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또 다른 과거 (3)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예. 오래 걸린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기다리신다고 하셨어요.”
은채린이?
이유는 뻔하다.
나와의 접촉이라고는 지난번 보육원에서의 조우 외에는 없다시피 해도 무방하니까.
그때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 온 것이겠지.
“선배님.”
그때, 박호중 PD가 나를 불렀다.
“섭외하시면 안 돼요?”
“에이, 무슨…….”
말을 하다가 움찔했다.
작가들은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뭐야, 다들 은채린의 섭외를 바라고 있는 건가?
허나, 어림도 없었다.
1군 아이돌로서 그녀의 스타성은 인정하나, 지난번 만남을 생각하면 섭외는커녕 서로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니까.
“안 돼.”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메인 작가 나민영도 슬쩍 발을 얹었다.
“감독님. 우선 가 보세요. 이야기 잘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요.”
“민영 작가도 은채린 원하는 거야?”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
“일단 다녀와 보세요. 저희끼리 회의하고 있을게요.”
“게스트 캐스팅 이야기하는데 내가 가서 데려오면 어떡하려고?”
“저희는 MC부터 정하고 있을게요.”
음.
그것도 해야 할 일이긴 하지.
나는 결국 못 이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올 테니까 먼저 회의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선배님, 꼭 데려오세요.”
“아니, 섭외 안 한다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은채린이 두리번거리다가 날 발견하고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갯짓을 했다.
“따라오세요.”
제일 안쪽에 위치한 감독실.
나는 블라인드를 치며 소파로 그녀를 안내했다.
“여기로 앉으세요.”
그러나 은채린은 엉덩이를 붙이기는커녕 앙칼진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감독님 보육원 가기로 했다면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러는데 섭외는 무슨 섭외냐.
나는 소파에 앉는 대신 테이블에 있던 내 의자에 앉았다.
“네. 그쪽에서도 OK했거든요.”
“하.”
그녀는 기가 차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며 눈을 부릅떴다.
“아니, 감독님. 나 엿먹이려고 작정하셨어요?”
또 가만히 있다가는 지난번처럼 내 탓을 할 것 같아 나도 가시가 돋아났다.
“은채린 씨야말로 무슨 피해망상 있으십니까?”
“뭐라고요?”
“저는 애초에 거기에 섭외를 하러 간 겁니다. ‘우연히’ 채린 씨를 만난 거고, 본인이 직접 가정사까지 다 이야기하신 거고요.”
그녀는 입술을 질끈 물었지만, 나는 그녀를 향해 필터 없이 쏟아냈다.
“그쪽이 혼자 오해하고 화낸 거 아닙니까? 대체 저한테 뭘 바라는 겁니까?”
“…….”
“까놓고 말해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한 게 있습니까? 저는 제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쪽이 지금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사무실로 찾아와서 방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은채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거 하나 따지려고 여기까지 쳐들어온 겁니까?”
“그건 아닌데…….”
“그러면 왜 오신 겁니까?”
“그게…….”
은채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리고는 눈을 꾹 감더니.
“……하다고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리지 않아 나는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뭐라고요?”
“미안했다고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지난번에는 제가 너무 놀라서 오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당황해가지고 너무 무례하게 대했어요.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욱하고 올라오던 기운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본인도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사과를 했으니까.
“제가 말하는 방법이 서툴러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고, 화내고 싶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쿨하게 받아 주었다.
어차피 이 좁은 연예계에서 언젠간 다시 만나고 부딪칠 사이라면, 괜히 껄끄러워서 좋을 게 없으니까.
“감독님.”
“네.”
“사과한 다음에 이런 말씀드리기 부끄럽긴 하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말씀해 보세요.”
“보육원에 관한 이야기…… 저랑 만난 것부터 제가 말씀드렸던 이야기까지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숨기고 싶겠지.
애초에 이를 위해서 온 것일 터.
“알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아요.”
“정말요?”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앉아 보시겠어요?”
“아, 네.”
우리는 소파로 가지 않고,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꼰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끝까지 들어 주세요.”
“예.”
“저는 은채린 씨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또 방송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상관이 없어요. 아니,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그녀는 진지한 자세로 내 말을 들었다.
“다만, 비슷한 상황을 정말 많이 봤어요. 당연히 화려한 모습만 보여주는 연예인 입장에서는 좋은 면모만 보여주고 싶죠. 그래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자식에 대한 거짓말 및 배우자에 대한 사실까지 숨기는 경우가 많았어요.”
실제로 그런 사례들을 많이 알고 있다.
손가락으로 다 세지도 못할 정도로 많을 터.
“그런데 지금이야 채린 씨가 활동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괜찮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숨긴 사실에 대한 모순이 생길 거예요. 팬들이 많으니 더 빨라질 테고요.”
그녀도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이 밝혀지는 게 시간문제라는 건 누구보다 은채린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원래 거짓말이라는 게 처음 말하는 거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에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 계속 살이 붙어 가면서 커지는 거잖아요.”
“네, 맞아요.”
은채린은 손톱을 뜯으며 말했다.
“저도 언젠간 밝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지금 그걸 말하기엔 너무 두려워서요.”
그녀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직접 사실을 고백하는 게 후폭풍이 덜하겠지만, 어쨌든 본인의 입으로 거짓을 말했던 걸 밝혀야 하는 상황이니까.
“단순히 저 혼자만이 아니라, 같은 그룹 멤버들에게도 피해가 갈 테니까…….”
“그렇긴 하겠죠. 다만, 한국의 정서상 직접 밝히면 용서해 줄 가능성이 훨씬 높아요.”
실제로 그런 사례들도 많다.
허나, 누군가에 의해 폭로를 당한다면, 은퇴를 해야 될 가능성까지 생기는 것이지.
“무엇보다 팬들이 채린 씨를 좋아하는 이유는 배경 때문이 아니라, 채린 씨 자체를 좋아해주는 걸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진지하게 고민하나 싶더니.
“저 잠깐 전화 한 통만 하고 돌아와도 될까요?”
“그러세요.”
“아, 그런데 누가 들으면 안 되는 거라…… 혹시 조용한 곳 없을까요?”
“여기서 통화하세요.”
나는 자리를 비켜 감독실을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 * *
“감독님.”
한 15분이 지나서야 은채린이 조심스레 문을 열며 날 불렀다.
“네.”
어떻게 되었냐거나, 무슨 대화를 한 거냐고는 묻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녀가 직접 말해 줄 테니까.
“저 방금 소속사랑 통화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은채린이 먼저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실대로 밝히기로 했어요.”
“잘하셨어요.”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프로그램이요.”
“네?”
“감독님이 이번에 진행하시는 프로그램이요. 보육원과 관련된 거.”
“아, 네.”
“실은 보육원 선생님한테 어떤 내용인지 설명은 들었거든요.”
“그러셨어요?”
왠지 그럴 것 같았다.
“혹시 제가 출연해도 괜찮을까요?”
“……예?”
놀랐다.
아무리 회의실에서 작가들과 후배 PD들이 말했어도, 이런 상황에서 출연 제안을 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그녀를 이용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은채린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문득 생각이 난 건데, 제가 그 보육원 출신이니까…… 기왕 밝힐 거면 이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해서요. 게다가 제 출신 보육원에 도움이 되면 더 좋을 것 같고요.”
안 될 이유는 없다.
은채린이라면, 현재 예능가에서 섭외 1순위를 달리고 있는 인물.
게다가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내가 거절할 필요가 없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그래요.”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출연해주세요. 같이 한 번 찍어보죠.”
“정말요?”
은채린은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 * *
“조심히 가세요.”
은채린을 배웅하고 회의실로 가는 길.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창문으로 작가들과 후배 PD들이 이쪽을 보다가 후다닥 자리에 앉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회의실 문을 열었다.
“아니, 회의하라니까 다들 엿보고 있으면 어떡해?”
“아이, 선배님.”
박호중 PD는 또 너스레를 떨었다.
“저희 미리 다 끝내 놨죠.”
“MC 정했다고?”
“네. 그거 말씀드리기 전에…….”
그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역시나 다른 작가들의 눈도 빛나고 있었다.
“뭐,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출연하기로 했다.”
“진짜요?”
“와, 대박.”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박호중 PD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아니, 감독님! 안 하신다면서요!”
메인 작가 나민영이 박호중 PD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우리 감독님이 츤데레시잖아.”
아니, 그건 오해다.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도 안 할 줄 알았어. 우연히 대화하다가 하게 된 거지.”
“그래요?”
“응. 이야기하자면 긴데…….”
어떻게 정리할까 하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방송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전후사정을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녀를 보육원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
보육원을 통해 이번 프로그램의 취지에 대해 들은 그녀가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까지 숨겼던 진실을 밝히고, 그곳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만.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까지 다른 이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
“……해서 출연하기로 한 거야.”
“와, 대박.”
“그렇구나.”
“그러니까 은채린 소속사랑 긴밀하게 연락 주고받으면서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 일은 외부로 소식 절대 새어나가면 안 돼. 극비로 잘 진행하고. 만에 하나 방송 전에 나갔다가는 은채린 소속사에서 법적 조치를 할 수도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박호중 PD 네 놈이 제일 걱정이다.
“그래서 일단 1화 게스트 섭외는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나민영 작가를 바라보며 물었다.
“MC도 정했다고 했지?”
“네. 총 후보는 3명입니다.”
그녀는 화이트보드를 끌어오며 말했다.
“제일 먼저 감독님과 연이 있는 황정무, 스튜디오 J와 연결고리는 없지만 이런 프로그램과 어울리는 최민욱 선생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민영 작가는 비장의 카드라는 듯 눈썹까지 들썩이며 말했다.
“곽중환 씨입니다.”
잠깐만.
곽중환?
그러고 보니, 그 사람 회귀 전에 그렇게 커다란 일이 있었는데, 이번엔 조용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