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357화 (358/601)

357화 선택의 기로 (6)

“출연할 생각 없습니다. 헛걸음하셨네요.”

“……예?”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출연 안 할 거라고요.”

백민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잠시만요.”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왜 거부하시는지 이유라도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민준 씨에게는 분명 좋은 기회일 텐데요.”

“…….”

그는 시선을 돌려 외면하다가.

“하아.”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백민준은 짜증이 난다는 듯 짙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좋은 기회죠. 데뷔하자마자 바로 매장될 만한 기회.”

비꼬듯 입을 열었다.

“영화 찍은 뒤는 뻔하잖습니까? 홍보하러 다니면서 여기저기 예능 출연할 테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섭외 비하인드 이야기가 나올 거고요. 그러면 자연스레 제가 바람 피웠던 사실까지 만천하에 알려질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최대한 보호해드릴 수 있습니다. 비하인드 같은 건 공개하지 않을 수 있는 건이고…….”

“감독님 혼자서 만인의 입을 막을 순 없잖아요.”

“…….”

“저희 극단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중에 저한테 불만 가진 사람이 없겠습니까? 불만이 없더라도, 훈식 선배님 불쌍하다고 퍼뜨릴 인간들이에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내가 알리지 않으려고 한들, 다른 이들이 폭로하는 걸 막을 순 없으니까.

그는 답답하다는 듯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훈식 선배님은 제가 바람피웠다고 생각하죠?”

“사실이 아닌가요?”

“바람피운 건 맞죠. 그런데 제가 알고 그런 게 아니거든요.”

“……예?”

“저는 훈식 선배님 아내인 것도 몰랐어요. 저한테는 돌싱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있지만, 이혼한 돌싱.”

김훈식도 내게 말했다.

백민준이 그러한 변명을 했다고.

당연히 거짓이리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눈빛을 보니, 이게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식 선배님한테도 말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같은 극단에서 5년을 있었는데 모를 수가 있습니까?”

“제가 아내 얼굴을 어떻게 압니까? 감독님도 강준수 사단 작가님들의 남편 얼굴 전부 아시는 건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우리 강준수 사단에 들어와서 결혼식을 올린 이들은 알지라도,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배우자가 있는 인물들의 가족까지는 모르고 있으니까.

“훈식 선배님이랑 제가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요. 극단에 배우만 30명이 넘어요. 스태프들까지 하면 더 있고, 5년이나 있었다고 해도 중간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사람까지 하면 정말 많습니다.”

백민준은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무리 오래 지냈어도 친한 사람들과만 깊이 알지, 서로의 가정사까지는 알 수가 없잖아요.”

그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게다가 저와 나이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제가 28살이고, 훈식 선배님이 46살입니다. 저한테는 완전 어려운 대선배님이에요. 호칭도 형이 아니라, 선배라고요.”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또한, 나는 제3자 입장에서 들었을 뿐이기에 둘 중 누가 진실인지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오해에 오해가 겹쳐 있다는 사실.

그렇게 그의 출연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나는 차분하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 문제만 해결되면, 출연하실 수 있는 건가요?”

“삼자대면이라도 시켜주시려고요? 아니, 그 여자까지 사자대면 하나?”

“아니요. 그 오해를 제가 풀 생각은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바람피웠다는 그 낙인…….”

“오해죠.”

“예. 그 오해를 사지 않는다면, 출연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그러면 저도 당연히 하고 싶죠.”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준수 감독님이잖아요. 게다가 상업영화고…….”

허심탄회한 목소리를 냈다.

“굶주린 배 잡으면서 극단에서 버티는 게 큰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인데, 누가 안 하고 싶겠습니까?”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아마 해결이 안 될 것 같긴 한데…….”

“되든 안 되든 전화 드리겠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 * *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까…….

며칠 동안 머리를 짜내고 있지만,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히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생각이 갈리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사생활이 걸려 있는 문제였으니까.

일반적인 것도 아니고, 무려 결혼 생활 중의 바람과 관련된 것이기에 더욱 더.

“떠오르는 게 있으세요?”

“나도 전혀 감이 안 오네.”

어윤중 본부장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히 배우들 이야기라면, 삼자대면이라도 해보겠다만…… 그 사모님은 아예 일반인이잖아.”

“그렇죠. 게다가 김훈식 씨는 깨진 상처를 붙여 보려고 노력하며 덮은 상태고요.”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 같으면 포기할 것 같은데.”

“저도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나 또한 다른 이들의 사생활에 관여하고 싶지는 않다.

깔끔하지 않게 마무리가 되었다고 한들, 어쨌든 끝난 일을 다시 꺼내 긁어 부스럼을 일으키는 것 같았으니까.

허나, 백민준과 김훈식 둘을 생각하면 모른 척 지나갈 수는 없었다.

백민준은 해당 문제만 해결되면 영화에 들어오고 싶어하고.

김훈식 또한, 백민준이 출연하는 게 베스트라고 생각하니까.

“김훈식 씨랑은 그때 미팅한 게 전부인가?”

“아니요. 엊그제 한 번 더 만났어요. 서로 입장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봤는데, 김훈식 씨는 서로 오해를 했건, 아니건 간에 우선 영화는 출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단순히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연기를 위해서라도 백민준이 들어오길 바라고 있었다.

분노를 포함한 다양한 감정을 최대한 몰입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탓이겠지.

“네가 보기엔 어때?”

“제가 보기에도 지금 상황에선 둘을 섭외하는 게 베스트예요. 굳이 A급 배우들을 섭외하는 것보다 이 두 명이 이 작품을 더 잘 소화할 것 같아요.”

어윤중 본부장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오해를 풀지 않고 섭외하는 건 어때?”

“연기를 위해서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백민준 씨가 걱정하는 사항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출연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니까 그걸 처리해야 하는데…….”

“둘의 입장은 계속 갈리고 있는 거지?”

“예.”

“그러면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네.”

김훈식의 아내.

오희선 그녀가 정답을 알고 있을 터.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아요.”

“만나 봤자 좋은 소리 못 듣지 않겠어?”

“그렇겠죠. 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서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연락처는 있고?”

“엊그제 김훈식 씨 볼 때 같이 봤어요. 제가 백민준 씨 출연시키는 걸 걱정하니까 직접 만나서 괜찮다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때 명함도 같이 받았어요.”

“그래. 한 번 가 봐. 대신 말조심하고.”

“알겠습니다.”

* * *

흑석동의 한 번화가.

명함에 적힌 주소지면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길가에 차를 주차해두고 건물의 간판을 슥 훑어보며 김훈식의 아내 오희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신호는 갔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리 연락을 하고 왔어야 됐나.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1인 기업이라고 들었기에 바로 올라가 볼까 고민도 했지만, 연락도 않고 바로 사무실로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저 강준수 PD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잠깐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 사무실 앞에 왔는데 전화를 안 받으셔서요. 괜찮으시면 짧게라도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짧은 메시지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릴 생각으로 카페에 들어갔다.

시간은 많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스팅이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차피 제대로 진도도 나가지 못하니까.

적당한 곳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희선을 만나서 어떻게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야 해답을 알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득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하다니까 요즘.”

중후하면서도 또 조곤조곤한 40대 중반의 여성 목소리.

“다들 난리야. 그래서 정신이 없다니까.”

오희선 목소리 같은데?

“잘될 거예요.”

그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남자의 목소리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게다가 누님은 사업도 잘하고 있잖아요.”

“일이야 뭐 늘 하던 거니까.”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그때 남자의 말에서 들리는 이름이 귀를 파고들었다.

“현성이는 잘 지내고요?”

김현성.

김훈식의 아들 이름이다.

“그래.”

“애 아빠는 아직도 양육비를 안 준답니까?”

“주겠어?”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이혼한 지가 언젠데. 받아야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건데.”

“됐어. 기대하지도 않아.”

오희선으로 추정되는 여성은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난 화려한 돌싱으로 살 거야. 구질구질하게 전남편에게 발목 잡히기도 싫어.”

“누님, 제가 진짜 좋은 남자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난 이혼 경력에다가 애까지 있는데…….”

“에이, 요즘은 그런 거 흠도 아니에요. 제 친구 중에는…….”

둘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누가 봐도 이혼한 여성과 그에게 구애하는 남성의 이야기.

속으로 간절히 아니었으면 바라고 있었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오희선이라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이만 일어날까요?”

“응. 나도 들어가 봐야 돼.”

“나가죠.”

둘은 사이좋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안면이 있기에 시선을 피하느라 얼굴을 제대로는 보지 못했다. 허나, 뒷모습 또한 영락없는 오희선이었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젠 모른 척할 수도 없다.

차라리 못 봤다면 모를까…….

이거 아무래도 점점 머리가 아파져 온다.

부우웅-.

그때, 창밖에서 길가에 주차된 차에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희선으로 추정되는 여성과 함께 있던 남성.

남자는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떠나갔고.

여성은 사무실로 향하며 핸드백을 확인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몇 번 클릭하나 싶더니 이내 그것을 귀에 가져다댔다.

그와 동시에.

지이잉-.

내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 오희선.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창밖의 여성을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

“네, 강준수입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어서요.

창밖의 여성은 오희선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음성메시지 들어보니, 이 근처에 오신 것 같은데…… 어디 계세요? 제가 갈게요.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중이거든요.”

-아, 그런가요?

“네.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사무실까지 다 찾아오시고…….

“별거 아닙니다. 제가 운전 중이라,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예,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자, 창밖의 오희선 또한 휴대폰을 핸드백에 넣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하아.”

막을 새도 없이 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와 함께 있던 남성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백민준이 아닌, 다른 제3자와 또다시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 복잡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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