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444화 (445/601)

444화 번아웃 (1)

금요일.

오후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

직원들이 퇴근한 스튜디오 J의 감독 사무실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아오…….”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빈 문서를 저장할까요?

-Y/N

나는 N 버튼을 눌렀다.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달.

예능 ‘꼴찌 탈출’을 종영하고 나서 무려 두 달이나 지났다.

하지만 진전된 건 없었다.

“왜 이러지?”

나는 머리를 헝클며 의자에 푹 기대었다.

처음이었다.

시나리오 집필에 있어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

원고는 벌써 10번도 넘게 엎었다.

회귀하고 나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완전히 막혀버렸다.

‘번아웃인가?’

최근 들어 과도하게 달리긴 했다.

영화 한 편을 끝내고 쉴 틈 없이 예능 두 작품을 연달아 달리며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휴식 없이 달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런 생활은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늘 그렇듯 시나리오를 집필해서 빠르게 영화 제작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원고를 쓰지 못했다.

몇 날 밤을 새워서 원고를 쓴 뒤,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재미가 없었다.

간혹 재미가 있을 때도 있긴 하나, 그건 영화로 촬영을 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시나리오와 달리 영상에서는 맛을 살리기가 어려운 경우가 허다한 상태.

처음엔 소재가 문제인가 싶어서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다른 것도 꺼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희한하리만치 모든 게 막혀버린 상태.

‘뭐가 문제지?’

감이 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창작의 고통이라는 걸 느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어이가 없는 건.

오늘도 불금을 회사에서 보내 듯, 두 달 동안 나는 주말까지 반납하고 내내 시나리오를 썼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엎어버리니까 두 달 동안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음 편하게 놀았다면 모를까, 일했는데 성과가 없으니 헛웃음이 나오는 수준.

시나리오 원고만 수십만 자를 썼는데 이렇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나 싶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건가?

아니다. 이것보다 더 한 상황도 겪어 봤는데.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업무는 잘 소화했다.

문제를 알면 해결이라도 해 보겠는데, 그 원인을 모르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달력을 바라봤다.

다음 주 월요일엔 미팅이 잡혀 있었다.

신작 시나리오에 대한 진행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지금 상태에선 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치익-.

나는 카페인 캔음료를 하나 들이켜고서 다시 한글창을 켰다.

하얀색의 여백.

그래, 일단 써보자.

뭐라도 나오겠지.

* * *

“팀장님!”

“아, 감독님.”

나를 발견한 한예린 팀장은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아닙니다.”

약속시간보다 한 20분 늦긴 했다.

앞선 미팅이 길어진다고 미리 연락을 받았기에 여유롭게 올 수 있었다.

“저도 넉넉하게 왔어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죄송해요.”

“아니에요, 앉으시죠.”

“네.”

한예린 팀장을 간만에 만난 이유는 하나.

두 개의 예능을 마무리하며 이제는 슬슬 신작을 준비해야 할 타이밍이었으니까.

그녀는 에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먹으며 물었다.

“신작 구상은 좀 하고 계셔요?”

“아니요.”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네요.”

“엇, 저번에 시나리오 하나 준비 중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겨울에 걸맞은 스토리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 그랬죠.”

나는 조심스레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쓰다 보니까 아무래도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 말씀은…….”

그녀의 조심스런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엎었습니다.”

“아이고…….”

한예린은 아쉬운 얼굴로 코를 찡긋거렸다.

“아쉽네요. 스토리는 괜찮았던 것 같았는데.”

“네. 지금도 시나리오 기본 뼈대 자체는 괜찮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게 제가 살리기가 쉽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어쩔 수 없죠.”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주억거렸다.

“그 창작의 고통이라는 게 어마어마할 것 같아요. 저야 일반인이라서 어느 정도인지 가늠은 가지 않지만…… 시간은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 천천히 준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미팅이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녀에게 말했듯, 준비하던 시나리오를 엎어버렸으니까.

예능이 끝난 뒤, 한두 달 정도 안에는 시나리오의 초고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미리 말했던 터라, 부끄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 볼게요.”

“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한예린 팀장은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지금까지 엄청나게 달려오셨잖아요. 잠깐 쉬어 간다고 생각하시면 되죠.”

“그래야 되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사실, 이번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로 막혀버린 느낌이랄까.

평소에는 늘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걸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 두 가지를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하는 게 가능했는데.

이번에는 둘 다 자신이 없어져버렸으니까.

“늘 잘하셔서 그럴 거예요.”

한예린 팀장은 편안하게 말해 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성공만 해 오셨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이전에도 강준수 사단의 다른 후배들이 말했듯, 지금까지 나는 작품을 만들면서 한 번도 고꾸라져본 적이 없다.

처음에야 자신감 있게 달려들었지만, 이제 한 번이라도 미끄러지면 ‘강준수 퇴물됐네.’, ‘몇 번 흥하더니 감 잃었네.’, ‘어느 정도 성공하니까 이젠 예술병이 걸렸네.’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상황.

그렇기에 이전보다 더욱 잘하고 싶었고.

솔직히 말해서 어깨가 무거워지면 무거워질수록 이 상황이 부담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한예린 팀장은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저기, 감독님.”

“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때.

지이잉-.

휴대폰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황윤지.

업무 미팅 중이었기에 전화를 거절했다.

“통화하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그런데…….”

휴대폰이 옆으로 돌아가 있어서 화면이 보였는지 한예린 팀장이 아는 체를 했다.

“방금 전화 황윤지 씨였나요?”

“아, 네. 맞습니다. 혹시 아는 사이세요?”

“음…….”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두 분이 친하세요?”

“그냥 가끔 안부만 묻는 사이입니다.”

지난번에 우연히 같이 회식을 했을 때 번호 교환을 한 뒤로 한두 번씩 안부 인사를 하는 정도.

사실, 그녀가 몇 번 만나자고 하긴 했으나, 시나리오가 완전히 막혀있는 상태라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전부 거절했다.

“그렇구나.”

“황윤지 씨랑 무슨 사건이라도 있으셨나요?”

한예린 팀장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사건은 아니고 관계가 얽혀있긴 하죠.”

그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무언가 있긴 한 모양.

“혹시 어떤 건지 여쭤 봐도 돼요?”

한예린 팀장은 조심스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사실, 말 못 할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비밀로 해줄 수 있죠?”

“그럼요.”

“실은 제가 아니라, 제 동생과 관련이 있어요. 저한테 남동생 있는 건 알고 계시죠?”

“네, 들었습니다.”

한 명 있던 걸로 기억한다.

위에 오빠 둘에 밑에는 한 명.

4남매 중에 유일한 딸이라고 해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은데.

“두 살 차이라고 했나요?”

“한 살 차이요. 연년생이거든요.”

“아하.”

“실은, 제 동생과 황윤지 씨가 만나는 사이거든요.”

“……교제한다는 뜻인가요?”

“네, 맞습니다.”

깜짝 놀랐다.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동생과 엄청 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닌데, 아무래도 제가 연예계와 방송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 보니 알게 되더라고요.”

하긴, 지한 엔터테인먼트가 영화계에서 굉장히 큰손인 걸 생각하면 정보력은 누구보다 빠를 수밖에 없지.

“중요한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저희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서 비밀로 좀 부탁드릴게요.”

하긴, 재벌가와 관련된 내용이기에 기업의 주가와도 직결될 수 있는 사안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왠지 이 주제로 더 대화를 하면 불편해 할 것 같기에 내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조금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죠?”

“아, 네. 맞습니다.”

한예린 팀장은 자세를 고쳐 잡고 입을 열었다.

“혹시 러시아의 스쿱스 엔터테인먼트라고 들어보셨나요?”

“어…… 들어본 것 같긴 해요. 배급사 중 하나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네, 맞아요. 러시아 영화계의 큰손인데, 단순히 배급사만 하는 게 아니라, 제작도 하고, 홍보도 하고 심지어는 연예인 매니지먼트까지도 해요.”

“엄청난 대기업이네요.”

“그렇죠. 러시아 방송계에서 최고라고 꼽히는 곳이거든요.”

“네.”

“그런데 그쪽에서 얼마 전에 제안이 하나 왔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

“어윤중 팀장님 통해서 보고 받았는데, 시나리오 집필 중이신데 영향이 가실까 봐 일부러 제가 막고 있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최근 들어 조금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고 해서 생각이 났거든요.”

“예.”

“반드시 해야 된다는 건 아니니까 절대 부담 갖지는 마세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실은 러시아의 스쿱스 엔터가 제작하는 방식이 시나리오 하나에 여러 명의 작가가 붙어서 함께 준비하는 거거든요.”

일명 할리우드식 드라마 제작 방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메인 작가 한 명과 그의 보조 작가들이 대본을 집필해서 PD가 영상을 찍는 데 반해.

할리우드에서는 메인 작가가 여러 명이 된다.

각각의 작가가 각 회차를 쓰고 그걸 PD가 제작하는 형식이지.

‘왕좌의 게임을 하는 남자’, ‘빅뱅 이론의 발견자’, ‘프리즌 인 더 브레이크’ 등의 유명한 미국드라마가 이런 방식으로 제작이 된다.

한 마디로 다중 협업 방식인 것이지.

제작적인 면으로 보면, 속도감과 완성도를 높이는 데 뛰어나기에 돈을 벌어들이는 데는 이만한 방식이 또 없지만.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내 작품’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없는 작품이 된다.

“그런데 그 스쿱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스튜디오 J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과 협업을 한 번 해보면 어떻겠느냐고요.”

“그쪽에서 시나리오를 제작해 준다는 거죠?”

“네. 지난번에 해외에서 개봉했던 감독님의 작품 ‘숲 : 사각지대’를 보고 연출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연출을 칭찬했다는 건 각본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실제로 ‘숲 : 사각지대’는 해외 개봉을 하긴 했으나, 뛰어난 흥행은 하지 못했다.

해외에 내 이름을 알리는 정도에서 그쳤으니까.

‘이런 감독도 있구나.’ 정도.

“다시 말씀드리지만,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게 아니고, 시나리오 제작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고 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천천히 한 번 생각해 볼게요.”

“네, 감사해요.”

한예린 팀장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천천히 제작해도 된다고는 말했으나, 기업의 입장에서는 내 공백 기간이 길어질수록 손실은 클 수밖에 없으니까.

한예린 팀장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만약에 정 안 되시면 예능을 한 편 더 하셔도 됩니다. 드라마를 가셔도 되고요.”

“예, 알겠습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나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면, 감독님 보고 일을 종용하려는 게 아니라, 스타일상 휴식 기간이 길어지시면 힘들어하실까 봐 알려드린 거니까 절대 부담 갖지 마세요.”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네. 저는 언제나 감독님 편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식사 하시죠.”

* * *

-번아웃.

-번아웃 증후군.

-슬럼프 헤어나오는 법.

한예린 팀장과의 미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가 한 일은 인터넷에 검색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이대로 계속 시나리오를 써 봤자 엎어버리기만 반복할 뿐, 진도를 나가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검색 결과 나온 건 하나 같이 비슷했다.

‘여행을 가라.’

‘하던 일을 내려놓고 다른 걸 해봐라.’

‘낯선 사람을 만나 봐라.’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라.’

등등.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의 삶의 패턴에 변화를 주고 환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잘 되냐고.

회사에 휴가야 낼 수는 있다지만, 이게 또 마음 같지가 않았다.

만약에 지금 시나리오를 내려놓았다가 괜히 아예 감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도 들었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지.

아무래도 쉽지 않다.

하염없이 검색을 하고 있던 그때.

지잉지잉-.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보낸 이 : 황윤지.

-혹시 통화 가능하실 때 전화 좀 주실 수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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