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드라마의 성적표는 시청률일지라도 (1)
“오늘도 수고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오민중 실장이 뒷좌석을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빠도 고생했어.”
송지연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차에 올랐다.
“출발할까?”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11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
행사로 인해 보름달이 훤히 남쪽 하늘에 뜨고 나서야 오늘의 스케줄이 마무리되었다.
송지연은 피곤한 얼굴로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시야 뒤로 흘러가는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오민중 실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오늘은 집으로 데려다주면 되지?”
“아니.”
송지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스튜디오로 가 줘.”
“스튜디오?”
오민중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되물었다.
“이 시간에 간다고?”
“응. 곡 작업 조금만 하려고. 오빠는 바로 퇴근해도 돼.”
“아니, 내 퇴근이 문제가 아니라…….”
그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러다 쓰러져. 내일 아침부터 스케줄 있는 거 알잖아.”
“오전 11시 시작이잖아. 작업 많이 안 할 거야. 3시쯤에 들어가면 5시간은 잘 수 있어. 9시까지만 샵 도착하면 되잖아?”
“그렇긴 한데…….”
“한창 바쁠 때는 3시간도 자면서 생활했는데, 뭐.”
그녀는 무심하게 말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스튜디오 도착하면 깨워 줘.”
“그래.”
* * *
NKN 스튜디오.
송지연이 소속된 음악 전문 작업실로, 이곳에서는 ‘한겨울’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로 가명으로 부르거나 이곳에서까지 신분을 숨기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어, 지연이 왔어?”
스튜디오의 수장과도 같은 최호연은 송지연을 반갑게 맞이했다.
“커피 한 잔 줄까?”
“있으면 주세요.”
“방금 전에 보이온탑에서 왔다 갔거든. 걔네들이 커피 왕창 사 왔어. 아직 따뜻해.”
최호연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어 송지연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는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자주 오네.”
“네.”
송지연은 늘 그렇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최호연은 근황을 묻듯 자연스레 화두를 꺼냈다.
“만들고 싶은 곡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누구한테 부탁받았다거나.”
“별 거 없어요. 그냥 요새 편곡 아이디어가 잘 떠올라서.”
“그래? 잘됐네. 필요한 건 없고?”
“저번에 보내 주셨던 곡 샘플 외에 더 남는 곡 있어요?”
“있지. 보내 줄까?”
“네.”
“이따가 메일로 보내 둘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이야,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최호연은 순전한 호기심으로 말을 꺼냈다.
“네가 저번부터 대본 들고 다니는 걸 봤거든.”
“아, 이거요?”
송지연은 자신의 핸드백에서 대본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응, 그거.”
최호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너 혹시 배우 준비하니? 아니면, 연기에 관심이 있다거나.”
“아니요. 그냥 재미있어서 보는 거예요.”
“아, 그래?”
“네.”
“혹시나 그런 거면 내가 아는 감독님들 소개 좀 해 주려고 했지.”
“그런 거 아니에요. 연기는 관심 없어요.”
“그러면 됐어.”
그는 싱긋 웃으며 허리를 폈다.
“그나저나 네가 재미있다면 진짜 재미있겠는데? 너 영화나 드라마 자체를 거의 안 보잖아.”
“뭐, 그럴 수도 있고.”
송지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무슨 곡 작업하나?”
“그대로예요. ‘소녀의 난’이요.”
“저번에 작업하던 그 곡?”
“네.”
“요즘 그 곡만 며칠째 잡고 있네. 잘되고 있는 거지? 도와줄 거 있나?”
“아니에요. 완성은 됐는데 그냥 계속 만지고 있는 거예요. 더 나아질 것 같아서.”
최호연은 짧게 감탄을 내뱉었다.
“와, 너 몇 번이고 손보는 타입 아니었잖아. 이번엔 진짜 좋은 곡 나오겠는데?”
“그냥 하는 거예요.”
“나중에 완성 되면 들려줘.”
“네.”
송지연은 커피를 들고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집중 좀 할게요.”
“그래. 파이팅이야.”
“네.”
그녀는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를 마치고 본인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음악 프로그램 툴을 켜는 순간.
송지연의 눈은 여느 때보다도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종로의 낮은 빌딩에 있는 한 사무실.
“CN미디어?”
“네. 이번에 처음으로 개봉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흐음…….”
한국영화협회장은 턱을 매만지며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요즘 따라 정말 개나 소나 다 영화를 하려고 하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간신과도 같은 최 감독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
“강준수 감독…… 아니, 감독이란 말도 아깝습니다. 그 예능이나 만들던 딴따라 녀석이 무슨 예술을 하겠다고……. 예능과 영화는 천지차이인데 말입니다.”
“로테르담 그 자식들도 문제야. 그런 저질 작품을 초청하니까 녀석이 기가 살아서 기고만장해지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천박한 수준의 영화를 무슨…….”
최 감독은 조소를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예능하다가 드라마를 하고, 그러다 갑자기 무슨 멋들어진 계기랍시고 영화로 넘어오고…… 완전 생태계 교란종 아닙니까?”
“강준수 그 자식은 영화의 ‘영’ 자도 모르는 녀석이라니까.”
협회장은 꼰대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영화로 시작해서 처음에 바닥에서 기면서 굶주리고 고생하면서 바닥에서 굴러본 심정을 그 녀석이 알 리가 있겠어?”
“영화 공부도 해 본 적이 없을 겁니다.”
“당연하지. JBC에서 PD로 입사했던 녀석이 이런 험난한 영화 바닥을 어떻게 알겠어? 그렇게 따뜻한 길만 걸어 왔으니 여기저기 발 뻗어보려고 하는 거지.”
“맞습니다.”
“진정한 영화는 고통스럽고 몇 번이나 흔들려야 고난 끝에 탄생하는 법이잖아.”
“그렇죠.”
“다른 영화인들을 위해서라도 막아야 돼.”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대의로 포장했다.
“그래야, 진짜 영화인들이 예술을 할 수 있어. 그 자리는 우리가 지키고 만들어 줘야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초장부터 세게 나가야 방송 PD들이 어쭙잖게 영화계로 진입하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협회장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CN미디어가 대기업이 되어서 감독들을 데리고 횡포부리는 걸 막기 위해서 우리가 나선다. 어때?”
허울 좋은 명목이었다.
실상은 방송 PD들의 영화계 진입을 막고 자신들의 독과점을 위함이었지만, 그들도 포장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으니까.
“좋은 것 같습니다.”
협회장은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옆에 있던 다른 후배 감독을 바라보았다.
“오 감독아. 너는 왜 말이 없어?”
처음부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태훈 감독은 민망하게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저는 강준수 감독 작품을 아예 못 봐서 말하기가 애매해서요. 그나저나 개봉도 안 한 건데 선배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못 봤지.”
“예?”
“보나마나 뻔해. 예능에서 깜짝 카메라나 하고, 추격전이나 하던 녀석이 잘 만들었겠어?”
“……아.”
“보는 시간도 아까워. 시력 나빠진다니까?”
협회장은 비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여하튼 배급사 쪽에 다 연락해. 그쪽 영화 받으면 앞으로 각오해야 될 거라고.”
* * *
분당의 한 작업실.
한창 노트북 타이핑 소리가 울려 퍼지는 실내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대조선의 부흥’의 대본 집필을 맡은 조웅식 작가는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 작가님. 오랜만이야.”
작가의 작업실에 찾아온 인물은 다름 아닌, 이성훈.
그는 손에 묵직한 홍삼을 조웅식 작가에게 건넸다.
“이거 받아.”
“어유, 선배님. 뭐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오는 길에 주웠어.”
그는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배는 무슨 선배야. 배우도 아니고 작가님이 말이야.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하하, 그러면 형이라고 부를게요.”
“그래, 그래. 편하게 해.”
“여기로 앉으시죠.”
조웅식 작가는 손수 뽑은 핸드드립 커피를 이성훈에게 건넸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오신다고 하신 거예요?”
그는 처음 이성훈의 방문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깜짝 놀랐었다.
대본 리딩 후, 회식 자리에서 번호 교환을 하며 한 번 찾아가겠다고 말하긴 했어도, 예의상 해 본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이성훈은 인상 좋은 얼굴로 스윽 작업실을 둘러봤다.
“우리 작가님이 대본 쓰시느라고 고생하시는데, 혹시 내가 도와드릴 게 없나 여쭤보려고 왔지.”
“어유, 아닙니다. CN미디어 측에서 정말 부족한 것 없이 다 챙겨 주거든요. 하다못해 식대도 비용 처리 해 준다고, 법인카드까지 주고 가셨다니까요.”
“오, 그래? 확실히 CN미디어가 복지는 괜찮다니까.”
“맞아요. PD님도 제가 원하는 대로 잘 맞춰 주시고, 일하기 좋은 것 같더라고요. 다음 작품도 할 수만 있다면, 같이 하고 싶다니까요.”
“우리 작가님은 무조건 할 수 있을 거야. 나만 믿어. 내가 흥행시켜 줄게.”
“하하하, 형만 믿고 있겠습니다.”
조웅식 작가는 한창 이성훈과 대화를 하다 보니, 성격 좋은 형처럼 느껴졌다.
배우 중에서 이렇게 직접 작가를 찾아와서 격려해 주는 사람은, 그것도 TOP급 배우 중에서는 손에 꼽을 수 있다고 들었으니까.
이성훈은 짧지 않은 사담 끝에 슬쩍 원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촬영이 벌써 다음 주네.”
“그러게 말이에요. 시간 정말 빠르네요.”
“참, 엊그제 대본 최종 수정본 받았거든.”
“오, 벌써 배부됐습니까?”
“응. 진짜 내용은 좋더라. 재미있어.”
그는 칭찬을 먼저 꺼내며 슬쩍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번에 내가 말했던 게 대본에 반영이 안 되었더라고.”
“아, 그게…….”
조웅식 작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볼을 긁었다.
“말씀해 주신 건 메모해 두고 제가 기존 대본이랑 비교하면서 살펴봤거든요.”
“오, 그랬어?”
“예. 그런데 형이 말씀해 주신 걸 반영하려니까 후반부 이야기가 크게 틀어질 것 같더라고요. 기존 컨셉이 조금 어그러지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수정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거든요.”
“아, 그래?”
이성훈은 심기가 불편한 듯 턱을 매만졌다.
“이게…… 우리 작가님이 입봉 작품이라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드라마를 오래 했잖아.”
“그렇죠.”
“그래서 시청자들 니즈를 잘 안단 말이야.”
“예.”
“드라마라는 게 아무리 신선하다고 해도 그게 전부가 아니란 말이야. 시청자들이 원하는 그림이 또 나와 줘야 시청률이 올라가요.”
“아…….”
“내가 말한 부분 같은 게 일반적으로 시청자들한테 먹히는 부분이거든. 우선 주인공이 센 캐릭터긴 하지만, 여기서 조금 허점이 또 있어줘야 매력이 많아지는 건데…….”
그는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물론, 그 이야기의 방향성은 저번에 자신이 말했던 내용을 대본에 반영해 달라는 것.
하지만 조웅식 작가의 머릿속엔 강준수 PD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들어올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취할 것만 취하고 나머진 버리며 뚝심 있게 본인이 생각한 대로 밀어붙이라고.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연에다가 베테랑 배우인 이성훈이기에. 그것도 본인의 경험담을 들어 말하는 탓에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참의 대화 끝에 조웅식 작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감독님이랑 한 번 더 상의해 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아닙니다. 드라마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더 고민하는 게 맞으니까요.”
“응. 그렇지.”
원하는 이야기를 끝낸 이성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하는데 내가 너무 방해한 것 같네.”
“아닙니다. 더 있다 가셔도 되는데.”
“아니야. 조 작가님 일하셔야지. 나는 가볼게. 나중에 시간 되면 또 놀러 와도 되지?”
“그럼요.”
“그래. 고생해. 갈게. 나오지 말고.”
“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이성훈은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조웅식 작가의 작업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