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선택의 기로 (4)
나는 티슈를 뽑아 그에게 건넸다.
김훈식은 받아들어 눈가를 닦으며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그는 더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쳐들며 민망하게 웃었다.
“제가 아들놈 생각만 하면, 주책없이 눈시울이 붉어지려 하네요.”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잔을 채워 주자, 김훈식은 단번에 비우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나리오 내용이 제 이야기랑 비슷한 것 같아서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저희 아들놈이 지금 16살입니다. 중학교 3학년. 얘가 중학교를 다니면서 1학년 때만 전학을 두 번이나 갔어요.”
왠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학교 폭력을 당했거든요.”
“…….”
“처음엔 아들 보고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친해져 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하는 말로 ‘아웃사이더’나 따돌림과 같은 수준으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왕따 같은 게 아니라, 삥을 뜯기고 심지어 상납까지 하더군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 왔다.
제삼자인 나도 이러는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제가 극단에서 연기나 하며 돈을 못 버니까 직장 다니는 엄마한테 계속 용돈을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는 자조적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빠가 되어서 연기한다고 가정에 제대로 신경도 못 쓰고…… 아들만 생각하면 미안해 죽겠습니다.”
“가해자들은 처벌 받았습니까?”
“예.”
그러나 그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촉법소년이라 형사 처벌은 안 되고 기껏해야 보호 처분을 받았더라고요.”
잔을 채우려는 그에게서 소주병을 빼앗아 직접 따라 주었다.
“그러면 그 자식들은…….”
“보호 처분 외에도 교내에서 정학 시켰습니다. 근데 그 이후가 문제더군요.”
김훈식은 씁쓸한 기운을 삼켰다.
“사실, 우리나라 사회가 그렇잖아요. 괴롭히는 애들은 사라졌지만, 정작 다른 아이들은 그 과거를 알고 있으니 가까이 하기가 꺼려진다더군요. 그래서 결국 친구 하나도 없이 1년을 보내고 도저히 적응을 못 해 전학을 갔습니다.”
그는 빠르게 소주잔을 비웠다.
“전학 가서도 적응하나 싶었는데, 그 학폭 가해자 놈들의 절친이 같은 학교에 있더라고요. 거기서는 오히려 더 교묘하게 괴롭혔습니다. 직접적으로 때리거나 돈을 뺏으면 학폭위에 올라가고 징계 받을 수 있으니, 사물함에 우유를 부어버리거나 신발을 숨기는 등 진짜 못살게 굴더라고요. 나쁜 새끼들…… 그러니 자연스레 친구는 없어질 수밖에요.”
“그래서 다시 전학을 간 거군요.”
“예. 도저히 일반 학교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대안학교를 보냈습니다.”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예. 이제 중3 올라가는데, 고등학교는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잘됐습니다. 지혜롭게 잘 대처하신 것 같아요.”
“와이프가 똑똑했죠. 그래서 아내한테 미안합니다. 돈도 벌고 아이한테까지 신경 쓰고…… 저는 연기한답시고 매일 같이 극단에 나가서 가정에 제대로 집중도 못 하니까…….”
그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울적한 이야기를 해 버려서…….”
“아닙니다.”
“여하튼 저는 제가 아들놈한테 제대로 아비 노릇을 못 한 것 같거든요. 이 영화를 통해서 저도 변해보고 또 이러한 이야기를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꼭 이번 영화를 하고 싶은 거고요.”
김훈식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주연으로 뽑아 달라고 어필하는 건 아닙니다. 오디션에서 떨어졌더라도, 작은 배역으로나마…… 엑스트라도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이 영화를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요.”
“잘 알겠습니다.”
그는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는지 조심스레 사과했다.
“제가 괜히 부담 드린 것 같아서 죄송스럽네요.”
“괜찮습니다.”
나는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사람들의 사정을 듣고 배역을 뽑았다면, 이 자리까지 못 왔을 테니까요.”
공과 사는 다르니까.
“네. 맞습니다. 냉정하게 판단해주세요.”
그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었다.
“제가 오늘 죄송할 짓 많이 하네요.”
“아니에요. 소주 한 잔 받으시죠.”
“예, 감독님.”
* * *
“안녕하세요, 종길 씨.”
“또 뵙네요, 감독님.”
28번 오디션 참가자였던 이종길은 반갑게 내게 인사했다.
“잘 쉬셨어요?”
“아니요.”
그는 능청스레 대답했다.
“오디션에 붙을까 떨어질까, 며칠 동안 가슴 졸이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러셨어요?”
“예. 며칠 동안 계속 집에서 운동만 했다니까요.”
앞서 만난 김훈식과 이종길은 동갑인 46살이나, 차이점은 적지 않았다.
김훈식은 아들이 둘이나 있는 아버지이고.
이종길은 결혼은 했지만, 자식은 낳지 않은 딩크족 부부.
하나 더.
이종길은 운동을 했던 인물.
시나리오에 나온 것처럼 후반부에 복싱 선수로 전환할 때 근육질 몸을 보여주기엔 더 쉽고 효과적일 터.
그에 반해 김훈식은 말 그대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 스타일이다.
“마음껏 주문하세요. 오늘 법인카드니까.”
“그렇습니까?”
그가 잡은 약속 장소는 고급 차돌박이 전골 전문점.
이종길은 메뉴판도 보지 않고 능숙하게 벨을 눌러 주문했다.
“여기 A세트로 하나 주세요.”
“많이 와 보셨나 봐요.”
“예. 아내랑 같이 자주 옵니다. 엄청 맛있거든요.”
“맛은 보장되었겠네요.”
“하하,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는 직접 가져온 와인을 한 병 개봉했다.
“여기가 또 콜키지 프리거든요.”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비싼 와인이면 부담스럽습니다.”
“어유, 아닙니다. 근처 마트에서 사온 거예요.”
이종길은 껄껄 웃으며 와인잔을 건넸다.
와인 한 잔에 식사를 하며 자연스레 사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현직 연기 트레이너시죠?”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오디션 이력서에 올린 프로필에서도 적혀 있던 사실이다.
“예. 트레이너는 너무 거창하고 작은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어쩐지 발성부터 다르시더라고요. 연기도 완전 정석적이시고요.”
“어유, 과찬이십니다. 저도 부족한 게 많아요.”
짧은 대화로도 알 수 있었다.
사람 자체가 괜찮았다.
실제로 2030년까지 논란 한 번 없었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긴 하다만.
인간적으로도 소통이 잘되는 느낌.
“왠지 말이 잘 통하는 것 같네요.”
“아, 그런가요?”
“예. 감독님이랑 오래오래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영화 때문은 아니고요. 이번 작품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자주 연락하고 지내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네요.”
이종길이 유명해져서가 아니라, 편하고 좋았으니까.
“그나저나 저 말고 후보가 한 분 더 계시다고요?”
“예. 96번 참가자분이신데, 극단에 오래 계셨던 분이에요.”
“이야, 보통내기가 아니시겠는데…… 연기는 말할 것도 없으실 테고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기에 연기력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한 상황은 아니니까.
“어떻게 되었든 감독님께 서운해 하지는 않겠습니다. 더 적합한 배우를 결정하시리라고 믿으니까요. 지금까지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죠.”
“사실, 저는 지금까지 연기를 하면서…….”
* * *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어윤중 본부장의 물음에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숨을 뱉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책상에는 두 장의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왼쪽에는 이종길.
오른쪽에는 김훈식.
둘 모두 이번 작품의 배역에 적합하다.
다른 A급 배우들이 아쉽지 않았으니까.
허나, 둘의 장단점이 너무 명확해서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누구한테 마음이 더 가는데?”
어윤중 본부장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훈식.
냉정하게 판단하면 이종길을 캐스팅해야 하지만, 직감이 자꾸만 김훈식을 택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 겪은 일을 동정하거나 김훈식의 사정에 연민을 가져서가 아니다.
그의 연기를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오디션에서 다른 이들과 김훈식이 다르게 느껴졌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연기’를 하고 있지만.
김훈식은 경험을 통해 직접 겪었던 감정들을 다시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었으니까.
그건 연기가 아니다.
실제로 겪어 봤기에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이라고 봐야지.
그렇기에 그 배역을 누구보다도 더 잘 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치질 않았다.
“본부장님.”
“응?”
“성공이 보장된 길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실패할지도 모르는 길이 있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하는 게 맞겠죠?”
“글쎄.”
당연히 그렇다는 답변을 할 줄 알았지만, 어윤중 본부장은 예상외의 대답을 꺼내 놓았다.
“커리어를 보면, 전자가 나쁘지 않지. 근데 인생이라는 게 늘 옳은 길만 갈 수는 없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잖아.”
그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때로는 그 선택을 하는 게 인간의 심리 아니겠어?”
“그렇죠.”
“그런데 또 희한하게 역사를 보면, 옳다고 생각한 게 무조건 늘 옳은 건 아니야.”
“…….”
“게다가 방금 네가 ‘실패한’ 길이 아니라, ‘실패할지도 모르는’ 길이라고 했지?”
“예.”
“네가 선택한 걸 성공으로 만들면 돼. 남들이 뭐라 하건 간에, 네가 선택한 게 옳았다는 걸 증명해 버리면 되잖아. 그러면 주변에서 아무도 뭐라고 못 하거든.”
왠지 모르게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명심해.”
그는 오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정적인 길만을 걸으면, 남들이 부러워할 순 있어. 허나, 결코 이름을 남길 순 없어.”
맞는 말이다.
그저 평범에서 조금 더 우월한 수준.
눈부신 성공을 이룩할 순 없다.
“그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탄탄한 성공대로를 가면 남들을 따돌릴 순 없으니까. 언제든 쫓아올 수 있거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것도 나쁘진 않아. 그것도 좋은 삶이지. 다만, 그 흐름을 일으키기 위해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만 해.
그는 코를 찡긋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그만큼 실패하는 사람도 많다는 게 함정이야. 가시밭길을 간 1만 명 중 살아남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는 건 잊지 말고.”
어윤중 본부장은 더 잔소리하지 않겠다는 듯 한 걸음 물러났다.
“선택은 네 몫이야.”
왠지 속이 후련해졌다.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
“본부장님.”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결심이 섰다.
“결정했습니다.”
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저는 이분으로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