….”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렸다.

“겸사겸사.”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햄버거 안 먹을래요? 저 너무 배고파서 하나 먹어야겠는데. 저쪽에 작가님들이 사 놓은 거 있어요.”

“아니요. 안 먹을래.”

그래 놓고는 주섬주섬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근데 왜 일어나요?”

“그냥요. 같이 가려고.”

“거기 있어요. 여기 바로 옆이야. 내가 가져올 테니까 하나 먹어요.”

나는 피크닉 바구니에 있던 햄버거 두 개를 집어 왔다.

유나희는 내 손에 들린 햄버거를 보고는 휙 나를 째려봤다.

“안 먹는다니까.”

“제가 두 개 먹을 건데요.”

“……맹장 때문에 못 먹어서 한이 맺혔어요?”

나는 흐흐흐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햄버거 하나를 건넸다.

“너무 말랐어요. 나희 씨는 좀 쪄도 예뻐.”

나는 손수 포장까지 까서 손에 쥐여 주었다.

“아, 진짜.”

유나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햄버거를 보더니.

결국 못 이기는 척 들어올렸다.

“음식 남기면 안 되니까.”

“그럼요, 그럼요.”

유나희는 햄버거를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늘따라 왠지 콩트하는 느낌이라니까.

그렇게 햄버거를 먹고 콜라까지 먹고 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화장실이요.”

“나도 갈래.”

유나희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오늘따라 별나시네. 뭘 그렇게 졸졸 따라오려고 해요?”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유나희는 휙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누가 또 혼자서 아파가지고 쓰러질까 봐 그러지.”

“아, 저 안 쓰러져요. 걱정 마세요. 맹장 같은 경우는 진짜 특이한 거라니까.”

나는 그녀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혀 놓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슬쩍 뒤를 보아하니, 유나희는 흘긋흘긋 내 쪽을 확인했다.

아, 이거 허약한 남자로 찍힌 것 같은데.

나 완전 상남자인데 말이야.

그나저나 오늘따라 왠지 상황이 계속 웃음이 난다.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실실 웃음이 나나 모르겠다니까.

지이잉-.

손을 씻고 나가는데 휴대폰의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한시아.

“네, 강준수입니다.”

-PD님. 저 리조트 거의 다 왔어요. 어디에 계세요?

“아, 저희 거기 뒤쪽 비치에 있어요. 도착하면 전화해요. 데리러 나갈게.”

-아니에요. 저도 비치 가고 싶으니까 수영복 갈아입고 갈게요.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요? 그러면 천천히 와요. 우리도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네. 이따 봐요!

전화를 끊기 무섭게.

“누구 왔대요?”

“어, 깜짝이야.”

어느새 유나희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희 씨 언제 왔어요? 저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나도 화장실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PD님 걱정돼서 온 거 아니거든요?”

“아,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푸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른 다녀와요. 여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뭐야, 변태 같아.”

유나희는 나를 흘겨보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래도 가라는 말은 안 하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적당한 곳에 걸터앉았다.

최근 들어 유나희가 유나희 같으면서도 은근히 유나희 같지가 않다니까.

오래 봐서 그런가?

* * *

“으아아아. 시원하다.”

“저도 물 좀 주세요.”

“서연 씨 이거 먹어요.”

“감독님. 저도 주세요.”

“정우 씨 거기 옆에 열면 있어요.”

“아하, 감사합니다.”

출연진들은 비치발리볼 한 게임을 끝내고 내가 있는 파라솔 근처로 모여 앉았다.

덕분에 나는 괜히 공손해졌다.

초콜릿 복근에 팔 근육까지 불끈불끈한 남자 배우들 사이에 있으니 괜히 움츠러드는 느낌.

일부러 비교되지 않도록 배우들에게 물을 주면서 슬쩍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러자, 박성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감독님 옆에 여자 주연 2명이 앉아 계시네요?”

“어, 그러네. 왼쪽에 은혜 선배, 오른쪽에 나희 선배님.”

정서연도 말을 보탰다.

“거의 드라마 남 주인공급 자리 배치 아니에요? 딱 성현 오빠 포지션인데.”

배정우가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에이, 감독님은 안심해도 돼요. 여자 주인공과는 안 이어져.”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는 방긋 웃으며 나에게만 보이도록 윙크했다.

“그런 게 있어요.”

있긴 뭐가 있어!

없어!

없다고!

“참, PD님 이번에 ‘뉴 패밀리’ 시청률 왕창 올라가고 있다면서요?”

“그 정도는 아니고 한 5% 정도에 안착될 것 같아요. 출연진들 덕분이지.”

“에이, 또 겸손하시긴.”

그때, 옆에 있던 임은혜가 슬쩍 내 팔을 바라보더니.

“어, 감독님.”

내 손목을 쿡 누르며 가리켰다.

“여기 점 생기셨네.”

“점이요?”

“네. 요기.”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예전엔 없었던 것 같은데. 새로 생긴 거 맞죠?”

“……잘 모르겠는데요.”

진짜 모르겠다.

내가 내 팔에 점이 몇 개 있는지까지 신경 쓰고 살진 않았으니까.

“어, 잠깐만요.”

그때, 배정우가 끼어들었다.

“감독님도 모르시는 걸 은혜 씨가 아시는 걸 보면, 설마 은혜 씨…….”

그의 입가에 씨익 입꼬리가 휘어졌다.

“완전 매의 눈 아니에요? 시력 막 2.0인 거 아니야? 관찰력 장난 아니시네.”

임은혜는 능청스레 미소를 지었다.

“아, 제가 눈썰미가 조금 좋거든요.”

박성현도 토크에 합류했다.

“저도 여기 이번에 점 생겼는데.”

“아, 그래요? 몰랐네.”

“이게 또 위치상 복점이라고 해서…….”

그렇게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도중.

“PD니이이임!”

리조트 쪽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배정우는 벌떡 일어나며 눈을 번뜩였다.

“와, 한시아 씨 못 오시는 줄 알았는데 오셨네요?”

그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고.

폴짝폴짝 다가온 한시아는 내 뒤에 멈춰서더니 팔로 내 목을 와락 감싸며 인사했다.

“완전 오랜만이에요! 다들 잘 지내셨죠?”

“시아 씨, 이것 좀 놓고…….”

“너무 보고 싶었어요, 다들!”

다른 출연진들도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칸의 여제 오셨네!”

“여제라니요. 프랑스 가서 내내 구경만 하다 왔어요. 완전 들러리였다니까요?”

“시아 씨 어서 와요.”

“간만에 보니 반갑네. 잘 왔어요.”

“그쵸, 그쵸? 완전 저도 엄청 오고 싶어서 겨우겨우 스케줄 조정해서 왔다니까요!”

한창 인사를 나누는 사이.

문득 내 양 옆에 있던 임은혜와 유나희가 서로를 바라봤다.

왠지 모르지만, 눈빛을 교환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