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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사는 프로듀서-447화 (448/601)

447화 예상을 벗어난 (1)

번아웃이 온 뒤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그래.

예능이 안 된다면, 굳이 그 장르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잖아?

다음 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어윤중 본부장을 찾아갔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어, 강 PD.”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날 반겼다.

“얼굴색이 좋네. 휴가 동안 잘 쉬고 왔나 봐?”

“예. 푹 쉬고 왔습니다.”

“그래. 사람이 좀 쉬면서 해야 된다니까.”

어윤중 본부장은 흡족스런 얼굴로 나를 소파로 데려갔다.

“냉커피? 아니면 따뜻한 거?”

“얼어 죽어도 아이스죠.”

“하하, 그래.”

그는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 가져왔다.

“직접 타 주시는 거 아니에요?”

“얼음 없어, 인마. 얼음 정수기 하나 사 주든가.”

그 말에 덥석 캔커피를 받았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어윤중 본부장은 클클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환기는 좀 됐고?”

“네. 다음 작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윤곽은 그려 뒀습니다.”

“오, 뭔데?”

“광고요.”

순간,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너 설마 또 BH포인트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

“정확히 따지면 BH포인트는 아닙니다. 일종의 공익 광고예요.”

나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적어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요.”

“…….”

“예능도 아니고 단발성 광고인데 위에서도 OK해주시지 않을까요?”

“글쎄다.”

어윤중 본부장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말했다.

“윗선에서 태클을 걸 것 같지는 않은데, 좋은 시선으로 볼 것 같지는 않다.”

“그런가요?”

“응. 솔직히 말해서 내 입장에서 달갑지는 않아.”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근데 네가 어떤 심정인지도 이해가 가긴 한다.”

“…….”

“그래도 말리고 싶은 건 사실이야.”

“회사에 피해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쉽지 않을 걸?”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어윤중 본부장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늘 잘해 왔으니까…… 윗분들은 내가 한 번 설득해 볼게.”

“감사합니다.”

나는 활짝 웃으며 하이파이브하자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됐어, 치워.”

“흐흐흐, 본부장님밖에 없다니까요.”

“근데 강 PD도 알 듯이 공익광고라는 것 자체가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지?”

“물론이죠.”

내가 광고를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같은 방송계 업자로 예능부터 시작해서 드라마는 물론 뮤직비디오와 영화 및 단막극까지 온 분야를 다 섭렵하면서 어느 정도 정보는 충분히 알고 있다.

일반적인 광고를 보면, 광고주가 광고대행사에 의뢰를 하고 그 업체에서 CF감독과 출연 배우를 섭외해서 촬영을 진행하는 반면.

공익광고는 광고주의 역할을 문화체육관광부가 대신한다.

정확히는 문체부에서 예산이 떨어지면,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 소속된 공익광고협의회가 광고를 제작하는데, 단순히 의뢰하고 제작하는 게 아니다.

공익광고협의회에 소속된 언론, 정부, 학계 등 각종 영역의 전문가 20여 명의 위원이 광고에 대한 주제를 선정하고 시안을 검토한 뒤에 결정까지 해서 내려준다.

감독은 본인의 역량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촬영만 해주는 감독 정도인 것이지.

어윤중 본부장도 이게 단순하게 하루 이틀 만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걱정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공익광고로 진행하려면 과정도 복잡하고 예산 자체도 적을 거야. 네가 시안을 직접 만들어도 수정을 할 거고.”

“그렇겠죠.”

“게다가 우린 사기업이라 애초에 지원 선정이 되기도 힘들 것 같은데. 잘하면 광고비 집행 내역을 감사까지 할 수도 있고. 네가 단독으로 나간다고 해도 굉장히 빡세지 않겠어?”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게 있습니다.”

나는 씨익 웃었다.

“제 사비로 진행하려고요.”

“……뭐?”

어윤중 본부장은 얼이 빠진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거냐?”

“아니요. 저 강준수의 개인 통장에 있는 돈으로 진행하려고요.”

“…….”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스튜디오 J로 진행을 하면, 공익 광고라고 해도 지난 예능의 PPL을 떠올리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회사에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 아예 제 사비로 직접 제작하려고 해요.”

내가 준비한 대로 차근차근 말했다.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는 건 홀로 제작할 수 있게 허락만 해주시라는 겁니다.”

지금의 나는 스튜디오 J와 전속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

어떤 제작물을 연출하건 간에, 스튜디오 J의 이름으로 나가는데.

괜히 논란을 사지 않도록, 그 제한을 풀어달라는 것.

“이번 광고 한 번에만 국한된 거지?”

“예, 맞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나쁠 거 없지. 논란에서 발을 뺄 수는 있으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만, 너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과거의 PPL이 논란되는 건 각오하고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금전적인 면에서 말하는 거야.”

어윤중 본부장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너도 알겠지만, 광고는 들어가는 돈이 상당해.”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본부장님.”

“왜?”

“저 올해 인센티브 꽤 많이 받을 것 같거든요.”

“……아!”

그는 어이가 없는지 탄성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올해 제작한 예능과 영화 모두 성공을 거뒀다.

작년에 비해서 더 크고 개수도 더 많았다.

작년에 받은 인센티브로 아파트를 샀는데, 올해는 그것보다 더 많이 받을 예정이라는 뜻이지.

“저 어차피 사치도 잘 안 하잖아요.”

“그렇긴 해.”

솔직히 말해서 평생 사치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도, 적당하게 먹고살 돈은 어느 정도 마련해두었다.

“강 PD.”

“예?”

“새삼스럽지만, 넌 대단히 미친놈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 네가 단독으로 하면…… 위에서도 오히려 반기겠다.”

그럴 수밖에.

내가 단독으로 움직이면 책임이 생길 시 ‘강준수 감독’이 지게 되고.

칭찬을 받게 되면 그건 자연스레 내가 속한 스튜디오 J가 수혜를 받게 될 테니까.

“한 번 준비해 봐. 대신 나를 포함해서 이사진이 몇 번 검열을 빡세게 할 거야. 그건 각오해둬.”

“물론입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얼른 가 봐. 지금 네 얼굴 보면 얼른 제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표정이다.”

“하하, 알겠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마치고 본부장실을 빠져나왔다.

* * *

일주일 뒤.

공익 광고에 대한 시안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상태.

기왕이면 BH포인트에 대한 상황이 정리되기 전에 광고를 내는 게 어느 정도 진실성이 느껴질 것 같아서 빠르게 준비에 임했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박호중 PD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선배님 잘 진행되고 계세요?”

“어, 시안은 깔끔하게 뽑힌 것 같아.”

손에 비타민 음료가 두 개 들려있는 걸 보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

나는 그것을 향해 턱짓을 하며 물었다.

“왜? 혹시 사고쳤어?”

“에이, 선배님. 제가 그러고 다닐 놈처럼 보이십니까?”

“응.”

“아이, 서운하게 왜 그러세요.”

그는 씨익 웃으며 비타민 음료를 건넸다.

“그래서 뭔데?”

“아, 다른 게 아니고…… 제가 어제 오후 반차 냈었잖아요?”

“응. MBS에 아는 선배 드라마 촬영장 놀러간다며.”

“예, 맞아요. 거기 갔다가 끝나고 회식도 했거든요?”

“술 마시고 무슨 실수를 한 건데?”

“아니, 선배님. 실수까지는 아니고…….”

박호중 PD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었다.

“마침 자리에 홍채민 씨가 계시더라고요.”

배우 홍채민.

“그러다 보니 문득 그분도 BH포인트로 돈을 날렸다는 게 기억이 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선배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나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 뭐 기밀사항도 아니고.”

원래 방송계에서는 제작 준비 기간 동안엔 정보 유출을 극도로 꺼려 하는데 이번 광고 같은 경우는 조심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으니까.

“둘만 이야기한 거지?”

“네. 다른 스태프들은 못 들었어요.”

“그러면 됐어. 언론에만 퍼지지 않으면 돼.”

“죄송해요, 선배님.”

“괜찮다니까.”

띠리링-.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가 봐.”

“옙.”

나는 그를 보내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강준수입니다.”

-감독님. 홍채민 씨에게 전화 왔습니다. 연결해 드릴까요?

“그래.”

나는 마이크를 막고서 박호중 PD를 붙잡았다.

“너 잠깐만 앉아 있어.”

“네? 네.”

나는 다시금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강준수입니다.”

이내 인터폰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홍채민이에요. 기억하시죠?

예능 촬영하면서 두세 번 정도 본 게 전부긴 하다.

그래서 휴대폰 번호도 교환하지 않았긴 하지.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실은 제가 어제 다른 PD님 통해서 감독님이 BH 포인트 관련한 공익 광고를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거든요.

“예, 맞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좀 돕고 싶어서요.

“채민 씨가요?”

-네. 저도 피해자 중 하나라서…… 기왕이면 힘이 되고 싶거든요.

내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출연료는 받지 않을게요.

오히려 반가운 입장이지.

내 사비를 쓰려고 했는데 그게 조금이나마 줄어들 게 된 것이기도 하고.

홍채민 또한 BH포인트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가 나온다면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더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

“저야 좋습니다. 그러면 뵙고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언제가 괜찮으세요?”

-저 내일이나 모레는 조금 바쁘고, 오늘 저녁에 스케줄 비거든요.

“그러면 오늘 바로 뵈시죠.”

-식당은 제가 예약할게요.

“알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그런데 휴대폰 번호가 없는데…….

“불러드릴게요.”

-아니에요. 시아 통해서 받을게요. 안 그래도 조금 이따가 같이 커피 마시기로 했거든요.

한시아랑 절친하다는 건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주 만나는 모양.

“예, 알겠습니다. 이따 뵈시죠.”

-네. 들어가세요!

수화기를 내려놓자, 박호중 PD가 걱정스런 얼굴로 날 바라봤다.

“왜, 왜요?”

혹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닌가 걱정하는 모양.

“공익 광고에 도움 주신다네. 당신도 BH포인트 피해자라서 더 공감이 가나 봐.”

“아, 그래요?”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선배님 이거 제 덕분인 거 아시죠?”

“……방금 전까지 죄송하다고 한 놈 어디 갔냐?”

“에헤이.”

박호중 PD는 능청스레 허리를 폈다.

“어쨌든 결과론적으로 좋아진 거 아닙니까?”

이 녀석을 누가 말리랴.

“됐고,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홍채민 씨 이야기 좀 자세히 들려줘. 어제 들었을 거 아니야?”

“예, 맞아요.”

그는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우선, 홍채민 씨 스타일부터 알려드릴게요. 성격이 엄청 유해요.”

“그래?”

하긴, 그 앙숙인 한시아와 황윤지 사이에서 둘 다 친한 걸 생각하면…….

“네. 그래서 어지간하면 화를 내지 않는데, 이번 일로는 극대노했다고 유명하거든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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