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새로운 운명 (3)
“네, 강준수입니다.”
-오, 미스터 강. 잘 지냈어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제임스 카터 감독의 목소리에는 한껏 신이 나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럼요. 제임스 감독님은 잘 지내셨어요?”
-미스터 강 덕분에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제 덕분에요?”
-예. H-Titan 인터뷰에서 언급해 준 덕분에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받아 본 관심을 받고 있어요.
“……그 정도인가요?”
-장난 아니에요. 저 이번에 신작 내는 것도 원래 몇몇 작은 영화관에서만 개봉하려고 했는데, 전국적으로 개봉하기로 했다니까요?
미국 전역에서 개봉하는 건 보통 스케일이 아닌데.
지난번, 유나희에게 살짝 들어서 미국 영화 신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게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던 모양.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정말 이게 전부 미스터 강 덕분이에요.
그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영화 개봉하고 나서 바쁜 일만 마무리되면 바로 한국 가서 직접 만나서 인사할게요.
“하하, 그러실 필요까지야 있나요.”
-아니에요. 제가 미리 전화를 드렸어야 되는데, 미스터 강 전화번호를 잃어버려서 한참 헤매다가 이제야 연락한 게 미안할 수준이거든요. 로버트 통해서 겨우 받았다니까요.
“로버트는 잘 지내요?”
로버트 앤더슨.
제임스 카터와 가장 가까운 배우이면서 내가 H-Titan에서 언급했던 배우.
-제 영화가 관심 받으면서 로버트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중이에요. 해외 촬영차 잠깐 유럽으로 가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돌아오면 체감하지 않을까요?
“정말 잘됐네요.”
-바쁜데 시간 뺏은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러면 제가 정말로 조만간 한국 한 번 찾아갈게요.
“알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제가 한국 관광 한 번 시켜 드릴게요.”
-좋습니다. 아, 참. 미스터 강이 캐서린과 친하다고 했나요?
“캐서린 린튼을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아, 그러면 요즘도 연락 하나요?
“가끔 안부만 주고받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특별한 건 아니고, 최근에 약물 관련해서 찌라시가 돌길래 혹시 뭐 아는 거 있나 해서 물어보려고요.
“아니요. 그런 건 전혀 모릅니다. 이전에 만났을 때도 특별한 건 없었고요.”
-헛소문이었나 보네요. 제가 말한 건 잊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맛있는 점심…… 아니, 거긴 밤이겠네요. 좋은 밤 보내요.
“예. 고맙습니다. 또 봬요.”
전화를 끊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피식 휘어졌다.
제임스 카터가 이렇게 기쁜 티를 낼 정도면…… 진짜 꽤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식당으로 들어가는 대신, 벽에 기대어 휴대폰으로 제임스 카터 감독에 대해 간단히 검색을 시작했다.
한창 찾다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 그림이 상당히 다른데?
이전까지 받던 관심과는 꽤나 다른 구도.
내 기억이 맞다면 제임스 카터는 2027년부터 할리우드의 평론가들과 영화사에서 주목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흥행 감독 반열에 오르게 된다.
즉, 새해가 밝았더라도 여전히 2025년인 지금은 뜨기에 멀었다는 것이지.
허나, 지금 상황을 보면 이번 영화를 통해 제임스 카터 감독이 이름을 알릴 만한 판이 마련되었다.
설마 이게 다 내 인터뷰 때문인 건가?
그저 몇 마디를 말했을 뿐인데…… 그 나비효과가 이렇게나 커진다고?
물론, 제임스 카터 감독이 지금까지 좋은 작품을 만들었던 탓이 있지만, 그 잠깐의 인터뷰 때문에 몇 년이 당겨진다니…….
생각보다 내 파급력이 더 커진 것일지도.
게다가 제임스 카터가 올해 발표하는 영화의 제목은 ‘제국의 눈물.’
그의 많은 영화 중에서도 늘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다.
이 정도 관심을 받은 상황에서 개봉을 한다면, 흥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진짜 대박 나겠는데?”
잘하면 이번 작품을 계기로 곧장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을지도.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해요?”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나왔는지 유나희가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랑 메시지 주고받나?”
“아니요. 뭐 검색 좀 하고 있었어요.”
“뭔데요?”
그녀는 슬쩍 다가와 내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알코올의 향기와 화장품의 향이 섞여 코를 간질였다.
“어, 제임스 카터 감독님 검색하셨네?”
“네. 조금 전에 전화가 와서.”
“……진짜요?”
순식간에 유나희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나간 이유가 제임스 감독님 전화 때문이었어요?”
“예. 무슨 문제라도…….”
“아니, PD님.”
그녀는 눈을 끔뻑거리며 따지듯 물었다.
“둘이 그렇게 친한 사이였어요?”
“인터뷰에서도 친하다고 말했잖아요.”
“아니,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왜요, 나중에 같이 자리 한 번 마련해 줘요?”
“나쁠 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됐어요. 만나 봤자 이야기도 못 하고 쭈뼛거릴 거면서.”
유나희의 미간이 세차게 찌푸려졌다.
“뭐라고요?”
“아니에요? 그때 그랬잖아요. 내 기억엔 아주 선명한데.”
“…….”
그녀의 얼굴이 시무룩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정확히는 시무룩하지만, 아닌 척 연기하는 게 말이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한국 한 번 놀러온다고 했으니까 그때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어요.”
유나희는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진짜죠?”
“싫으면 말고.”
그녀는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니, 제가 좀 바쁜데…… PD님이 정 부끄러워서 혼자 가기 불편하면 같이 가 줄 순 있어요.”
볼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하는 말에 나는 클클대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같이 가요.”
“네.”
“얼른 들어가죠. 밖에 추워요. 외투도 없이 나오면 감기 걸린다.”
“그러게 누가 도망가래.”
“저 보러 나온 거였어요?”
“아닌데요. 바람 쐬러 나온 건데.”
“그럼 바람 쐬고 오세요.”
“싫어요. 좀 춥네.”
유나희는 총총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 * *
덜커덩. 덜커덩.
철커덕. 철커덕.
차단기가 내려간 기차 건널목에서 무궁화호가 느릿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평화롭다.
여유롭고도 평온한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전라남도의 한 작은 시골 마을.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기차여행으로 잠깐 녹차 밭에 들러본 것 이후로는 처음 들르는 전라남도 보성.
내가 제작하는 단막극을 촬영할 만한 장소를 헌팅하기 위해 지방을 돌다가 발견한 지역이었다.
완전한 시골은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도 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트럭 위주긴 하나, 차량도 지나가고 있었고.
물론, 촬영할 때는 어차피 통제를 해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하겠지만, 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진짜 촬영하기 괜찮은데.”
사실, 단막극과 단편영화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꽤나 많은 차이점이 있다.
단편 영화는 25분을 넘어가지 않는 짧은 영화이면서도 감독의 철학을 보여 주어야 하고.
단막극은 1시간 내외로 드라마에 가깝고, 또 철학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감동을 주는 게 목표였으니까.
차를 몰고 보성역에서 조금 더 떨어진 시골로 향했다.
보성읍과 벌교읍 사이에 있는 득량.
돌담길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고, 인적도 드물었다.
단막극에서는 이런 한적한 분위기에서 임은혜와 그 상대 배역이 천천히 돌아다니며 여유롭게 데이트를 하는 그림이 필요했기에 아주 최적화된 느낌.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해 두고 내 발로 직접 마을을 거닐었다.
겨울이라 찬바람이 불긴 했지만, 서울과 달리 남부 지방이라 마냥 춥지만은 않은 날씨.
여유롭게 걷다 보니, 머릿속에선 절로 단막극의 앵글이 그려졌다.
도시와 달리, 지방지청에서는 촬영 협조도 훨씬 더 쉽고.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게도 양해를 구하는 게 더 간단하기에 촬영하기엔 아주 딱이었다.
지방이기에 숙소가 조금 문제긴 하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펜션이 있다고 들었으니 그곳을 통째로 빌리면 괜찮을 터.
이 정도면 촬영하는 동안, 휴양 온 느낌도 나고 괜찮겠는데?
“정말 좋은데…….”
어지간해서는 혼잣말을 하지 않는 나인데도, 연신 좋다는 말이 새어나올 정도니, 더 말하기는 입 아플 정도.
나는 길의 중간에 서서 단막극 대본을 펼쳐 다시금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임은혜가 이 길을 걷고.
맞은편에서 남자 배우가 반갑게 웃으며 걸어오고.
나란히 손을 잡고 걷는 모습까지.
그림은 아주 완벽한데, 문제는 남자 배역.
단막극이기에 간단한 보조 출연들은 비중이 많지 않은 만큼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촬영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할 남자 배우.
얼굴이 나오는 장면은 단 한 컷밖에 없지만, 그래도 목소리나 손짓 등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만큼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다만, 그런 인물들은 이렇게 얼굴이 나오지 않는 촬영을 선호하지 않기에 섭외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괜찮은 배우가 어디 없으려나…….
아쉬움에 턱을 매만지면서 다시금 대본을 가방에 넣었다.
그렇게 한창 고심하면서 돌담길을 걷고 있던 그때.
“아버지!”
저 멀리서 중저음의 부드러운 톤을 가진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내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
다만, 어디선가 조금 익숙한 느낌인데.
나는 홀린 듯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이고, 아버지. 그거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되는데.”
“아따, 이거 뭐 다 비슷한 거 아니냐잉?”
표준어를 구사하는 아들과 달리,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아버지.
그렇게 도착한 파란 대문 앞.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아들의 목소리가 낯이 익다.
“그러면 내가 철물점 다시 다녀올게.”
“그럴래?”
“어, 금방 갔다 올게. 뭐 필요한 거 있나?”
“없어. 어여 다녀와.”
“응.”
친숙하게 대화를 나눈 뒤, 끼이익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곧장 문 앞에 있던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잡아야 된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외쳤다.
“저기요!”
“네?”
내가 있는 줄도 몰랐는지 남자는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았다.
“저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놀란 표정이 이해가 된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얼굴의 절반이 흉측한 흉터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화상 자국인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느낌.
내 놀란 모습이 달갑지 않은지, 그는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니, 그게…….”
잠깐만.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몇 번 눈을 끔뻑이기도 잠시.
문득 머릿속에 한 명의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최철우 씨 아니세요?”
그는 짙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기자십니까?”
“아니요.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는데 맞으신 것 같아서…….”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금 물었다.
“최철우 씨 맞으신가요?”
“맞는데…….”
그는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알아보시네요.”
알다마다.
최고의 주가를 달리다가, 불의의 사고로 연예계를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2010년대 비운의 배우라고 꼽히는 인물 중 하나이자.
극강의 미친 연기력을 가졌다는 최철우를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