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출이반이 (4)
“정말 특별한 건 없었어요. 아버지는 주로 일을 하셨고, 어머니와의 기억이 대부분인데…….”
한예린 팀장은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일단 그전에 제가 초등학교 다녔던 시절부터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편한 대로 해 주세요.”
“어릴 땐 어머니께서는 주로 집에 계시거나 비슷한 재계 사람들과의 행사에 다니셨고 제가 외출할 땐 아주머니랑 다녔어요.”
“보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학교 데려다주시거나 외출할 때는 대부분 아주머니랑 다녔어요.”
그건 예상과 조금 다르긴 하다.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한예린 팀장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보디가드 같은 경호원 상상했죠? 수트 쫙 빼입고.”
“아하핫, 맞아요.”
“아주 옛날에는 그렇게 다녔다고 하는데, 요즘은 그러면 오히려 위화감 들어서 더 위험하거든요.”
“그렇겠네요.”
특히 어렸을 때라면 더욱 더 그렇겠지.
“어렸을 때는 아주머니랑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중학생 때부터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지금의 가치관 정립은 거의 엄마 덕분이었으니까.”
“부모님과의 대화나 사건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음, 어머니는 주로 남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남자친구요?”
“네. 다른 건 다 지원해줄 수 있으니, 정말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라. 조건 같은 건 볼 필요 없다. 정략결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에 대한 직접 겪은 이야기도 들려주셨고요.”
그녀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편하게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나 학업, 취미 관련된 건 아예 터치하지 않으셨거든요. 집안 분위기 때문에 공부야 당연한 거였고, 취미 같은 건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었으니까.”
나 같은 서민들과 비슷하면서도 역시 조금 다르긴 하다.
“그래서 저랑 비슷한 사정의 남자친구를 몇 번 사귀어보긴 했어요.”
“재벌 모임 같은 곳에서 만난 건가요?”
“재벌 모임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들이 가까우니 친구하면서 지내는 거죠.”
한예린 팀장은 화단 옆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부 가볍게 데이트만 해봤지, 진지한 관계는 없었어요. 날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하긴, 본인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만 골라서 만날 능력이 될 테니 굳이 아무나 만날 필요는 없었겠지.
“그리고 제가 머리가 큰 이후로는 좋은 남자를 찾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조금 특별한 거라면, 제가 막 성인이 되었을 때 콘돔을 챙겨주신 것 정도?”
푸학-!
당황해서 마시고 있던 커피를 나도 모르게 내뿜었다.
“놀라긴 뭘 놀라요.”
한예린 팀장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애도 아니고, 우리 나이가 몇 인데.”
“그렇긴 한데…….”
“여하튼 그렇더라도 진지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쓸 일은 없었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외에는 대부분 후계 구도와 관련된 일이었는데…… 이건 안 듣고 싶죠?”
“그건 괜찮아요.”
“시나리오랑은 별로 관련이 없을 것 같아서 안 궁금해 하실 것 같았어요.”
“궁금하긴 해요.”
“……네?”
“시나리오 외에 인간으로서의 한 팀장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긴 하거든요.”
순간, 한예린 팀장의 눈에 놀란 기운이 서렸다.
“하지만 오늘은 퇴근시간이니까 여기까지만 들을게요.”
“아…….”
그녀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듣는 것도 업무인가요?”
“아니요. 방금까지 말한 게 업무고, 이다음 이야기가 사담이죠. 근데 오늘은 제가 끝나고 볼일이 있어서.”
내 말에 한예린 팀장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다음에 소주 한잔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그래요. 그때는 감독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그럴게요.”
“차 가져오셨어요?”
“네. 저쪽 C동 주차장에 뒀어요.”
“여기 가로질러 가면 지름길이에요. 조심히 들어가요.”
“감사합니다. 또 뵈어요.”
그녀와 눈인사를 나누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한예린 팀장의 라이프 스타일이 어땠는지에 대해 조금은 엿본 듯한 기분이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 같다니까.
뭔가 재벌 같지만, 또 재벌 같지가 않아.
안전벨트를 매고 출발하려는 찰나.
지이잉.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임은혜.
굉장히 오랜만에 연락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 회사 옮긴 것 때문인가?
크흠.
목을 가다듬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강준수입니다.”
-감독님…….
휴대폰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직감이 들었다.
“은혜 씨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어디예요?”
-집에 혼자 있는데……. 흐끅.
훌쩍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모양.
나는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지금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 * *
“괜찮아요?”
“……죄송해요.”
내가 도착했을 즈음엔 다행히 임은혜는 어느 정도 진정된 상태였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임은혜는 따끈한 홍차 한 잔을 내왔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것저것 안 좋은 일이 겹치는 바람에 감정 제어가 안 되었던 것 같아요.”
“천천히 말해 봐요.”
“저 영화 찍고 있던 거 아시죠?”
“네. ‘밀렵꾼’이었나?”
“맞아요. 한 70% 정도 찍었는데 투자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엎어졌거든요.”
꽤나 규모가 커서 영화 촬영 기간도 길었다고 했는데, 벌써 한 6개월도 넘었지?
회사에 부도가 나서 엎어지는 경우엔 선급금으로 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출연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임은혜처럼 급이 높으면 보통 출연료는 후지급의 형식이 많으니, 아예 못 받는다고 보는 게 맞을 터.
결국 6개월 동안 노력이란 노력은 다 하고 고생까지 했지만,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 것.
“단순히 그 일만 있으면 괜찮겠지만…….”
임은혜는 쓸쓸하게 웃으며 달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오늘 날짜엔 ‘엄마 기일’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영화 엎어지고 정신이 없어서 어제 엄마 제사도 못 챙겼거든요.”
임은혜는 하염없이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저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아역 배우로 데뷔한 이후, 그녀를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하며 착취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화재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대로 이야기도 못하고 돌아가셔서 그런지, 좋은 기억이 없는데도 엄청 그립거든요.”
“…….”
“진짜 엄마도 아빠도 다 싫어했는데……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을 하면…….”
나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 지나지 않았기에 그녀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임은혜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죄송해요. 오자마자 괜히 막 하소연하는 것 같네.”
“아니에요. 편한 대로 말해도 돼요.”
허나, 그녀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
임은혜는 이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전화를 한 것 같아요.”
“잘했어요.”
나는 테이블 위로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편하게 연락해요.”
“아니에요. 이제 안 할 거예요. 이런 생각도 안 할 거고.”
임은혜는 굳센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감독님 사무실 이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몰골이 이래서 차마 못 가겠더라고요.”
“아니에요. 저야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조만간 놀러갈게요.”
“그래요. 오면 맛있는 거 사 줄게요.”
나는 살짝궁 그녀의 손을 놓으며 찻잔을 들었다.
“참, 감독님.”
“네?”
“감독님도 무슨 고민 같은 거 있어요?”
임은혜는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전화했을 때 조금 목소리가 다운되어 있던데.”
“고민은 아니고…….”
민망함에 어깨를 으쓱였다.
“시나리오 준비하고 있는데, 정리가 안 되어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복잡해서요.”
“그럴 땐 차라리 생각을 비우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요즘은 어떻게 비우는지도 모르겠어요.”
“봉사활동이라도 한 번 해보는 건 어때요?”
“봉사활동이요?”
“네. 저는 가끔씩 요양원이나 무료 급식 같은 봉사활동 가거든요. 그러면 그냥 멍하니 할 일만 하게 되더라고요. 머리 비우는데 정말 좋아요.”
“한 번 생각해볼게요. 고마워요.”
임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는데 얼른 가 보세요. 저 이제 괜찮아요.”
“저녁 먹어요.”
“네.”
“쉬어요.”
* * *
도서관에 다녀온 지 사흘이 더 지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나리오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
지이잉-.
그때 한시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네, 강준수입니다.”
-깡 PD님! 바빠요?
“아니요. 안 그래도 농땡이 피우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참, 화분 잘 받았어요. 고마워요.”
-이사한 걸 어제 알았다니까요. 요즘 촬영 때문에 정신이 없어가지고.
“독일은 좀 어때요?”
한시아는 몇 달째 해외에 나가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다.
유럽 4개국을 돌면서 촬영한다는데, 다른 곳 촬영은 다 끝나고 거의 막바지라 독일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여기야 늘 똑같죠. 근데 소시지가 진짜 맛있어요. 나중에 좀 사갈 테니까 PD님도 먹어보고 놀라지 마요.
“하하하, 알았어요.”
-요즘 시나리오 준비한다면서요. 좀 잘 되어가요?
“아니요. 완전 막혔어요.”
-강 PD님 앓는 소리내는 거 오랜만이네. 대체 어떻길래 그래요?
“장면 장면은 떠올라서 다 짜 놨거든요. 다만, 명확한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기도 하고, 또 밑바탕이 안 그려져서 고민 중이에요.”
-딱 제일 어려운 부분이네.
“그렇죠?”
-저희 감독님한테 한 번 물어볼까요?
“아니에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기도 하고, 또 이런 건 감독으로서 혼자 뚫어봐야죠.”
-우리 강 PD님 이제 어른 다 되셨네.
“예전부터 전 어른이었어요. 시아 씨는 이제 27살이잖아. 완전 애기지.”
-그러니까 저처럼 어린 애를 만나야 좋은 거죠. 결혼할 때도 능력자 소리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또 또 또 훅 들어온다.”
-해외에서 깜빡이 켤 순 없잖아요. 요즘 통화도 못 했는데. 강 PD님이 먼저 통화 거는 일이 없다니까.
“어휴.”
한시아 얘 완전 불도저 다 됐다.
“여하튼 그래서 머리나 비울 겸 봉사활동이나 한 번 해보려고요.”
-평소에 안 하던 걸 갑자기 하면 다친댔어요. 저처럼 꾸준히 하던 걸 해야죠.
“시아 씨는 평소에 하시는 것처럼 말하네.”
-저는 마음 가득한 기부를 하죠.
“아, 그래요?”
-어, 지금 비꼬는 말투 같은데. 왜요, 기부 배틀 한 번 해?
“……질 것 같아서 미리 기권할게요.”
-크흐흫.
그녀는 한껏 웃음소리를 냈다.
-여하튼 저 조만간 한국 들어가니까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어요.
“언제 오는데요?”
-음…… 영화 끝나면?
“꽤 걸리지 않아요?”
-한 3개월이면 끝날 거예요.
“진짜 멀었는데요?”
그쯤이면, 내 시나리오도 이미 탈고했을 터.
-그동안 한눈팔지 말고 딱 기다려요.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저한테 잘해주는 여자 생겼는데.”
-누군데요? 백발마녀 그 인간이 또 집적대요?
“시아 씨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진짜로?
“시아 씨랑 같은 한 씨예요.
-누가 있긴 있나 보네.
한시아는 홀로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
-누군데요? PD님 주변에 내가 아는 한 씨는 없는데.
“있어요, 되게 친절한 사람.”
나는 클클 대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저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아, 누군데요!
“한국 오면 알려줄게요. 연락해요.”
-아니, PD님 지금…….
뒷말은 듣지 않고 끊었다.
음, 아주 좋아.
오랜만에 한시아를 조금 골려준 느낌이다.
흡족스레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시금 모니터를 바라보자, 시나리오 생각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듯한 느낌.
진짜 봉사활동이나 한 번 해봐야겠는걸.
머리를 한 번 비워야 다시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천천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보육원 하나를 찾았다.
기왕 가는 거, 드라이브도 할 겸, 아예 경기도 외곽으로 잡았다.
워낙 외진 지역이라 봉사활동 오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그곳으로 정했다.
손길이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네, 안녕하세요. 토요일에 봉사활동 혹시 갈 수 있을까 해서요. 예. 남자 한 명입니다.”
-토요일은 다른 봉사자님도 한 분 오시기로 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예. 제가 또 붙임성이 좋거든요.”
-그러면 토요일 오전에 오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참, 애들 장난감 같은 거라도 좀 사가도 될까요?”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남자애들이랑 여자애들 각각 몇 명씩 있을까요? 말씀해주시면 제가 한 번 잘 골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