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강을 넘어서 바다로 나아가면 (4)
“강준수 사단 작가들이나 PD들은 못 데리고 가.”
황현묵 대표이사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가려거든 혼자 가도록 해.”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대표님.”
그러나 흥분하지 않고 최대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작가들 및 PD들, 사표 쓰고 나가는 겁니다. 실업 급여를 신청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퇴사해서 나가는 걸 어떻게 막으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갈 수 있겠어?”
그는 엉큼하게 입꼬리를 휘며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강준수 사단에서 제작하는 TV 예능이 3개. 그 외에 황이나 PD가 준비하는 드라마까지 하나. 전부 못 들고 가는데?”
“TV 예능의 경우 저작권은 제작사가 아니라, 방송사에 있잖습니까?”
드라마는 아직 저작권에 대해 협의가 되지 않았기에 예외.
“그쪽에서 저희를 원할 겁니다.”
“과연 그럴까?”
황현묵 대표이사는 음흉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네 TV 예능 3개 중에 2개가 CBN 방영인 건 알고 말하는 거지?”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CBN 채널은 CN엔터테인먼트가 소유하고 있다.
CN미디어 또한 CN엔터의 계열사 중 하나.
다시 말해 방송사에서는 CN미디어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든 지킬지라도, 세 개 중에 가장 시청률이 좋은 ‘뉴 패밀리’가 CBN인 걸 생각하면 엄청난 타격임은 분명했다.
“황 PD가 제작하는 드라마도 쉽지 않아질걸?”
“…….”
CN미디어 또한 방송계에서는 입김이 작지 않다.
이곳에서 작정하고 발목을 잡으면 준비 과정에서 엎어질 가능성은 적지 않을 터.
“그리고 큐튜브 채널은 당연히 못 가져가는 거 알지?”
테이블 밑으로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런 양아치 새끼.
큐튜브 채널의 프로그램 중 지금도 ‘놀자판’은 내가 직접 제작하고 있고.
그 외에 추가로 4개를 내 후배들이 제작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채널명은 ‘강준수 사단’이지만, 큐튜브 예능의 계정은 ‘주식회사 CN미디어’ 소유라는 사실.
TV 예능은 어찌 저찌 지한그룹을 통해 이야기를 해 볼 수는 있더라도, 큐튜브는 아예 이야기가 다르다.
회사 자체가 미국에 있는 만큼, 이런 자잘한 분쟁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을 테니까.
다시 말해 명의가 그쪽이기에 우리는 손 쓸 수도 없이 채널을 고스란히 뺏겨야 한다는 소리다.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강 PD.”
그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저 하나 없다고 CN미디어가 흔들리진 않잖습니까?”
“어 팀장이 몇 번이고 똑같은 이야기하더라. 둘이 친한 건 알았는데, 이번 일 보고 형제인 줄 알았다니까.”
어윤중 팀장이 설득했는데도 먹히지 않은 모양.
황현묵 이사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조소를 지었다.
“강 PD만 조용히 나가. 그러면 다른 PD들 프로그램은 건들지 않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다른 직원들 잡아 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과연 그럴까?”
그는 눈썹을 들썩였다.
“그 프로그램들 싹 날아가고 TV 예능 딱 하나 남으면 지한그룹에서 잘도 받아주겠지? 그 전에 다른 직원들이 간다고 할까? 커리어 중간에 싹 끊기는 건데.”
“…….”
“잘 생각해 봐, 강 PD. 나도 이런 식으로 자네랑 부딪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손을 휘휘 저었다.
“가 봐.”
나는 이를 악물고 대표 이사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기운이 탁 풀렸다.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아무래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은데.
대한민국 방송계가 워낙 기형적인 구조인 만큼, CN미디어에서 작정하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면, 얼마든지 개싸움이 될 수 있는 구도였으니까.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어윤중 팀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왔냐?”
“기다리셨어요?”
그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자판기를 향해 턱짓했다.
“커피나 한잔하자.”
“예.”
* * *
“미안하다.”
어윤중 팀장은 밀크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꺼내들며 다른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어떻게 잘 이야기해 본다고 했는데, 오히려 화를 돋운 것 같더라고요.”
“아닙니다. 팀장님이 말해도 안 되는 거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뭐라고 하든? 아예 안 놔준다디?”
“예. CBN에서 방영중인 예능은 CN미디어 내의 다른 팀에서 제작을 이어받을 거라고 하고, 황 PD가 준비하는 드라마는 투자처라도 찾아가서 방해할 생각인가 봐요.”
“어휴. 좋을 땐 잘 챙겨주는가 싶더니, 돌아서면 이렇게 사람이 이렇게 나쁜지 모르겠어.”
그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황현묵 대표, 내 상사지만 개X끼라니까.”
듣기 드문 그의 욕설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면 예능은 그렇다 치고…… 큐튜브 채널은?”
“그것도 아예 압수해 간답니다.”
“아이고…….”
그는 한숨을 팍 내쉬었다.
“처음 만들 때 이름 걸고 제작하는 채널이라길래 퇴사하면 떼어주는 줄 알았더니만…….”
“정산 구조 때문에 회사 법인 명의로 개설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아쉽네요.”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려고?”
어윤중 팀장은 화들짝 놀라며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걸 어떻게 놓쳐? 구독자만 무려 450만 명이야. 안 돼.”
“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딱! 손가락을 퉁겼다.
“이건 어때?”
“좋은 수라도 생각나셨어요?”
“어차피 퇴사 전까지 채널 업로드 권한은 너한테 있잖아. 기왕 나가게 된 거, 채널 분리한다고 미리 홍보해서 네 신규 채널 구독자 수 채워놓는 거지.”
나쁘지 않다.
큐튜브 채널의 특성상 구독자들이 한 번 대거로 넘어오면 나머지 인원들도 알고리즘으로 데려올 수 있으니까.
“게다가 출연진들도 제작진 빠지면 대부분 나온다고 할 거야. 그때 비슷한 포맷으로 살짝 바꿔서 신규 프로그램 제작하면 데려올 수 있잖아. 그러면 큐튜브 시청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네 쪽이 오리지널리티로 보일 테니까. 그쪽은 오히려 비슷한 프로그램에 더 관대하잖아.”
“……그러네요?”
생각보다 답이 더 쉽게 나왔다.
TV방송이 아니라, 오히려 큐튜브이기에 가능한 방법.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다른 직원들한테 폐가 되지 않을까요?”
“강준수 사단 직원들은 다 나오기로 했다며?”
“혹시 모르죠.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그러면 서둘러 이야기해 봐. 내가 보기엔 아무리 그래도 지한그룹에서 조건을 바꾸진 않을 테니, 변함없이 너 따라간다고 할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팀장님이 한 번 만나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작가들을?”
“예.”
나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전부 데리고 나가고 싶지만, 이런 상황이 되었으면 다른 직원들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괜히 제 눈치 보고 원하는 대로 말하지 못할까 싶어서요.”
“허허.”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남 생각까지 하냐?”
“후배 PD들, 작가님들 전부 저 하나 믿고 따라왔는데 제가 끝까지 책임져야죠.”
“알았다.”
어윤중 팀장은 못 이긴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면담은 내가 한 명씩 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부탁드릴게요.”
“내일까지 전부 종합해 볼 테니까 너도 빠르게 결정해.”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그는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얼른 가 봐. 바쁠 텐데. 넌 나머지 TV 예능 어떻게 가져올지 방법 구상해야지.”
“네, 팀장님.”
나는 그를 뒤로하고 회사 밖으로 향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분명 대표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다니.
어윤중 팀장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보통 대인배가 아니라니까.
회사를 나가더라도 평생 연락하며 보답해야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음도 일단은 접어두고.
우선은 지한그룹부터 만나봐야 한다.
* * *
“그렇게 된다고 한들, 저희 쪽의 조건은 변함없습니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한예린 팀장은 고민도 없이 흔쾌하게 말했다.
방영중인 프로그램을 가져오든, 가져오지 못하든.
지한그룹에서는 처음 내걸었던 조건을 그대로 주겠다고 했다.
단순히 나뿐만이 아니라, 강준수 사단 작가 및 PD들까지 전부.
“기존 방영 중인 프로그램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저희는 그로 인한 수익보다는 앞으로의 포텐션을 기대해서 강 PD님을 포함해 강준수 사단을 모셔오려고 한 것이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입니다.”
그녀는 코를 찡긋하며 덧붙였다.
“강준수 PD님만 모셔올 수 있다면,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죠.”
과분할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날 좋게 봐 준다는 게 감사할 따름.
“그나저나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한예린 팀장은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CN미디어와 관계가 좋으신 걸로 생각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들어올 때와 나갈 땐 확실히 다르네요.”
“회사라는 게 그렇죠.”
그녀는 씁쓰레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면, 제가 방송사 측과 한 번 만나 볼까요?”
“그런다고 해답이 나올까요? 같은 CBN과 CN미디어 모두 CN엔터테인먼트 소속이라서…….”
한예린 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같은 계열사라고는 해도 독립된 법인이라서 이익 구조는 조금 다를 거예요. 무엇보다 CBN에서는 강준수 사단에서 그대로 제작하는 게 시청률에도 훨씬 더 좋을 테니…… 손에 무언가 조금 쥐여 주면 다를 것 같긴 한데.”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광고 몇 개 밀어넣어 주면 조금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광고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긴 하다.
CN미디어의 다른 팀에서 프로그램을 이어받으면 시청률은 물론이고 존폐 여부마저 확신할 수 없지만.
강준수 사단에서 그대로 제작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애초에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되지.
게다가 광고비 명목 하에 직접적으로 돈을 받으니, CN미디어의 말을 듣지 않을 명목이 생기는 법이니까.
사실,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광고비 자체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기에 이걸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예린 팀장이 오래 고민도 않고 이런 제안을 할 줄이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한그룹이 이쪽에 투자하려는 돈이 더 많은 건가?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어려울 건 없을 것 같습니다. 한번 이야기해 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희 쪽과 계약하시는 건 확정되었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예. 저는 다음 달 말에 넘어가고, 다른 직원들은 아직 확정이 되지 않아서……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급한 건 아니니 다 마무리하고 넘어오셔도 됩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나는 흘긋 시계를 보며 말했다.
“3시에 회의 들어가셔야 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벌써 10분이나 지났다.
“아…….”
그녀 또한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죄송하지만 가보겠습니다. 이게 또 중요한 회의라…….”
“갑자기 찾아왔는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나가시는 길은…….”
“알아요. 얼른 가 보세요.”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전에 연락도 못 하고 찾아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성과를 얻은 것 같다.
이렇게 되면 CN미디어에서 조금 횡포를 부리더라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번 투자의 규모.
아무리 기획조정실장이라도 간단하게 결정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닌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졌다.
지한그룹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만한 사람이…….
지이잉-.
마침 유나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강준수입니다.”
-바빠요?
“아니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잠깐 여의도 온 김에 연락했어요.
“저 잠깐 종로에 왔는데.”
-아, 그래요? 그럼 됐어요.
“잠깐만요.”
전화를 끊으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저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말해요.
“나희 씨가 몇 년 째 지한전자에서 에어컨 모델 하니까 그래도 회사에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아서.”
-뜸들이지 말고 본론이요.
“지한그룹 한예린 팀장에 대해서 좀 알고 있어요? 들어보니, 지한그룹 광고 모델 포함해 모든 투자 쪽을 총괄하는 것 같던데.”
-알죠. 투자 쪽 완전 실권 잡고 있는 분이잖아요. 저 CF도 이분이 픽해서 들어간 거예요.
“나이도 어린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혹시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해서.”
유나희는 태연스레 되물었다.
-PD님 몰랐어요?
“네?”
-한예린 팀장, 지한그룹 회장 외동딸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