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변수가 생길 때는 (11)
벌컥.
문을 열자마자.
딸칵-.
전등을 켜보았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집에 누가 들어올 리가 있나.
비밀번호 아는 건 가족 중에서도 어머니가 유일하다.
어머니 또한 연락도 않고 불쑥 찾아오실 분도 아니고.
지잉지잉-.
“깜짝이야.”
갑자기 울린 진동에 나도 모르게 놀라버렸다.
-보낸 이 : 임은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전화는 끊었는데 괜히 걱정되어서.
갑자기 끊은 게 마음에 걸렸는지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답장했다.
-강준수 : 괜히 큰집으로 이사 왔나 봐요. 방이 많아져서 관리가 힘드네.
-임은혜 : 자랑하는 거죠?
-강준수 : 어떻게 알았어요?
-임은혜 : ㅎㅎㅎ 감독님 생일에 로봇청소기나 하나 사줄까요?
-강준수 : 괜찮아요. 얼른 산책 마치고 들어가요.
-임은혜 : 네. 쉬어요.
아무래도 오늘 낮에 연쇄살인마 최철용을 직접 만나는 것도 모자라, 온갖 이야기를 들어서 꽤나 예민해진 모양.
얼른 씻고 자야겠다.
“휘유.”
천천히 숨을 돌리며 탈의를 하고 샤워실로 향했다.
* * *
“이 질문에서는 눈을 희번덕거리더라고요. 그러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짜릿했다고 하는데 그때 눈빛이 굉장히 살벌해서………….”
‘그들의 메모리’ 1부 최종 회의.
내가 직접 만났던 최철용과의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전체적인 내용을 준비하는 과정.
대화 내용은 녹음하지 못해서 전부 내 기억을 되살려서 작성하고 있다.
100%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신경 써서 대화를 했던 덕분에 왜곡되는 내용은 거의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혹시나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 있기에 어렴풋하게 떠오르거나 기억나지 않는 건 아예 제외했으니까.
물론, 그런 내용이 굉장히 적긴 했다.
애초에 그와의 대화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잊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으니까.
“여기선 입을 씰룩거리는데, 웃음을 참는 것 같았어.”
“들으면서도 소름 돋네요.”
구은희 작가는 자신의 팔을 쓸어 만지면서 물었다.
“PD님은 대화하시면서 안 무서우셨어요?”
“장난 아니었죠. 사람 죽인 걸 자랑인 것처럼 늘어놓는 게 더 무서웠다니까요.”
“사이코패스들은 저희랑 생각 자체가 다른가 봐요.”
“맞아. 고통 같은 거에 공감하지 못한다잖아.”
“끔찍해요, 정말.”
“그러니까 우리가 더 잘 살려서 만들어야지. 일반인들이 모르는 걸 알려주는 게 우리 역할이잖아.”
“네, 맞아요.”
“그러면 다시 인터뷰 내용으로 돌아가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바로 반성에 관한 거였는데………….”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오전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그럼 인터뷰 내용은 정리됐으니까 점심 먹고 최종 질문지 정리합시다.”
“네, PD님. 기억하느라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나는 수첩을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은 어디서 먹죠?”
“낙지 집 예약해뒀습니다.”
“이 앞에 낙지새우볶음 파는 곳?”
“예. 별로시면 다른 곳으로 예약할까요?”
“거기 좋죠. 갑시다.”
“네.”
짐을 챙겨 나오는데.
“어?”
저 멀리 복도에서 청바지에 흰 티를 입은 여성이 벽에 기댄 채 시계를 보고 있었다.
“한예린 팀장님?”
“감독님!”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바쁘셨는지 문자 확인 안 하시더라고요.”
“아, 오전부터 계속 회의 중이라서요.”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하자, 미확인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보낸 이 : 한예린 팀장.
-감독님! 저 여의도 왔는데 시간 되시면 같이 점심 먹을래요?
“아, 점심.”
“팀원들이랑 같이 나가시는 거면 다음에 먹고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불쑥 옆에 있던 구은희 작가가 끼어들었다.
“두 분이서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그렇다네요.”
한예린 팀장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실소를 머금고 옆에 있던 구은희 작가에게 법인카드를 건넸다.
“이걸로 결제해요.”
“네. 알겠습니다. 천천히 다녀오세요.”
“맛있게 먹어요.”
작가들을 먼저 식당으로 보내고 우린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어디로 갈래요?”
“여기 근처에 일식집 하나 찾아뒀어요. 거기 괜찮아요?”
“좋죠.”
그녀의 조수석에 탑승했다.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의상이 가볍네요?”
“11시쯤이었나? 오전 미팅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커피를 사려고 했는데 기다리던 도중에 꼬마아이가 음료수를 엎어버렸거든요.”
“어유, 괜찮아요? 안 데었어요?”
“네. 다행히도 시원한 음료수였네요.”
한예린 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근처에 가서 아무 옷이나 사서 입었어요.”
“훨씬 편해 보여요.”
“칭찬이죠?”
“그럼요.”
“여하튼 그래서 옷을 사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인지라 감독님 생각이 났거든요.”
“잘 오셨어요.”
한예린 팀장은 부드럽게 코너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온 김에 플랫폼도 물어보려고요.”
“아, ‘그들의 메모리’ 방송 채널요?”
“네. 곧 촬영 들어간다고는 들었는데, 아직 어디서 방영할지 결정이 안 됐다고 들어서요.”
“생각 중이에요. 이번 방송은 큐튜브 쪽보다는 TV가 나을 것 같아서 더 고민스럽더라고요.”
“후보군은 있어요?”
“다른 채널은 다 쳐내고 그나마 괜찮은 곳이 JBC와 KTS인데………… 결정이 쉽지 않더라고요.”
“JBC는 종편이고 KTS는 지상파인데 KTS가 더 낫지 않아요?”
“파급력이나 조건만 따지면 당연히 지상파인 KTS가 낫죠. 그런데 이번에 다루는 일이 ‘살인자’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징역수에 관한 이야기도 흔히 나오고.”
그녀는 알았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규제 때문이구나.”
“네, 맞아요.”
소위 말하는 방심위.
방송심의위원회에서 제일 심하게 잡는 게 지상파.
그 다음이 종편과 케이블.
큐튜브는 거의 터치를 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파급력 자체가 큐튜브는 TV방송에 비해 밀리기에 이번 프로그램은 TV 정규 방송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지만, 아직까지 JBC와 KTS 중 한 곳을 정하지 못했다.
“종편이 조금 더 자유롭게 표현이 가능한 거죠?”
“맞아요. 참고 영상도 그렇고 어휘적인 규제도 꽤 차이가 나거든요.”
“쉽지 않네요.”
한예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아직 마음은 반반인 거예요?”
“JBC쪽으로 조금 기울긴 했어요. 사실, JBC는 제 고향 같은 곳이거든요.”
“아, 그러네요. 감독님이 JBC 공채 출신이셨죠?”
“맞아요. 물론,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 중 남아 있는 친구들은 몇몇 되지 않아요.”
대부분이 퇴사하고 이직을 했으니까.
지금 같이 작품을 하는 서브 PD 송재훈도 JBC 출신.
“천천히 결정해요. 어차피 급한 건 아니니까.”
“이번 주까지 확정해서 알려드릴게요. 그래야 편성도 쉬울 테니까.”
“네. 고마워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한예린 팀장은 룸미러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참, 감독님.”
“말씀하세요.”
“혹시 그림 좋아해요?”
“현대미술이나 인상파, 뭐 이런 그림 말하는 거예요?”
“네. 이번에 저희 새언니가 미술관을 개관했거든요.”
“새언니면, 오빠분의 아내?”
“맞아요.”
보통 재벌가 사람들은 비슷한 수준의 집안과 결혼을 하는데, 특이하게도 지한그룹은 굳이 재벌가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국내에서도 탑으로 꼽히는 집안이라 그런지, 딱히 재벌가들끼리 만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는 걸 교양 프로그램으로 본 적이 있다.
한예린의 오빠들도 아마 전부 평범한 시민들이랑 결혼했다지?
“미술관은 종로에 있는 건데…….”
“혹시 한립예술관 말하는 거예요?”
“알고 있네요?”
“네. 오다가다 몇 번 봤어요.”
“새언니가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오래 전부터 준비했었거든요. 제일 좋아하는 장르의 전시회라고 하는데, 규모도 꽤 커서 볼만할 거예요.”
“재밌을 것 같기야 하지만, 저는 그림에 대해 전혀 몰라서요.”
“괜찮아요. 저도 그림 쪽은 잘 모르니까.”
그녀는 코를 찡긋하며 덧붙였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 해서 숫자 볼 줄밖에 모르거든요.”
“저랑 가도 괜찮겠어요? 예술관 같은 곳은 미술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이랑 같이 가서 설명 듣는 게 낫지 않나?”
한예린 팀장은 손사래를 쳤다.
“어유, 제가 몇 번 들어봤는데……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선 하나 그어놓고 이게 현대와 과거의 단절이라고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니까요.”
“하하, 맞아요. 저도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이랑 가면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면 같이 가요. 촬영 일정이랑만 안 겹치면 될 것 같은데.”
“이번 전시는 월말까지라고 하니까 천천히 날짜 잡아서 가요.”
“그렇게 합시다. 재미있을 것 같네요.”
오래지 않아 도착한 식당에서 한예린은 주차장에 차를 멈췄다.
“여기 와봤어요?”
“아니요. 무슨 메뉴 파는 곳이에요?”
“덮밥이요. 오랜만에 돈가스덮밥이 먹고 싶어서.”
조금 놀랐다.
“소박하시네요.”
“그래요?”
“네. 일식집이라길래 회나 참치 드실 줄 알았거든요.”
“그런 거 기대한 거였어요?”
“하하, 전혀요. 저도 돈가스덮밥 좋아해요.”
“그래도 다른 곳이랑 조금 다를 걸요?”
“왜요, 돈가스에 금가루라도 뿌려져 있나?”
“네.”
“……예?”
“금박으로 코팅해서 나와요.”
“…….”
아니, 나는 장난으로 물어본 건데.
말문이 막혀 눈을 꿈뻑이다가 겨우 물었다.
“잠깐만, 그러면 덮밥 한 그릇에 몇 만원인 거예요?”
내가 당황하며 묻자, 한예린 팀장은 빵 터지며 배꼽을 잡았다.
“하하핫. 농담이에요.”
“예?”
“한 그릇에 8천 원 하는 식당이에요. 평범한 식당.”
“……허허.”
당했다.
“팀장님도 놀릴 줄 아시네.”
“감독님 놀리는 재미가 있네. 얼른 들어오기나 해요.”
“그래요.”
* * *
한예린과의 식사가 끝난 뒤 이어진 오후 회의.
사실, 뼈대는 확실하게 잡혀 있는 상태였기에 회의 내용 자체는 복잡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자료를 정리하며 순서를 확정하는 것 정도?
“재훈 씨, 사전답사 다녀온 건 큰 문제없었죠?”
“네. 처음에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예약 진행해 주세요. 그리고 오 작가님이 큐시트 최종 정리해주시고, 최종 일정도 그대로 진행할게요. 막내작가님들은 각자 담당 분들한테 연락해서 특별한 이슈 없으니 2주 뒤 촬영 시작하겠다고 일정 말씀드리세요.”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회의를 마무리하고 나가려는 찰나.
벌컥-.
“PD님!”
막내 작가 하나가 다급하게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스캔들 터졌습니다.”
“……스캔들이요?”
느낌이 좋지 않다.
이렇게 급하게 올 정도면, ‘그들의 메모리’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패널로 출연하는 범죄 심리학자나 교수들이 문제가 될 리는 없고.
잠깐만.
“혹시 한시아 씨예요?”
“아닙니다.”
한시아를 제외하면, 이번 ‘그들의 메모리’에 출연하는 연예인은 없는데?
“그러면 누구 스캔들인데요?”
“감독님이요.”
“……네?”
내가 잘못 들었나 해서 되물었다.
“저요?”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굉장히 싸한 느낌이다.
잠깐만.
혹시 최인하가 앙심을 품고 무언가 터뜨린 건가?
불안감이 증폭했다.
“이거 한 번 보시죠.”
막내 작가는 들고 온 태블릿 PC를 건넸다.
화면에는 예상치도 못한 글귀가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스튜디오 J 강준수 PD와 보이온탑 유한빛의 만남…… 금단의 사랑인가?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