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363화 (364/601)

363화 다시 시작한다는 건 (1)

“아, 진짜요?”

파스타를 돌돌 말던 한시아는 깜짝 놀란 듯 땡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면 그 두 분이 영화 내내 사담을 나누신 적이 없는 거예요?”

“네. 모든 촬영장엔 제가 있었는데, 일부러 떨어뜨려 뒀어요. 두 사람도 서로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고요.”

“우와, 진짜 대단하다.”

김훈식과 백민준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그런 감정을 안고 추천하는 것도 대단하고, 또 영화 내내 지켰다는 것도 정말 존경스러울 지경이에요.”

“프로 의식이 대단하신 분들이라니까요.”

한시아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거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죠?”

“예. 일단은 비밀로 해주세요. 어지간한 스태프들도 전혀 몰라요.”

“아, 진짜요?”

“네. 영화 개봉 때나 되어야 공개할지 말지 결정할 거예요.”

물론, 아직까지 개봉이 확정된 건 아니다.

몇 가지 절차가 더 남아있으니까.

“사실, 제가 이 사정에 대해 시아 씨한테 말해 준 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어떤 건데요?”

그녀는 능청스레 파스타를 말은 포크에 새우를 콕 찍어서 내 입에 내밀었다.

“됐어요. 시아 씨 먹어요.”

“……흥.”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본인의 입에 넣었다.

“주는 척하다가 원래 제가 먹으려고 한 건데.”

냠.

한시아는 오물오물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

“제가 내일부터 뒤풀이 여행 간다고 했잖아요?”

“네. 제주도로 간다면서요.”

그녀는 알아챘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백민준 씨랑 김훈식 씨도 가시는 거예요?”

“맞아요. 두 분이 함께 가기로 했는데…… 이제는 영화 촬영도 끝났으니 굳이 떨어뜨려놓을 필요도 없고요.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화해를 주도하고 싶은데, 괜히 오지랖을 떠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음,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아요.”

꿀꺽.

그녀는 파스타를 삼키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라면, 각자한테 직접 물어볼 것 같아요.”

“화해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서요?”

“네. 그래서 둘 다 괜찮다고 하면 자연스레 도와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둘의 의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김훈식은 자신이 백민준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걸 크랭크 인 들어가기 직전에 알아챘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를 용서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본인으로 인해 그가 극단에서 나갔다는 점에 대해 미안함을 갖고 있긴 하다.

백민준 또한,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바람을 피우게 된 점에 대해 김훈식에게 사과할 용의는 충분히 있다고 했었고.

“결심이 선 모양이네요.”

한시아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제가 굳이 나서지는 않으려고요. 대신 선을 긋는 상황만 되지 않도록 만들려고 해요.”

“좋을 것 같아요. 그런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주는 거니까.”

나는 호흡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내쉬었다.

“대충 생각이 정리됐어요. 고마워요.”

그녀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더 고민 있는 거 없어요?”

“네. 오늘은 이거면 충분해요.”

“그러면 이제 저도 고민 상담해 주세요.”

“시아 씨도 고민이 있어요?”

“당연하죠.”

“뭔데요?”

한시아는 배시시 웃으며 손에 턱을 괴고서 날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남자 꼬실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밥이나 먹어요.”

“힝.”

* * *

지방의 한 펜션.

아이스박스 안을 확인하다가 당황해서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고기요.”

“저희 바비큐 해 먹을 건데.”

“네, 바비큐용 고기.”

무슨 궁금한 점이라도 있냐는 듯 한예린 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당신이 문제야.

눈앞에는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돼지고기도, 오리고기도, 닭고기도 아닌, 소고기.

그것도 투플러스 한우다.

“아니, 누가 스테이크용 등심으로 바비큐를 해먹어요?”

“기왕 먹는 거 맛있는 거로 먹어야죠.”

지한 호텔을 비울까 물어보기에 펜션을 빌렸으니 괜찮다고 했더니, 2박 3일치 식사 재료는 본인이 책임진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당황한 나와 달리, 스태프들은 재료를 확인하고 연신 환호성을 질러댔다.

“대박.”

“미친. 마블링 봐.”

“내가 지금까지 알던 고기는 고기가 아니었어.”

“팀장님 잘 먹을게요!”

“진짜 사랑합니다.”

“많이 먹어요. 부족하면 지한호텔에서 더 받아다 줄 수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헐, 여기 랍스터도 있어.”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스태프가 살아있는 바닷가재를 손에 들어 높이 올려보였다.

“……랍스터도 샀어요?”

“바비큐할 때 랍스터 같이 구워서 먹으면 맛있어요.”

“재료비 얼마 들었어요?”

“그건 비밀.”

왠지 펜션 빌리는 비용보다 식비가 더 들 것 같은데.

한예린 팀장은 냉장고 주변을 슥 둘러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술은 샀어요?”

“네. 전부 사 왔으니, 가져올 생각 말아요.”

그나마 마트에서 직접 소주와 맥주를 사 왔으니 다행이다.

한예린 팀장에게 맡겼으면, 분명 와인이랑 샴페인으로 가득 채웠을 거야.

“감독님!”

소품팀 스태프 하나가 내게로 다가왔다.

“배우님들 도착하셨습니다.”

“네, 갈게요.”

한예린 팀장은 손을 흔들었다.

“이따 봐요.”

“예.”

나는 서둘러 펜션 앞으로 이동했다.

버스로 이동하는 스태프들과 달리, 그들은 각자의 밴에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보아하니, 조연 배우들은 일찌감치 도착을 했고.

방금 막 김훈식이 도착한 모양.

“훈식 씨.”

“아, 감독님.”

그는 차에서 내리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홀쭉하던 그는 어느새 볼살이 다시 올라와 있었다.

“맛있는 거 많이 드셨나 보네요?”

“아, 그럼요.”

김훈식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식단 관리하느라 참았던 게 폭발해서 이틀간 완전 폭식했습니다. 배달 음식 다 깔아 놓고 먹었어요.”

“하하하, 잘하셨습니다.”

“잠깐 유지해 볼까 생각도 해봤는데, 어차피 술 마시면 또…….”

주차장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부우웅-.

커다란 하얀색 밴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번 작품의 배우들 중 저 차를 타는 배우는 단 한 명.

드르륵.

문이 열리며 백민준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하차했다.

내게 한창 무언가를 설명하던 김훈식은 뚝 입을 닫았다.

한시아와 이야기하며 둘의 화해를 돕겠다고 결심은 했으나, 막상 이렇게 되니 내가 다 부담스러울 지경.

그럼에도 먼저 나서서 손을 들었다.

“민준 씨.”

나를 발견한 백민준은 고개를 꾸벅이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렌즈를 끼는 평소와 달리, 안경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시력이 좋지 않을 터.

“왔어요?”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오던 백민준은 아니나 다를까, 김훈식을 발견하고는 마치 렉이라도 걸린 듯 멈칫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오다가 10m 쯤 거리에서 우뚝 서서 내게 물었다.

“촬영 끝났으니 거리두기 안 해도 되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백민준은 뚜벅뚜벅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김훈식에게 아주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렇게 말씀 나누는 건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네요.”

김훈식도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꽤 됐지?”

“예.”

백민준은 조심스레 물었다.

“이따가 같이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래.”

“감독님도 같이 오시죠. 셋이서 한잔해요.”

“좋습니다.”

* * *

“죄송합니다, 선배님.”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하지. 괜히 나 때문에 극단에서도 입장 곤란해져서 나가고…….”

“아니에요. 저 때문에 상심이 크셨을 텐데, 다시 추천까지 해주신 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니었으면 복귀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대인배십니다.”

“그런 말 하지 마.”

“아닙니다. 저는 진짜로…….”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방에 술잔 세 개를 모아두고, 둘을 불러서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케케묵은 감정은 순식간에 털어낼 수 있었다.

아마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또 영화를 찍으며 서로 정이 들었던 덕분이겠지.

내가 한 것이라고는 말 그대로 자리만 마련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대화 내용은 굳이 이끌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하나씩 오해의 실타래를 풀어나갔다.

내가 낄 타이밍은 없었다.

극단에서 있었던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내 역할은 충분히 했다.

더 심도 깊은 대화를 위해, 오히려 내가 빠져주는 게 더 좋을 터.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다른 배우들 좀 챙기고 올게요.”

“예, 감독님.”

펜션 마당으로 나오자, 바비큐 파티가 거창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고기를 굽는 건 막내 스태프들과 매니저들이 번갈아가며 고생하고 있었다.

“감독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쪽으로 다가가자, 예닐곱 명이 모여 있던 테이블에서 한예린 팀장이 반갑게 손짓했다.

“왜 이제 왔어요?”

“잠깐 할 게 있어서요.”

슬쩍 보니, 한예린 팀장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살짝 취기가 오른 걸 보니, 적잖게 마신 모양.

“취한 건 아니죠?”

“아직 요만큼도 안 취했어요.”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살짝 올라온 것 같은데.

“그나저나 재미있는 이야기하고 있었나 보네요?”

한예린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여기 전설이 있대요.”

“전설이요?”

조연출 김한수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선배님, 오는 길에 이 펜션 뒤쪽 숲에 있는 호수 보셨어요?”

“오는 길에 잠깐 본 것 같은데…… 근데 수풀이 엄청 우거져있어서 산길 넘을 때만 살짝 본 것 같은데?”

고도가 높을 때만 호수가 살짝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제가 조금 전에 관리인분한테 들었는데, 그 호수에 가끔씩 도깨비가 나온대요.”

“도깨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귀신도 아니고 도깨비?”

“네. 외눈박이 도깨비인데, 만나면 시간을 되돌려준대요.”

“……뭐?”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요. 물론, 그만큼의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꿀꺽.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쥐어졌다.

한 마디로 회귀를 시켜준다는 거 아닌가.

“감독님. 같이 가 볼래요?”

한예린 팀장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김한수 조연출이 대신해주었다.

“아쉽게도 지금 가면 없어요.”

그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12간지 시간으로 자시(子時)에 나온다고 했으니까, 이제 오후 8시니 3시간 정도 더 있어야 겠네요.”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한예린 팀장은 아쉽다는 듯 술잔을 들었다.

“우리는 건배나 하죠.”

“네.”

“짠!”

분위기에 맞춰 잔을 들었으나, 머릿속엔 조연출이 이야기했던 전설이 자꾸만 맴돌았다.

시간을 돌려주는 도깨비라…….

진짜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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