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소용돌이치는 삶에서도 (5)
상황을 말하지 않아도 태조한은 이미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을 터.
촬영 시작 직전부터 그의 매니저가 한 시도 휴대폰을 놓지 않고 있었으니까.
분명 메신저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의 방문이 열리자마자 스태프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태조한의 표정은 오묘했다.
화를 낼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합류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점점 흐르다 보니, 결정을 하지 못한 채 똥줄이 타서 우선 나온 모양.
그래. 지가 별 수 있겠어?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지려던 찰나.
“아, 선배님!”
개그우먼 김연정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또 잠드셨죠?!”
“어?”
“촬영 때도 틈만 나면 맨날 주무신다니까. 얼른 와요!”
아까 휴게소에서도 상황을 잘 받아치더니만, 역시 개그우먼답게 머리 회전이 장난이 아니다.
“안 오실 거예요? 아직 잠 덜 깨신 건가?”
“아, 가야지.”
태조한은 못 이긴 척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코너야?”
“에헤이, 또 설명해 드려야겠네.”
송석환이 능청스레 바통을 받았다.
“새로운 게임인데, 상식 퀴즈와 상황극을 믹스해가지고…….”
* * *
그렇게 저녁 미션으로 차등 식사가 지급되었다.
“잘 먹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촬영을 마무리할 즈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그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어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두 남자가 펜션에 등장했다.
미리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스태프들은 씨익 미소를 지었고.
“아니, 대박.”
“헐, 선배님!”
“안녕하세요!”
출연진들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남자 중 하나는 바로 황정무.
연예계의 선배 중에서도 대선배였으니까.
“어떻게 오신 거예요?”
송석환의 물음에 황정무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되물었다.
“우리 몰래 온 손님인데…… 들어가도 되나?”
“아, 정말요? 당연히 오셔도 되죠!”
그는 코를 찡긋하며 손님들을 안내했고.
나는 허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미션도 끝났고 진짜 회식 시작해 볼까요?”
“오, 대박.”
“저도 밥 먹을 수 있어요?”
주예나는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라면 하나밖에 안 먹어서 완전 배고팠는데.”
“회식은 다 같이 해야죠.”
“오예!”
순식간에 회식판이 벌어졌다.
스태프들이 회식 자리를 마련하는 사이, 황정무는 자연스레 출연진들과 인사를 나눴다.
“석환이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기는 알지? 빅핸드라고…….”
“아, 당연히 알죠.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 ‘양푼 한 바가지’ 진짜 좋아했어요.”
“어, 반가워. 그 노래를 아는 친구가 있네?”
“그럼요. 제가 예전부터 랩에 대해서…….”
그와 같이 온 인물은 ‘빅핸드’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1세대 래퍼로 가요계에 시조새 같은 인물.
당연한 말이지만, 태조한보다도 훨씬 더 선배다.
“그나저나 선배님.”
그때 송석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몰래 온 손님이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는데.”
“그게 그러니까…….”
황정무는 웃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말해도 되지?”
“그럼요.”
“실은 내가 말이야…….”
* * *
긴급회의 직후, 태조한을 제외하고 촬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을 무렵.
내 휴대폰에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발신인은 바로 황정무.
상황이 급박했기에 받기 곤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황정무의 전화를 거절할 수는 없었기에 서둘러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네, 강준수입니다.”
-어, 강 PD. 바빠?
“촬영 준비 중입니다.”
-아직 안 끝났나 보네?
“예. 1박 2일 촬영이라서요.
-아, 그래? 어유, 내가 방해했네.
“아닙니다. 통화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특별한 건 아니고, 오늘 촬영이 조금 일찍 마무리됐는데 마침 오늘 집사람이 친정 갔거든. 오랜만에 강 PD 얼굴도 봤는데 근처에 있으면 같이 술 한잔하려고 했지.
“아이고, 저도 선생님이랑 술 한잔하고 싶은데, 아쉽네요. 제가 지금 충청도에 내려와 있어서요.”
-충청도?
그는 오늘따라 정말 일찍 들어가기 싫은지.
-마침 내가 내일 스케줄이 대전에서 있거든. 어차피 가긴 해야 되는데…… 아이, 그래도 강 PD 촬영하는데 민폐겠지?
황정무의 부탁이라면 들어주고 싶지만, 촬영도 촬영이고, 오늘은 영 상황이 상황인지라 쉽게 수락할 수가 없었다.
“아, 그게…….”
-에이, 아니야.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네.
그때, 휴대폰 너머로 누군가가 황정무에게 다가와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빅핸드입니다. 오늘 촬영 고생하셨습니다. 저 내일 스케줄도 없는데 술 한 잔 같이 가볍게…… 아이고, 통화 중이셨구나. 잠깐 기다리겠습니다.
빅핸드?
순간,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아, 강 PD. 괜찮아. 내가 술친구를 찾은 것 같…….
“선생님.”
나는 다급하게 그에게 말했다.
“저도 오늘 진득하게 말씀을 좀 나누고 싶은데…… 오늘 어차피 또 촬영 콘셉트 때문에 회식해야 되거든요? 어차피 내려오셔야 되면 여기 몰래 온 손님으로 잠깐 오시겠어요?”
-몰래 온 손님?
“예. 여기 개그우먼 김연정 씨도 계시는데, 제가 알기로는 김연정 씨랑 또 친분이 있으시다고 들어서.”
-아, 연정이랑 친하지. 그 친구 코미디 극단 할 때 내가 조금 도와줬거든.
“오셔서 같이 한잔하시죠. 말이 촬영 회식이지, 편하게 술 한잔하시면 되거든요?”
-아이, 그런데 옆에 지금 ‘빅핸드’라는 친구가 와 가지고…….
“같이 오시죠.”
-같이?
“네. 원래 술자리는 사람이 많아야 즐거운 거 아니겠습니까?”
능청을 떨었다.
“오시면 제가 안주는 기가 막히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여기가 내륙인데 또 대게 찜이 유명하거든요. 게다가 뜨끈한 온천수도 있고요.”
-아, 충청도에 온천이 있어?
“이 펜션이 또 유성인가 그쪽에서 좋은 물을 끌어와서 인조 온천을 꾸며 놨더라고요.”
휴대폰 너머로 그가 빅핸드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전해져왔고.
오래지 않아.
-어디야, 주소 찍어 봐. 금방 갈 테니까.
“선배님. 바로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 * *
“감독님도 한잔하시죠!”
“방금 마셨습니다.”
우리는 거창하게 회식을 즐겼다.
원래 준비한 건 적었지만, 황정무를 불러오기 위해 급하게 시내로 가서 대게 찜까지 공수해 온 덕분.
회식에는 나뿐만 아니라, 출연진들도 함께했다.
당연히 태조한도 동석한 상태.
그렇다고 술 한잔하면서 풀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서로 멀찍이 앉아서 각자의 주변 사람들과 떠드는 정도?
당연한 말이지만, 태조한은 아까처럼 난동을 피우거나 진상을 떨진 않았다.
그것을 위해서 황정무를 부른 것이니까.
그를 여기까지 모신 이유는 두 가지.
워낙 연예계 대선배인 만큼, 태조한이 날뛰지 못하게 묶어 놓기 위함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건 그와 함께 온 인물.
“저 잠깐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빅핸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슬쩍 그를 따라 베란다로 나왔다.
“강 PD님도 담배 피우세요?”
“아닙니다. 바람 좀 쐬려고요.”
“어, 그러면 담배 연기 날 텐데.”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바람 저쪽에서 부네.”
“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그를 보며 친근하게 말했다.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그러면?”
“예. 그게 저도 좋습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빅핸드.
요새 방송계에서 핫한 인물이냐고 물으면, 아쉽게도 아니었다.
그러나 꾸준히 게스트로 출연을 하며 연예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인물.
특이사항이 있다면.
‘빅핸드’라는 예명에 맞게 손이 굉장히 크다.
게다가 나보다도 키가 훨씬 크다.
195cm 정도 되려나?
그리고 덩치도 훌륭하다.
내가 듣기로는 140kg 정도 된다고 들었지, 아마.
그러나 그것들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사항은 바로.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
그 탓에 2000년대 초반엔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등 방송계에서 얼굴을 보이지 못했으나.
200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 인식이 완화되며 다시금 출연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빅핸드에게 가지는 편견은 없었다.
나와 성향이 다르지만, 말 그대로 다른 거지 틀린 건 아니니까.
취향은 존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빅핸드를 여기까지 초청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커밍아웃한 몇 안 되는 연예인으로서 자신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 힘을 쓰고 있다.
특히나 같은 성별이라고 더 쉽게 생각한다는 잘못된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
태조한처럼 삐뚤어진 인간들 몇몇 때문에 오히려 인식이 더 나빠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참, 선배님.”
“어, 강 PD.”
“하나 말씀드려도 될까요?”
“편하게 말해 봐.”
“그게 말입니다…….”
나는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태조한 씨가 빅핸드 선배님이랑 비슷한 취향인 건 알고 계시나 해서요.”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예. 방송에서 오픈된 건 아니어서 말씀드릴지 말지 한참 고민을 했는데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조금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실은 오늘 낮에 유한빛 씨와…….”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점점 표정이 굳더니,
“하아아…….”
빅핸드는 실내에 있는 태조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에서도 그 시선이 느껴졌는지 태조한은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영문을 알지 못하는 그는 빅핸드를 향해 반갑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제가 좋게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한빛 씨는 제가 아끼는 동생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들이받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내가 한 번 고쳐 볼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인들 중에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가만히 냅두면 색안경 쓴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야.”
“죄송합니다. 궂은 일 부탁드려서.”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강 PD는 나한테 하소연한 것뿐이야. 그렇지?”
내가 불편할까 봐 배려해 주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강 PD.”
문득 흥미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강 PD는 어떻게 그리 잘 알아? 혹시 강 PD도…….”
“어유, 아닙니다.”
나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저는 좋아하는 여자친구 있어요.”
“아, 그래?”
“네. 제 대학 후배 중 하나가 동성을 좋아한다고 고민 상담했었거든요. 그래서 잘 아는 겁니다.”
“그렇구먼.”
……아쉬워하는 눈빛이다.
큰일날 뻔했네.
“여하튼 알았어.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래. 강 PD한테 들었다는 이야기는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는 인상 좋게 웃으며 담뱃불을 껐다.
“들어갈까?”
“예.”
실내로 들어가자, 어느새 술병을 모으고 있었다.
“오셨어요? 저희 이제 슬슬 자리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벌써?”
빅핸드는 아쉬운 눈빛으로 태조한을 슬쩍 바라보더니.
“조한이는 나랑 한 잔 더 할까?”
“……예?”
태조한은 눈을 꿈뻑이며 말했다.
“아, 저 내일 오전부터 촬영도 있고…….”
“어허. 선배가 술 한잔하자는데 거절해?”
역시 꼰대의 적은 꼰대.
나도 슬쩍 그를 부추겼다.
“에이, 내일 기상 미션 제외해 드릴게요.”
“……응?”
그는 탐탁지 않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저쪽 구석방에서 쪼그린 채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는 유한빛을 보니, 약해지려던 마음이 다시 강해졌다.
“밤새 실컷 드십시오. 거실은 불편하니까 저쪽에 큰 방에서 드시겠어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어유, 아닙니다. 선배님인데요.”
나는 코를 찡긋하며 안주와 술병이 놓여 있는 상을 직접 들어 방으로 옮겨주었다.
“들어가시죠.”
“그럴까?”
빅핸드는 능청스레 태조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남자끼리 진하게 한잔하자고.”
“……예, 선배님.”
“어유, 얼굴이 왜 이렇게 푸석푸석해? 요즘 고생 많이 하나 보네.”
“아니, 그게 아니고…….”
“어유, 볼 봐 봐.”
빅핸드는 어깨에 두른 팔로 태조한의 볼을 만졌다.
“내가 로션이라도 사 줘?”
“아닙니다, 선배님. 그나저나 이 팔 좀…….”
“왜, 무거워?”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그러면 이렇게 있자고.”
그들이 방에 들어가자, 나는 슬쩍 방 문을 닫으며 말했다.
“술 모자라시면 냉장고에 준비해 뒀으니 편하게 가져가시면 됩니다.”
“어, 강 PD 들어가서 자.”
“쉬세요.”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방문을 꽉 닫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