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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사는 프로듀서-400화 (401/601)

400화 닿기 위해서는 (2)

지현욱 캐스팅을 확정하자, 이후의 배역들에 대한 섭외도 돛을 단 배처럼 순항하기 시작했다.

두 명의 성민혁에게는 비중이 많지 않은 조연 배역을 주었는데 둘 모두 만족하며 받아들였다.

주연 자리가 욕심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직 자신들에게 과한 자리라는 걸 알기에 지금 배역으로 상업 영화에 데뷔한다는 것만 해도 영광으로 여기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캐스팅이 마무리되었다고 해서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한시아는 경찰 역을 더 원활하게 수월하기 위해 액션스쿨에 다시금 들어갔다.

다른 영화에서 액션을 몇 번 찍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 요구되는 특정한 신들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있었으니까.

그녀뿐만 아니다.

지현욱 또한 사이코패스 범인으로서 몰입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캐스팅 직후, 완결까지의 대본을 본 그는 배역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3개월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하고 올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기에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긴 했다.

게다가 그의 회사 JB엔터테인먼트도 나름대로 배우들을 키우는데 노하우가 있었기에 충분히 기다릴만했다. 아니, 오히려 기대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3개월 동안 노느냐?

그건 아니었다.

지현욱을 포함해 대본 리딩을 하고 나서 배우들에 맞게 대본을 수정하는 건 기본이고.

“네, 안녕하세요. 스튜디오 J의 강준수입니다. 해당 촬영장을 좀 쓸 수 있을까 해서요. 예. 4개월 정도 뒤에 진행할 예정이고, 추격 신으로 섹션 A구역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촬영장 섭외부터 시작해서.

“여기서는 2층짜리 세트장을 지을 거야. 황정태 역(役)의 지현욱 씨가 화재를 저지를 거라서 불에 잘 타는 재질로 부탁드려. 참, AXTA 건설에게 횡성군에 미리 건축 허가 받는 거 잊지 말라고 꼭 전하고.”

마땅한 촬영장이 없으면 직접 세트장을 짓고.

“네. 이번 작품의 미술 감독님과 무술 감독님 때문에요. 지난번에 같이 작업했던 김민아 미술감독님이랑 영화 태극해 연출에 도움 주셨던 박건무 무술 감독님과 함께 작업했으면 하거든요.”

추가 연출을 위해 외부 스튜디오에 연락해서 감독들을 섭외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촬영 D-1.

첫 촬영 신이 새벽부터 산속에서 시작하기에 우리는 하루 전날 미리 모여 만났다.

모든 배우가 온 건 아니었다. 첫 촬영에 주조연 중에서는 지현욱만 출연하기에 그 혼자만이 올 예정이었다.

숙소로 잡아 둔 산장에는 오후 8시가 조금 넘어서 지현욱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랜만입니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처음 볼 때에 비해 그는 꽤나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사람이 다운된 느낌이랄까.

조금 울적하면서도 거칠어진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황정태 배역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고 봐도 되겠지.

반갑게 악수를 나눈 뒤, 그를 숙소 안으로 안내하려 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아, 잠시만요.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들어가도 될까요?”

“담배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현욱 씨 담배 안 피우시지 않았나요?”

“예전엔 그랬는데, 아무래도 이 배역이 골초이다 보니, 완벽하게 소화하려면 담배 맛을 알아야 될 것 같더라고요.”

그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서 일부러 계속 피우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담배가 자꾸 당기더라고요.”

“이거 저 때문에 괜히 담배를 피우시게 된 게 아닌가 죄송스럽네요.”

“어유, 아닙니다.”

그는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제가 욕심 때문에 하는 건데요.”

치익-.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는 그의 태도는 꽤나 능숙해 보였다.

담배를 태우는 동안, 자연스레 근황 이야기부터 나왔다.

“현욱 씨. 제가 궁금해도 참고 있었던 건데, 3개월 동안 대체 뭘 하신 거예요?”

“하하,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조금 부끄러운데…….”

그는 멋쩍은 듯 턱을 긁적였다.

“황정태라는 배역이 평범한 인물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그 캐릭터에 대해서 더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정리한 걸 직접 정신과 의사님께 보여드리고 소견을 여쭤보니 조울증, 과대망상, 피해망상은 극심했고, 약간의 정신분열증 증세도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예, 맞습니다.”

정확히 짚었다.

직접 해당 병에 대해 공부하고 배역에 녹여냈다.

“설정을 보아하니, 어렸을 적 학대했던 부모님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경력도 있었고요.”

“그렇죠.”

“그래서 직접 정신병원에 한 달 간 입원했었습니다.”

“……예?”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다.

“3개월 중 첫 달은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사정을 이야기하면 왠지 편의를 봐줄 것 같아 회사를 통해서 진짜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위장하고 입원했습니다.”

지현욱은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지 헛웃음을 흘렸다.

“하아, 첫 사흘은 진짜 미치겠더라고요. 진짜 정신 장애인 취급을 받으니까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저 감탄만 새어나왔다.

직접 정신병원에 입원할 생각을 할 줄이야.

본인이 열심히 한다는 건 다른 이들의 노력과 급이 다르다고 말했던 이유를 벌써부터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일주일 지나니까 저도 모르게 적응되는 겁니다. 그 생활이 익숙해져요. 그렇게 한 3주쯤 지나면, 실제로 내가 정신병이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허허…….”

“근데 직접 경험을 해봐야지 알 수 있는 것도 많았어요. 말씀드리고 싶은 건 많은데…… 연기로 직접 보여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한 달을 다 버티신 거예요?”

“예. 꾸역꾸역 어떻게든 버텼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담배 한 대 더 피워도 될까요?”

“그럼요.”

담배 하나를 더 꺼내 물은 지현욱은 자연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두 번째 달에는 도축장에 갔습니다.”

“도축장이요?”

이건 또 뜻밖의 장소다.

“거긴 무슨 일로 가신 겁니까?”

“황정태 역이 사람을 죽이는 걸 밥 먹듯이 하잖아요?”

“그렇죠.”

영화에서 무려 20명이 넘는 사람을 살인하는 잔혹한 살인범이니까.

“그런데 제가 그 감각을 현실에서 느껴볼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연기라 해도 사람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렇죠.”

“그래서 돼지 도축장에 갔습니다. 죽였을 때의 그 감각을 한 번 느껴봐야 어렴풋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진짜 상상 이상의 인물이다.

소름이 돋으면서도 지현욱을 섭외한 과거의 내가 기특할 지경.

연기파 배우들 중에 열심히 한다는 사람은 많이 듣고 봐왔지만, 이 정도의 노력을 하는 인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신인이기에. 또 신인이라서 할 수 있었던 건지.

아니면, 지현욱이라서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눈앞의 인물이 평범한 배우들과는 급을 달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한 달 동안 일을 배우면서 엄청 돼지를 잡았습니다. 지방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파티를 할 때 돼지를 잡을 때는 해머로 머리를 때리더라고요. 뼈가 부서지는 감각이 망치를 타고 전해져오는데…… 진짜 불편합니다.”

그는 그때의 감각이 생각난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건 특수한 경우고…… 실제 도축장에서는 전기로 돼지를 질식시킵니다. 그나마 죽음의 고통을 덜 느끼게 하는 거죠. 거기서 동맥혈을 찔러서 피를 빼는데…….”

“거기까지만 들을게요.”

더 들었다가는 상상이 되어서 못 들을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나를 이해했는지 그는 고개를 숙였다.

“듣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생각을 못 했네요.”

“아닙니다. 열심히 해주셨다는 게 감사하죠.”

“여하튼 돼지 도축장에서도 한 달 정도 지냈는데…… 생명을 빼앗는 행위인데도 이게 또 익숙해지더라고요.”

그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지현욱이 이 배역 하나를 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고민하며 고뇌했는지를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할까요?”

“아니요. 세 번째 달에는 어떻게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마지막 달에는…….”

지현욱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예?”

순간 나도 모르게 공포감이 느껴져 뒷걸음질 쳤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특별할 것 없었어요. 세 번째 달에서 3주간은 영화 설정 상 악역이 살아온 삶을 거슬러 올라가며 직접 경험했어요.”

“아, 그래서 저번 달에 황정태 역의 추가 설정에 대해 엄청 물어보신 거구나.”

“예, 맞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는…….”

지현욱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잔망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삼켰다.

“비밀로 할게요.”

“정말요?”

“영화 개봉하고 나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야, 이거 영화 홍보 예능 나가면 잘 먹히겠네요.”

“하하하, 감독님께서는 예능도 한가닥하셨잖습니까? 그러면 확실할 것 같은데요?”

“그럼요. 제가 보는 눈이 남다르거든요.”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현욱은 담배꽁초를 짓밟으며 뒤를 따랐다.

“이쪽으로 오시죠. 숙소 알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제일 안쪽 방이 편하실 것 같아서 그쪽으로 잡아뒀어요. 매니저님은 그 맞은편 방 쓰시면 되는데, 아까 조연출이 알려줬을 겁니다.”

“아, 네네. 차에서 내리자마자 조연출분이 오시는 걸 봤어요.”

본 촬영부터는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그 매니저가 다시금 복귀했다.

다행스런 일이지.

“그렇게 하시면 되고…… 오늘은 따로 회식 같은 건 없어요. 내일 새벽 4시 무렵부터 어스름 여명이 밝아올 건데 그때 바로 촬영 시작할 거니까 미리 맞춰서 준비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푹 쉬세요.”

“예.”

꾸벅 인사하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감독실로 돌아왔다.

내일 촬영을 위해 서둘러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눈을 감았음에도 잠이 오기는커녕, 문득문득 지현욱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세 달이라는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그런 일을 하고 다녔을 줄이야.

게다가 세 번째 달의 마지막 주.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을 했을 터.

그렇기에 그가 어떤 연기를 선보일지 더욱 더 궁금해졌다.

기존에도 훌륭했던 연기력을 생각하면, 그의 노력까지 가미된 연기는…….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

내가 감독이라서가 아니라, 한 명의 제작자로서 기대되는 수준.

문득이나마 지현욱이 연기계에 획을 그을 배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잠들어서 내일 아침 해가 밝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그의 연기를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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