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358화 (359/601)

358화 선택의 기로 (7)

‘뉴 패밀리’의 촬영일.

오랜만의 특집인지라, 이수정 PD의 SOS에 간만에 함께 CBN 방송국에 찾아왔다.

간만에 스튜디오 촬영이기에 헤맬 수도 있어서 도와달라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상 CBN이기에 태클이 걸릴까 봐 싶어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CBN은 몇 달 전까지 우리 강준수 사단이 있던 CN미디어와 같은 회사이기에 혹시라도 텃세를 부릴 수도 있기 때문.

허나, 다행히도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촬영은 무난하게 진행될 것 같네.”

“예. CN미디어 측에서도 따로 방송국에 연락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예 들어도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잘됐네. CBN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거지.”

이래야 정상이긴 하다.

CN미디어와 마찰이 있긴 했으나, 어쨌든 ‘뉴 패밀리’는 CBN에서 흥행하는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였으니까.

“선배님.”

그때 막내 작가 하나가 슬쩍 내게 테이크아웃 잔을 내밀었다.

“커피 드세요.”

“어, 고마워.”

나는 받아들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누가 산 거야?”

“오늘 게스트로 오신 송유라 씨 매니저님이 사오셨어요.”

“아, 최지훈 씨였나?”

“네, 맞아요. 이번에 새로 오신 분.”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할 겸 최지훈 매니저를 찾아 눈을 돌리자, 저 멀리서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근데 왜 저래?”

“아, 특별한 건 아니고요. 커피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요. 저희 스태프들 수에 딱 맞춰서 사 왔더니 매니저님들이랑 출연진 먹을 게 없더라고요.”

“그래?”

신입이라 그런지 어리바리한 모양.

다급하게 나서려는 그를 보고서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사 온다고 그래.”

“감독님이요?”

막내 작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굳이 그러실 필요 있으세요?”

“운동할 겸 다녀올게. 이 PD 나 없어도 괜찮지?”

“예. 문제없습니다.”

“내가 다녀올게. 매니저들이랑 연예인들한테는 내가 커피 쏘면 되지.”

CP로서 간만에 촬영장까지 왔으니 돈이라도 쓰고 가야 체면이 살지.

홀로 촬영장을 나서 방송국 1층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출연진과 게스트에 매니저까지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16잔 테이크아웃으로 부탁드려요.”

“혼자 들고 가시는 거죠?”

“네. 캐리어랑 같이 쇼핑백에 담아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홀로 서 있자, 문득 머릿속엔 엊그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김훈식의 아내 오희선이 낯선 남자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모습.

아마 바람일 테지.

며칠 동안 짱구를 굴리고 있지만, 명확한 결론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적당한 곳에 서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톡톡.

“감독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쿡.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볼을 찔렀다.

“흐흐흫.”

반대로 고개를 돌리자, 한예린 팀장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그녀는 활기차게 웃으며 인사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저는 스튜디오 촬영이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팀장님은요?”

“전 오늘 광고 관련해서 미팅이 있어 가지고 왔어요. 이제 끝나고 사무실 들어가기 전에 커피 한 잔 사서 들어가려고요.”

“아아, 역시 바쁘시네.”

“그나저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한예린 팀장은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꽤 표정이 어둡던데.”

“아, 특별한 건 아니고 영화 촬영 관련해서 조금 난항이 생겨서요.”

“필요한 거 있어요? 말만 해요. 제작비도 더 지원해줄 수 있는데.”

“이건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뭔데요. 제가 들어줄게요.”

“음, 이게 말로 하려면 긴데…….”

배우의 사생활이긴 하나, 따지고 보면 한예린 팀장이 이번 영화의 총괄 투자자기에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하지만 아쉽게도.

“A-31번 고객님.”

카페 직원이 나를 불렀다.

“제가 커피 심부름을 온 거라서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감독님이 그런 것도 하세요?”

“하하하, 잠깐 자리 비워준 거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배님!”

막내 PD 하나가 숨을 고르며 달려왔다.

“다행이다. 벌써 올라가신 줄 알았어요.”

“왜 왔어?”

“16잔 사실 것 같은데, 혼자 들긴 빡세잖아요.”

“여기 깔끔하게 다 챙겨줘. 혼자 들 수 있어. 4잔씩 두 겹으로 해서 쇼핑백 두 개면 되거든.”

“오, 이렇게도 주는구나.”

“인사해. 여기 한예린 팀장님. 알지?”

“아, 그럼요!”

그는 옆에 있던 한예린 팀장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음…… 박광현 PD님 맞으시죠?”

“아, 네. 맞습니다.”

막내 PD는 환하게 웃더니 내 손에 있던 커피 캐리어 쇼핑백을 두 개 모두 받아 들었다.

“선배님, 천천히 이야기하다가 오세요. 위에 어차피 잠깐 쉬는 타임이거든요.”

“그래?”

“예. 제가 후딱 커피 셔틀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아닙니다!”

박광현 PD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쏜살같이 카페에서 빠져나갔다.

한예린 팀장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야기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러네요.”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한예린과 함께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그나저나 팀장님은 사무실 들어가 보셔야 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농땡이 좀 피우죠, 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감독님 멘탈 관리도 제 일이니까.”

“감사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음…….”

“제가 알아도 되는 거면 말씀해 주세요. 아니면, 굳이 안 하셔도 되고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원래는 마무리되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팀장님이 아셔야 될 사항이긴 해요. 아무리 저한테 일임하셨다고 해도, 총괄 투자자시니까.”

“중요한 건가 보네요?”

“네. 저번에 오디션 봤던 김훈식 씨를 섭외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그녀에게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예린 팀장은 지루해하는 기색 없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경청했다.

짧지 않은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쉽지 않네요.”

“네. 단순히 감독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 판단을 해야 하는 거라…….”

“그렇죠. 그저 영화 한 편 찍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한예린 팀장은 턱을 매만지며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제가 알아서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감독님께 어떤 선택을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이것 또한 감독님의 선택이라고 보거든요.”

내가 직접 판단하라는 뜻이지.

“다만,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은 아시죠?”

일명 선의의 거짓말.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때로는 하얀 거짓말이 필요할 경우가 있다고. 허나, 그게 늘 옳은 건 아니에요.”

한예린 팀장은 한 마디 한 마디를 매우 조심스럽게 골랐다.

“몰라서 좋은 게 있지만, 굉장히 쓰더라도 반드시 삼켜야 하는 일도 있어요.”

맞는 말이다.

눈을 가려서 좋을 수도 있으나, 그거는 언제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깨진 항아리를 두꺼비로 막는다고 해도, 언젠간 뚫리게 되는 법이니까.

“제가 당사자들이 되어 본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해본 것도 아니라서 이번 일에서 반드시 진실을 알려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어요.”

그것엔 나 또한 동의한다.

그렇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

“허나, 제일 중요한 건 김훈식 씨의 의지예요.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까지 영화를 찍고 싶느냐인데, 그걸 알아보려면…….”

“네. 미리 전달을 해야 하죠.”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의 의중을 알아보려면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데.

사실을 전달하는 게 그의 의지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저는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만약에 김훈식 씨였다면…….”

한예린 팀장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알려주길 바랐을 것 같아요.”

“그런가요?”

“네. 이미 한 번 아내가 바람이 난 걸 아는데도 그 이후에 벌어지는 사실을 모른 채 평생을 사는 건 너무나도 비참할 것 같거든요.”

그녀는 씁쓸하게 나를 바라봤다.

“결정은 감독님의 몫이에요. 저는 어떤 선택을 하든 감독님을 존중할게요.”

“고마워요.”

* * *

오후 6시.

김훈식과 둘이서 술 한잔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일단 만나서 깊은 대화라도 해보며 그의 심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모둠 전이랑 막걸리 한 병 주세요.”

“예.”

버스를 탔는데 차가 조금 밀려서 늦는다기에 먼저 주문을 했다.

김훈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이잉-.

백민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얘가 무슨 일이지?

“네, 강준수입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그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우선, 저번에 무례하게 대했던 건 사과드립니다. 제가 감정이 격해져서…….

“상황이 상황이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전화 드린 건 다름이 아니고…… 저번에 해주셨던 제안에 대해 정말 오래 생각하고 또 깊이 고민했거든요.

“예.”

-저 출연하고 싶다고 했던 거, 감독님 듣기 좋으라고 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에 진심으로 출연하고 싶습니다.

백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만,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저번에 말씀드렸던 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저도 출연을 할 수가 없어서…….

“네. 이해합니다. 어떤 입장이신지도 잘 이해했고요.”

-그래서 저도 개인적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봤거든요.

휴대폰 너머지만, 그가 긴장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희선 씨…… 저와 바람을 피웠던 그분과 주고받았던 문자 내역과 통화 내역 중 녹음된 걸 몇 개 발견했거든요. 거기서 본인이 돌싱이라고 이야기를 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의 간절함까지 느껴져 왔다.

-이것으로나마 어떻게 가능하다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딸랑-.

그때 식당의 문이 열리며 김훈식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를 향해 손을 들며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닙니다. 우선 제가 미팅 중이라 내일 다시 전화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들어가십시오.”

-예.

전화를 끊자마자 김훈식은 웃으며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통화 더 하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마무리되고 있었어요.”

나는 웃으며 막걸리 병을 들었다.

“한잔하실까요?”

* * *

“한 잔 받으시죠.”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막걸리를 몇 병이나 비웠을까.

나도 술이 꽤 센 편이지만, 어느새 취기가 심히 오르고 있었다.

김훈식 또한 마찬가지.

그의 얼굴은 시뻘게져 있었다.

“크으.”

김훈식은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막걸리를 훔치더니.

“감독님.”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풀릴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진짜로 이기적인 놈 같습니다.”

“예?”

“취한 김에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그는 다시금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하아.”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털어놓았다.

“실은 저 다 알고 있어요.”

“……네?”

“바람이요.”

예상치도 못한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훈식은 주먹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맥없이 축 늘어뜨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 아내가 바람피우는 거…… 돌싱이라고 거짓말하면서 다른 남자들 만나고 다니는 거…… 백민준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진실이라는 것도 전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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