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할리우드 (5)
뚜우우-.
신호음이 한참을 울렸다.
허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LA와 한국 시차가 있긴 해도 지금은 저녁 때쯤이나 되었을 텐데.
촬영 중인가?
부재중 전화 보면 연락 오겠지, 생각하며 끊으려는데.
딸칵.
-PD님!
끊기 직전에 한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시아 씨. 통화 괜찮아요?”
-네. 방금 씻고 나오느라 늦게 받았어요.
“아아, 촬영 중인 줄 알았어요.”
-집이에요, 막 샤워해서 저 완전…….
“거기까지만 해요.”
-으흐흐흫. 알았어요.
한시아는 해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진짜 오랜만에 연락이네요. 잘 지냈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 잘 지내셨겠죠.
서운하다는 듯 말을 보탰다.
-소식을 무슨 기사로만 다 접했네요. 좋은 일인데 들려주지도 않고 나는 그냥 제3자 외부인인가, 스쳐지나가던 인연이었던가, 노리개였나 온갖 고찰을 했거든요.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장난치는 건 알고 있지만, 서운한 건 사실일 터.
“시아 씨도 바빴잖아요. 대작 영화 들어간다고 해외 엄청 가신다던데, 괜히 전화해서 이야기하면 자랑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싶어서 못했어요.”
-아아, 그러셨구나.
“미안해요.”
-미안해하지는 마요. 저도 연락 못 하긴 했으니까. 퉁 쳐요. 퉁, 오케이?
“하하, 그래요.”
-그나저나 진짜 할리우드라니…… 어마어마하네요. PD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잘하리라는 건 알았지만, 거기까지 갈 줄은 몰랐네요.
“이제 막 시작인 걸요. 그리고 시아 씨도 할리우드 오셔야죠.”
-저는 언감생심 꿈도 안 꿔요. 한국에서 이 정도까지 온 것만 해도 만족하는걸요.
한시아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래서 미국은 언제 가는 거예요? 촬영 준비하려면 조만간 출국하셔야 될 텐데.
“안 그래도 지금 미국이에요. 오늘 LA 도착했어요.”
-정말요?
그녀는 놀란 목소리로 답했다.
-아, 어쩐지 일반 통화가 아니라, 인터넷 전화로 거셨더라니.
한시아는 순수하게 응원해 주었다.
-가서 잘해요. 대박 나도 잊지 말고. 망하면 제가 팔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부담 갖지 말고요.
“그럴게요.”
-참, 저는 PD님이 잘되면 열과 성을 다해서 축하해 줄 수 있어요. 그거 알죠? 망했을 때 위로해주는 건 쉬워도 잘되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건 어려운 거.
“하하하, 그럼요. 기왕이면 시아 씨도 곁에 와서 같이 축하해 줘요.”
-지금 저는 할리우드 못 간다고 놀리는 거죠?
“그게 아니라, 제안하는 거예요.”
-……네?
“이번 작품에서 동양인 여성 주인공이 하나 출연해야 되거든요. 제가 이 대본 쓸 때 시아 씨 떠올리면서 만든 배역이라서요.”
-장난치는 거예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제가 이런 말 농담으로 하는 거 봤어요?”
-…….
그녀는 꽤나 당황한 듯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진지하게 제안하는 거예요. 물론, 시나리오는 아직 보여드리지 못했지만, 자신 있어요. 검토하려면 이메일로 대본 보내 줄게요.”
-아니, PD님!
한시아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이런 건 진즉에 이야기했어야죠!
“저도 확정된 게 없어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안 그래도 시아 씨 요즘 잘나가고 있는데 괜히 저 때문에 걸릴까 봐 싶었으니까. 게다가 저는 언제든지 영화가 엎어질 가능성도 있었고요.”
-아니, 허으으으…….
그녀는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 섭외하면 늦어도 올해 안에 촬영 시작할 거 아니에요?
“그렇죠. 빠르면 3개월 내, 늦어도 6개월 내에 크랭크인 할 것 같아요.”
-저 지금 찍는 영화가 시리즈물이잖아요. 내년까지 이것만 촬영해야 돼요.
“……아, 그래요?”
-네. 3부작인데 한 번에 3편을 다 찍어 놓고 3년에 걸쳐서 개봉하는 거란 말이에요.
한시아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말했으면 이거 수락 안 했을 텐데.
바쁜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제가 마음 같아서는 계약 엎고 가고 싶은데, 지금 작품은 이미 절반 넘게 진행됐거든요. 게다가 블록버스터라서 위약금도 세가지고…….
“어유, 아니에요. 저한테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아, 진짜…… PD님 바보예요?
“시아 씨. 저 응원하기로 했잖아요.”
-그건 그거고!
“제가 대박 나서 다음에 할리우드 진출할 때 시아 씨한테 또 제안할게요.”
-됐어요. 그때 나 또 바쁠 거야.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로 아쉬운 모양.
허나, 어쩔 수가 없었다.
-PD님.
“네?”
-저 안 하더라도 하나만 약속해요.
“뭔데요?”
-들어 줄 거예요?
“생각해 보고요.”
당연히 작품에 관한 이야기일 줄 알았다.
아니면 선물이라도 사달라든가.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내용이 나왔다.
-그 배역 유나희한테 주지 마요.
“……예?”
-아니, 그건 진짜 싫어서 그래요. 저 보고 만든 배역이잖아요.
꽤 놀랐다.
동글동글한 평소의 한시아와 달리, 이렇게 강력하게 의사를 표현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럴게요.”
-고마워요. 억지 부렸는데도 들어 주셔서.
“괜찮아요. 참, 지금 작품 촬영 차 미국도 몇 번 들러야 된다고 했죠?”
-네. 따로 일정은 아직 안 나왔는데 시간 되면 꼭 보러 갈게요.
“그래요. 늦었는데 얼른 쉬어요.”
-PD님도 푹 쉬세요!
“예.”
전화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그런가.
한시아가 조금은 달라진 듯한 느낌.
아닌가?
최근 들어 작품에 떠올리며 쓰기도 하고, 황윤지 때문에 한시아를 의식해서 그런 건가?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황윤지는 그 이후로 귀신 같이 연락이 뜸해졌다.
아마도 지한그룹의 후계자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는데, 내가 친한 사람이 그가 아니라 한예린 팀장이란 걸 알았기 때문일 테지.
그러려니 한다.
나도 뭐 그녀에게 친해지면서 마음을 준 건 아니기에 딱히 아쉬움이라든지 미련은 없었으니까.
일단 다시 배역으로 돌아와서…….
작품 속 캐릭터 이름은 ‘수지.’
사실, 이 ‘수지’ 역으로 유나희에 대해서는 섭외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유나희 또한 스케줄 상 올해 내내 가수로서 일정이 잡혀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렇게 되면 캐스팅에 조금 차질이 생기는데…….
문득 머릿속엔 임은혜가 떠올랐다.
그녀 또한 최근 들어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긴 하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영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회화까지도 힘들고, 여행용 영어를 하는 정도?
그 수준으로는 할리우드를 포함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영화에는 무리가 있지.
나는 결국 고민하다가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미스터 강. 오늘 입국한다더니 벌써 들어왔나 보네요?
“네. 방금 호텔에 짐 풀었습니다.”
-같이 맥주 한잔해야 되는데, 제가 아쉽게도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네요. LA돌아가면 같이 한잔해요.
“좋죠. 그 다름이 아니고, 하나 물어보려고요.”
-말씀하세요.
“주연 중에 혹시 ‘수지’ 역에 대해서 캐스팅 후보로 생각해 둔 인물이 있나요?”
-아, 그 동양인 배역 말이죠?
“네. 제가 한국에서 배우를 찾아봤는데 일정이 맞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할리우드 배우 중엔 어울리는 이미지가 없고요.
-그렇죠. 아무래 할리우드에서는 동양인 풀이 조금 적으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찰나.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제임스 카터 감독이 먼저 제안했다.
-다른 주연은 캐스팅으로 하되, 수지 역만 한 번 오디션을 진행해 볼까요?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흠칫했다.
오디션에 대해서는 극도로 지양했던 인물이 먼저 제안할 줄은 몰랐으니까.
“괜찮겠어요? 제임스는 오디션 별로 안 좋아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이 ‘수지’라는 배역은 특별하니까요. 생존자 주연 3명 중에서도 핵심 캐릭터인 만큼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배우를 찾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저야 나쁠 거 없죠. 그러면 같이 한 번 심사해 보시죠.”
-좋습니다. 회사에는 미스터 강이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그럴게요. 일정 잡히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LA에서 봐요.
***
“네, 고생하셨습니다. 차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배우가 나가자마자 나는 볼펜으로 두 줄을 찍찍 그었다.
“별로죠?”
“네.”
제임스 카터 감독 또한 단호하게 대답하며 프로필을 밑으로 툭 던졌다.
차마 그처럼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지만, 내가 보고 있는 프로필도 전부 폐기해야 될 것 같긴 했다.
“어떻게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없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동양인 배역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스태프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펜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걸로 끝인가요?”
“네. 오늘 지원자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무려 사흘째 오디션을 진행했다.
지원자만 5백여 명이 넘어갔지만, 배역에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연기가 되면, 영어가 부족하고.
영어가 되면 연기가 부족한 이들이 태반이었으니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친구들은 몇몇 있긴 했어요.”
“하지만 딱 그 정도가 전부죠.”
제임스 카터 감독은 이마를 짚었다.
“추가 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인원을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저희 기준에 만족스런 인물은 찾기 힘들겠죠.”
“예, 맞아요.”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저희끼리 잠깐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다른 스태프들을 전부 물러나게 만들었다.
둘만 남은 사무실.
그는 고개를 들고서 나를 불렀다.
“미스터 강.”
“네.”
“이거는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공동 연출자로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니까.”
“편하게 말해요.”
“이 ‘수지’라는 역할, 굳이 동양인일 필요가 있나요?”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설정을 보면, 미스터 강이 어떤 연출을 하려 했는지는 알겠는데, 스토리 전개를 보면 굳이 동양인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그건 맞아요. 원래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퇴고 및 각색하면서 사라졌거든요.”
“그러면 과감하게 바꿔 보는 건 어떻습니까?”
“서양인으로요?”
“네. 절대 미스터 강의 영역에 침범하려는 건 아니에요. 시나리오 작가로서 존중하니까요.”
그는 이전의 기 싸움이나 기선제압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오해하지 말라는 듯 덧붙였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 풀은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서양인으로 하되, 추가 수정을 가하는 건 미스터 강의 자유고, 또 ‘수지’ 역에 대한 섭외 관련한 권한도 전적으로 미스터 강이 갖도록 넘길게요.”
“제임스는 손 떼겠다는 건가요?”
“네. 괜히 제가 제안해서 시나리오를 바꾸려고 한다고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서 그가 섭외에 대하여 더 이야기했다면, 다시금 기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건 진지하게 작품을 위한 논의였다.
“오디션을 보든, 직접 캐스팅을 하든 저는 토 달지 않겠습니다.”
“음…….”
제임스의 제안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했다.
배우가 없다고 해서 가장 중요한 주연 중 하나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할리우드만큼 출연 배우가 중요한 영화판은 더 없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지금 상황에서 국정을 바꾼다고 스토리상 큰 문제는 없다.
“다만, 미국인이면 안 됨. 스토리상 북미가 아닌, 다른 지역 출신이어야 해요.”
“네. 그것 또한 수정하는 대로 태클 걸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알겠습니다. 제가 그러면 시나리오 수정 및 추가 섭외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제임스 카터 감독은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고생 많았는데 같이 맥주나 한잔할까요?”
“좋죠.”
***
시나리오 수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스토리상 큰 변함은 없었기에 사흘 정도 손보는 것으로 마무리된 상태.
“그러면 영국 배우가 필요한 거예요?”
캐서린 린튼은 포크로 샐러드를 찍으며 물었다.
“네. 구체적인 스토리까지는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배우의 국적은 영국으로 정했어요.”
“무조건 영국 출신은 아니어도 되는 거죠?”
“그렇죠. 대신 악센트가 영국 발음이어야 해요.”
오늘 그녀를 만난 이유는 하나.
캐스팅 권한이 내게로 넘어온 만큼, 직접 영국 배우를 섭외해야 하는데.
단순히 내가 아는 배우풀 외에도 할리우드에서 몇 년간 굴렀던 당사자에게 직접 연기력이 좋은 배우를 추천받고 싶었으니까.
“그러면…….”
캐서린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물었다.
“소피아는 어때요? 연기 잘하는데.”
“어, 별로예요. 연기력 자체는 좋은데, 너무 고고하고 우아한 느낌이에요.”
“하긴, 극한의 생존 상황과 어울리지는 않네요.”
그녀는 다른 배우의 이름을 꺼냈다.
“에밀리아는요? 그 친구는 생존하는 이미지도 딱 맞고 연기력도 좋은데.”
“그렇긴 한데, 얼마 전에 SNS에 동양인 차별 글을 올렸더라고요.”
“……아, 그래요?”
“네. 평상시 마인드에서도 그게 보였거든요. 그런데 감독이 저라고 생각해 봐요.”
“그러면 안 되겠네요.”
캐서린은 또 다른 이름을 꺼냈다.
“데빌온더힐에 출연한 이사벨라도 괜찮지 않아요? 그 친구가…….”
그녀는 몇 명의 이름을 더 꺼냈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는 없었다.
“그러면…….”
캐서린은 무언가 떠오른 듯 씨익 미소를 짓더니.
“저는 어때요?”
아주 강한 영국 발음으로 물었다.
“……어?”
당황스러움에 눈을 꿈뻑거렸다.
“캐서린, 영국 악센트 쓸 줄 알아요?”
그녀는 능청스레 영국 발음으로 계속 답했다.
“네. 잘하죠.”
“어떻게 아는 거예요?”
“그건 비밀이에요.”
캐서린은 눈을 반짝이며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래서 나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