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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사는 프로듀서-470화 (471/601)

470화 당신이란 사람은 어찌 (5)

기자 간담회가 끝난 뒤.

무대 밑으로 내려오자마자, 나는 제임스 카터 감독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왜요?”

그는 되레 뻔뻔하게 나왔다.

“내가 틀린 말 했습니까?”

“그건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어차피 공개는 시간문제니 말할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제임스 카터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회사에서 관여할 바지, 미스터 강이 따질 만한 문제가 아닐 텐데요?”

“나도 이 작품의 감독으로서 당연히 따질 만한 사건이죠. 애초에 이야기하지 않기로 합의한 사안이고요.”

그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그냥 내가 실수한 거로 칩시다.”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돌아섰다.

“그러면 된 거죠?”

“되긴 뭐가 됐습니까?”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임스 카터는 내 팔을 쳐내며 한 걸음 다가오더니 눈을 부릅떴다.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이게 흥행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도움은 무슨. 내부 경쟁만 부추기는 꼴이죠.”

“그 경쟁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는 피식 입꼬리를 휘었다.

“혹시 겁나는 겁니까?”

“뭐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미스터 강이 설마 쫄아서 그러는 건가 해서요.”

히쭉거리는 걸 보니 열이 뻗쳐올랐다.

하지만 굳이 녀석의 페이스에 말리고 싶지 않아서 감정을 가라앉히며 냉정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유치하게 구는 겁니까?”

“유치하다니요.”

녀석은 태연하게 코를 찡그렸다.

“뭘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십니까?”

기가 막혔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하고 막힐 지경.

“지금 감정적으로 구는 게 누군데 그따위로 말하시는 거죠?”

그제야 다른 스태프들도 상황이 심각한 걸 깨닫고 말리기 위해 다가왔다.

“워워, 감독님들. 진정하세요.”

“아직 기자들 밖에 있으니까…….”

하고픈 말이 많았다.

솔직히 말해서 속에 있던 말과 녀석의 만행들을 쏟아붓자면, 1박 2일로 말해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사답게 참았다.

그렇게 하면 녀석과 똑같은 꼴이 되는 것 같았으니까.

허나, 이렇게 대놓고 도발하는데 당하고 있는 건 멍청한 짓이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러는 겁니까?”

“글쎄요?”

제임스 카터는 눈썹을 들썩거렸다.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회사 21세기 울프와 오래도록 일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자긍심이랄까요?”

한 마디로 말해 밖에서 굴러먹다 온 나보단 지가 낫다는 소리다.

처음에 시나리오 보고 반해서 부디 같이 하자며 소리쳤던 게 누군데…….

헛웃음만 나왔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이렇게 바뀔 줄 알았다면, 아무리 할리우드라고 해도 제임스 카터와 협업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우리 할 일만 하기로 했던 약속은 다 잊으셨나 봅니다.”

“영화 끝날 때까지만 참자고 했잖아요. 지금 촬영 끝난 지 꽤 오래된 거 아닌가?”

그렇게 한창 언성이 높아질 무렵.

“워워, 진정하세요.”

윌리엄 팀장이 부랴부랴 뛰어왔다.

“밖에 기자들이 무슨 일 있냐고 엄청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제 곧 개봉인데 말 나오는 건 자제해야죠.”

제임스는 태연한 얼굴로 윌리엄 팀장에게 물었다.

“미리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저도 모르게’ 감독판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건 죄송하지만, 사실 흥행에 도움이 되지는 않겠습니까?”

저 모습이 어찌나 후안무치한지, 기가 다 찼다.

그 답변도 가관이었다.

“도움은 되겠죠.”

그러나 다행히도 윌리엄 팀장은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분쟁을 일으키는 발언이긴 하죠.”

“아, 그렇습니까?”

제임스 감독은 몰랐다는 듯 피식 웃고는 나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스터 강.”

이 인간과는 더 이상 말을 섞을 만한 가치가 없다.

나는 대답을 않고 밖으로 나섰다.

* * *

한국에서 시작된 기자간담회는 중국, 일본, 홍콩, 영국, 러시아 등 각국을 돌며 펼쳐졌고, 미국을 찍으며 마무리가 되었다.

물론, 그 뒤에도 시사회가 이어졌지만, 제임스 카터 이 인간은 전부 처음과 같았다.

기밀에 대해서 더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경쟁을 부추기거나 은근히 거슬리는 말을 내뱉었으니까.

나는 오히려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나서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으니까.

그 덕분인지, 녀석은 개봉을 일주일쯤 남겼을 때부터는 슬쩍 입을 다물었다.

혼자서만 막말을 하고 다니니, 대중들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다고 느껴졌을 테니까.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네.”

“잘했어요. 그딴 도발에 일일이 응해주면, 오히려 신났다고 더 떠들 게 분명해요.”

한시아는 괘씸하다는 듯 주먹을 꼭 쥐었다.

“나중에 만나면 제가 꿀밤이라도 날려줄게요.”

“하하, 말이라도 고마워요.”

나는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간만에 만났는데 이런 이야기 말고 즐거운 이야기해요.”

“어떤 거요?”

“시아 씨 영화요.”

그녀의 영화는 현재 상영 중이었다.

해외 영화사와 국내 영화사의 합작으로 제작된 영화인데, 3부작으로 찍어서 3년에 걸쳐서 개봉하는 방식으로 이번에 1부가 개봉되었다.

“엄청 흥행 중이라면서요?”

유명한 무협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한 동양풍 판타지 작품인데, 아시아권에서 박스오피스를 석권하고 있었으니까.

“저 실은…….”

한시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동안에 PD님 영화 놓친 게 진짜 아쉬웠거든요.”

충분히 그럴 만하다.

배우에게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건 단순히 몸값을 올리는 수준이 아니라, 글로벌 진출을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릴 만한 기회인 것이니까.

“그런데 그게 아쉽지 않을 정도예요.”

“다행이네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오히려 내가 더 안심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천만도 넘었던데요?”

“네. 아마 1,200만 정도에서 끊길 것 같아요.”

“대박이네요. 축하해요.”

“고마워요.”

한시아는 헤실헤실 미소를 지었다.

“참, PD님.”

“네?”

“영화 개봉하고 나면, 따로 정해진 스케줄 있어요?”

“아니요.”

“드라마나 다른 프로그램도?”

“네. 뭐, 간단히 인터뷰 같은 건 여기저기 나가긴 할 것 같은데, 그 외엔 전혀 없어요.”

“음, 그러면요.”

한시아는 쌕 입꼬리를 휘었다.

“저랑 놀러가요!”

“좋죠. 어디로 갈까요?”

그녀는 음흉하게 미소를 흘렸다.

“제가 다 정해뒀죠.”

느낌이 좋지 않은데.

“프랑스 니스예요!”

흠칫했다.

“……둘이 해외여행을 가자고요?”

“엇, 제가 가자면 가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거예요.”

한시아는 흐흐 웃으며 답했다.

“여행이 아니라, 일하러 가야죠.”

“대체 무슨 소리예요?”

“스튜디오 J에서 방영하고 있는 여행 프로그램 하나 있잖아요.”

“그 혹시 큐튜브에서 진행하는 ‘나 홀로 여행기’ 말씀하시는 거예요?”

강준수 사단에 소속된 내 후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기획 회의를 같이 했는데, 꽤나 흥행한 예능 중 하나다.

“네, 맞아요.”

한시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거 출연하고 싶거든요. PD님이 메인 프로듀서 맡아서 진행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담당하긴 힘들어도, CP로서는 동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안 그래도 영화 덕분에 섭외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한시아인데, 그녀가 우리 프로그램에 먼저 나와 준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지.

“오케이, 그럼 콜!”

“언제 가고 싶은데요?”

“글쎄요? PD님 영화 개봉하고 나서 좀 여유 있을 때 가요. 어차피 저도 당분간은 바쁠 것 같으니까.”

“그래요. 회사에 미리 이야기해서 준비해둘게요.”

“네, 좋아요!”

* * *

“후우우우.”

가슴이 두근대고 설렘과 불안이 공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영화 개봉 당일이었으니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직접 제작한 예능과 드라마만 해도 몇 개인지 헷갈릴 수준이다.

거기다가 단막극과 영화까지도 있지만, 그 모든 작품이 첫 방송을 하거나 개봉할 때도 이렇게나 떨린 적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감독님, 뭐 보고 계세요?”

매니저의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한국 예매 상황이요.”

“아, 그쪽은 이제 막 개봉했겠네요.”

“네. 맞습니다.”

미국은 이제 오후 5시를 넘어가고 있지만, 한국은 조조영화가 한창 상영할 시간이었다.

“어떤 것 같아요?”

“일단 예매는 잘 되긴 하는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예약한 예매 표의 숫자를 알 수 없기에 하루가 지나야 총 관객 수를 볼 수 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영화관 어플로 들어가 각 상영관마다 몇 자리나 비어 있는지, 또 얼마나 차있는지 수기로 체크를 하고 있었다.

상영관 별로 전부 엑셀로 기록하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스윽 눈으로 훑는 정도.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원래 영화라는 게 며칠 전이나 오전에 미리 예약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일에 영화관에 가서 시간에 맞는 작품을 예매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모든 영화관을 체크하는 건 어려웠다.

빅 3이라고 불리는 세 개 영화관이 있는 전국의 숫자만 봐도 대략적으로 GCV가 200곳, 롯성시네마가 100여 곳, 메타박스가 100여 곳이다.

그 외에 소규모 영화관까지 합치면 500여 개는 훌쩍 넘어가는데, 모든 영화관의 예매 상황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나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든 줄이고자, 계속 체크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는 자리가 비었고, 이쪽 상영관은 가득 차 있고.

“미국은 좀 어떻습니까?”

“일단 오늘 스코어는 꽤 좋은 것 같습니다만, 문제는 내일이죠.”

당장 내일부터 마블에서 슈퍼 히어로의 새로운 시리즈가 개봉된다.

그것도 북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경쟁자가 등장했다고 봐야지.

“걱정이 되네요.”

“그래도 편집된 거 보면 대부분 사람들이 다 호평했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편집 감독이 내 시나리오와 기획 의도를 아주 잘 살려주었다.

다만, 경쟁 상대의 체급이 너무 강해서 문제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래야겠습니다.”

나는 호흡을 길게 뱉으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매니저님, 오늘 모이는 건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아십니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원래 내일 미팅으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오늘 윌리엄 팀장님께 갑자기 호출이 와서요.”

“글쎄요. 저한테는 따로 전해진 사실이 없어서요.”

“일단 가 봐야겠네요.”

잠시 후, 나는 21세기 울프에 도착해서 미팅룸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에는 윌리엄 팀장과 함께.

“오랜만이네요, 미스터 강.”

제임스 카터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윌리엄 팀장을 바라보자,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할 말이 있어서 같이 불렀습니다. 이 작품의 감독님들이시니까요.”

“……미리 알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건 죄송합니다. 저희도 워낙 급하게 결정된 일이라서요.”

나는 표정관리를 하며 착석했다.

“그나저나 결정된 일이라니요?”

무언가 통보할 게 있는 모양.

“아무래도 저희 경쟁 상대가 워낙 강력하기도 하고, 또 감독판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화제성이 꽤 올라간 상태거든요.”

윌리엄 팀장은 안경을 올려 쓰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 저희가 내부에서 회의한 결과.”

……설마.

“감독판을 일찍이 공개하려고 합니다.”

“……현재 상영 버전이 막을 내리기 전에 감독판까지 공개한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이런 미친.

이거 대놓고 날 엿 먹이겠다는 소리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있던 제임스 카터 감독의 입꼬리가 히쭉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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