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드라마의 성적표는 시청률일지라도 (4)
“레디!”
드디어 대망의 크랭크인 날이 찾아왔다.
첫 촬영 장면은 이 드라마의 프롤로그라고 볼 수 있는데, 이성훈이 조선시대로 환생하기 전, 현대사회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드러낸 신이다.
이번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조선의 왕이 될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컷이었으니까.
이성훈의 극 중 현대 역할은 한국사를 전공한 조교수.
부교수 승진을 불과 한 달 남긴 그의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지랄 맞다’였다.
늘 짜증을 내고,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면서 희열을 느끼는 독특한 성격.
또한, 학생들이 간혹 ‘교수님은 자기 과목만 있는 줄 알아.’라고 불평하면, 지나가다가 듣고 ‘응. 알고 내주는 거야. 난 다했거든. 그러니까 박사 땄지.’라며 제 자랑을 해댄다.
그런 배경이 깔려있는 상태에서의 첫 촬영은 바로 도로에서의 신이었다.
“액션!”
나의 신호와 함께 이성훈이 고급 세단에 탄 채 핸들을 잡고 휘파람을 불며 여유롭게 핸들을 잡고 있다.
그때 정면에서 스포츠카 한 대가 칼치기를 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이성훈은 미간을 구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허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스포츠카는 주변의 차량들을 향해 위협운전을 해댔다.
그때, 이성훈의 눈이 미친놈처럼 번뜩였다.
“저런 놈들은 혼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이성훈은 눈에 불을 켠 채 그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옆 차선에 있는 자동차들을 향해 비틀비틀거리며 위협하던 스포츠카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쾅!
아니나 다를까, 스포츠카 차량에서는 양아치 같은 두 남성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뒷목을 잡으며 내렸고.
“아, 이 아저씨가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당장 나와!”
창문을 두드리자, 이성훈은 오래 끌 것 없이 바로 차에서 하차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본 불량배들은 멈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성훈이 입고 있는 스웨터의 위, 정확히 목 부분에는 그의 문신이 드러났고.
온몸은 근육질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185cm에 육박하는 키에 상남자 스타일로 짧게 자른 머리에 두 줄의 스크래치까지.
이성훈은 양아치들을 내려다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왔다. 어쩔래?”
불량배들은 움찔했지만, 차를 믿고 소리쳤다.
“아저씨. 이 차가 얼마인지 알아!”
“어, 알아.”
흘긋 바라보더니.
“풀옵션 넣어야 1억 2천이지?”
“…어?”
“우리 집에 있거든. 보아하니, 풀옵션도 아니라 그렇게 비쌀 것 같지는 않고….”
이성훈은 차량의 파손 부위를 살피고는.
“수리비는 한 2, 3천 정도 나오겠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견적 나오면 연락해. 물어줄 테니까.”
“….”
“그리고 운전 똑바로 해. 다음엔 진짜 쓸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그의 눈빛에 양아치들은 멍하니 이성훈을 바라봤다.
“더 할 말 없지? 간다.”
이성훈은 살벌한 말을 남기고는 차에 올랐다.
그로써 끝난 첫 번째 테이크.
나는 메가폰에 대고 외쳤다.
“컷, 오케이!”
첫 신에 첫 테이크 그리고 단번에 나온 오케이 사인.
연기를 보는 내내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눈빛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그리고 행동까지.
진짜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힌다.
새삼스럽지만, 이성훈이 왜 20년 가까이 톱배우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최근 들어 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커지고 있었지만, 연기를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모두 잊고 순수한 감탄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다음 세트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챙기는 사이, 이성훈은 옷을 훌훌 털며 내게 다가왔다.
“강 PD.”
“예, 형님.”
“괜찮았어? 바로 오케이를 했네.”
“괜찮은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압도적인 느낌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평소의 근육질에서 훨씬 더 벌크 업을 해온지라,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다.
인성은 몰라도, 연기만큼은 끝내준다.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프로페셔널했기에 꼬투리를 잡을 수도 아니, 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좋았습니다.”
“다행이네.”
그는 찡긋 웃으며 돌아섰다.
“다음 신도 한 번에 가볼게.”
“예, 선배님.”
이럴 때만 보면, 진짜 빼놓을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연기도 미친 수준이고.
약한 사람들한테만 조금 따뜻하게 대해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만….
너무 어려운 바람이려나.
***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촬영이 바로 이어졌다.
“바로 가보겠습니다. 레디, 액션!”
부우웅- 끽.
이성훈은 전용 주차장에 깔끔하게 차를 대놓고서는 계단을 올랐다.
청담동에 있는 3층짜리 대저택.
그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다.
재벌 집안의 막내아들.
극중 이성훈의 성격이 그렇게 지랄 맞고 직진만 하는 것도 이러한 집안에서 자란 탓이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어.”
이성훈은 넥타이를 대충 풀어헤치며 말했다.
“차 범퍼가 좀 나갔거든.”
그의 목소리에선 거만함이 넘쳐났다.
“수리 좀 해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 실장. 내가 저번에 말했던 물건은?”
“경매에서 낙찰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오늘자로 물건 전달 받아서 서재 책상에 올려두었습니다.”
“고생했어.”
그는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곧장 서재로 향했다.
이성훈은 역사 덕후였다.
한국사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가만히 있어도 재벌그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그것까지 마다하고 한국사 전공의 교수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드디어….”
서재에 도착한 이성훈은 희번덕거리는 눈빛과 함께 커다란 미소가 지어졌다.
그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물건은 고서였다.
노란 재질의 표지 위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朝鮮王朝實錄 隱]
조선왕조실록 은.
대중에게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숨겨진 버전.
소설이라는 소문도 있고, 조선의 전설을 기록했다는 설도 있으며.
이미 알려진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강제로 수정한 것이고, 이게 진정한 조선에 대한 이야기라는 썰도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화와도 같은 책.
이성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 순간.
파아아앗!
책에서 빛이 새어나오며 이성훈을 집어삼켰다.
“컷, 오케이!”
나는 힘차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적할 게 없다.
실로 완벽한 연기.
어느새 내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지간한 배우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몰입감.
이래서 감독과 시청자들이 이성훈을 찾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앵글에서 한 번 더 가겠습니다.”
“그러자고.”
기존의 카메라가 뒤로 빠지고, 그 모습을 찍는 지미집 카메라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빨려들어가는 순간, 전체적인 컷을 잡아야 했으니까.
“레디, 액션!”
이성훈은 똑같은 연기를 펼치며 서재에 들어왔다.
아까와 똑같이 훌륭한 연기.
잠시 후, 그가 책을 펼치는 순간.
“아이씨.”
이성훈의 입에서 짜증 가득한 소리가 튀어나오며 이내 인상이 구겨졌다.
그의 시선은 한쪽 어딘가로 꽂혀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메가폰을 내려놓으며 이성훈의 시선을 따라갔다.
한 스태프가 조명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
그때, 이성훈이 샤우팅을 내뱉었다.
깜짝 놀란 스태프는 멈칫하며 이성훈을 돌아봤고,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저, 저요?”
“그래, 너 인마!”
이성훈은 허리에 손까지 얹고 소리쳤고.
스태프는 옮기던 장비를 내려두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성훈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리쳤다.
“너 미쳤어?”
“예?”
“촬영 중이잖아. 거기서 뭐하는 건데?”
“아니, 그게 장비를 옮겨야 돼가지고….”
“그걸 왜 지금 하는데?”
“바로 다음 촬영에 써야 되는데….”
“그럼 뒤쪽으로 돌아가야지. 배우 정면에서 지나가면 어떡해? 신경 쓰여서 집중이 안 된다고.”
“아.”
“아는 무슨 아야. 너 때문에 NG났잖아. 어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스태프는 당황한 얼굴로 허리를 접었다.
“너 이 새끼, 똑바로 안 해? 내가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에게 사과해야지. 너 때문에 지금 50여 명이 시간을 날리고 있다고.”
그는 다시금 우리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였다.
이를 지켜보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쓸었다.
잠잠히 넘어가나 했더니만, 촬영 첫 날부터 또.
스태프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저렇게까지 화낼 만한 건은 아닌데….
그나마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겠지만, 이성훈은 한 번 흥분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스타일.
그는 인성공격까지 퍼부었다.
“키도 난쟁이 똥자루만한 게 작아서 안 보일 줄 알지? 알짱거리면 더 거슬려. 더 눈에 띈다고!”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나서려 했지만,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대본 리딩 때의 일이 있었기에 지금 나서면 영 그림이 이상해질 테니까.
다행히도 상황이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걸 느꼈는지, 조명감독이 직접 나섰다.
“이 배우. 미안해. 내가 시켰는데 이 친구가 신입이라 동선을 잘 몰라서 그랬나 봐.”
나이가 지긋한 조명감독이 나서자, 이성훈은 꼬리를 내렸다.
“하아, 네. 알겠습니다.”
“내가 주의시킬게.”
“예.”
조명감독이 혼이 나가 있는 막내 스태프를 데리고 나온 뒤에야 내가 메가폰을 들었다.
“다시 한 번 가보겠습니다, 레디!”
***
“고생하셨습니다!”
무사히 오전 촬영이 마무리 되었다.
오늘의 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고 점심 식사 후, 장소를 옮겨서 나머지 촬영을 이어가야 한다.
다만, 오후 촬영에는 이성훈이 없기에 그는 이곳에서 바로 퇴근.
그가 스태프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나는 조금 전 그에게 혼났던 막내 스태프를 찾아갔다.
“정원씨.”
“네?”
“정원씨 맞죠?”
“예, 맞습니다.”
그의 눈 주위가 새빨갛게 부어있었다.
아무래도 추가 촬영이 진행되는 사이, 혼자 구석에 가서 눈물을 훔친 모양.
나는 슬쩍 그를 데리고 나왔다.
“울었나보네요.”
“아, 그게….”
“괜찮아요, 괜찮아.”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위로를 해주기 시작한 지 얼마 쯤 지났을까.
문득 저 멀리서 이성훈과 그의 매니저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어. 저도 조연출 때 실수 많이 했어요. 엄청 혼났어.”
“정말요?”
“네. 다음부터는 조금만 더 신경 쓰면 돼요. 모르니까 그런 거잖아. 알고 한 거 아니고. 그렇죠?”
“예, 맞아요. 저는 거기서 제가 보이는 줄도 몰랐어요.”
“그러니까 괜찮다는 거예요. 모두가 처음부터 베테랑이었겠어? 다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거잖아요.”
나와 마주보고 있는 스태프는 이성훈을 보지 못하도록 뒤돌아서있다.
괜히 보면 기가 더 죽을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를 이곳으로 데리러온 건 내 고의였다.
구석진 곳이지만, 이성훈의 밴이 있는 주차장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동선.
지난 주, 임성진과의 대화 후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리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고 한들,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서 나온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성훈에게 구박 받고 난 뒤, 내가 조금이나마 친절하게 스태프를 대하고 그들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면, 다른 이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조금이나마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성격 자체가 바뀌는 건 바라지 않았다.
임성진 선배의 말마따나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는 존재니까.
그저 드라마가 종영하기 전까지 조금만 억제되었으면 하는 바람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어떻게 처음부터 완벽해. 그렇지?”
“가, 감사합니다….”
스태프는 울컥했는지, 조금 전의 서러운 감정이 다시금 솟아난 건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괜찮아요. 다음부터 실수 안 하면 돼. 알았죠?”
“네.”
“눈물 닦고 식사하러 갑시다.”
그때, 이성훈이 지나가면서 이쪽을 매섭게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 스태프를 다독였다.
“울지 말고, 뚝.”
나는 이성훈이 들을 수 있도록 슬쩍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괜찮아요. 알았죠?”
“알겠습니다.”
“그래요.”
이성훈은 조용히 시선을 거둔 채 자신의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