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내가 선택한 길 (1)
“후아.”
한시아의 입에선 연신 긴 호흡이 뱉어져 나왔다.
“후우우.”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기도 하고 입으로 푸르르르 소리를 내거나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긴장된 탓이었다.
흘긋.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6시 40분.
약속시간까지 많이 남았지만, 너무 일찍 와버렸다.
한시아는 손거울을 꺼내 다시금 화장을 점검했다.
눈썹, 눈, 볼터치, 입까지 전부 훌륭했다.
창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의상도 체크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추위를 무릅쓰고 입은 원피스였기에 후회는 없었다.
영화 시사회, 해외 드라마 오디션 등 그 어떤 때보다도 오늘이 더 예쁘고 싶었으니까.
물론, 떨리는 감정은 여전했다.
‘언제쯤 오려나…….’
사실, 정말로 오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강준수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그에게 답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읽었다는 표시는 명확하게 떠 있었다.
그녀가 아는 강준수는 읽고 씹는 경우는 없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어도 어떠한 형태로든 답장을 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답장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서 강준수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를 다시 말하면.
‘유나희도 분명…….’
한시아는 직감할 수 있었다.
분명 유나희도 오늘 강준수에게 만나자고 제안했으리라는 것을.
당연한 일이다.
크리스마스란 연인에게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유나희가 진심을 다해 고백한 지 꽤 시간이 지난 걸 생각하면, 그녀도 오늘은 승부를 보려할 테니까.
모두가 알 듯이 한시아는 유나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일종의 리스펙트는 하고 있었다.
선의의 경쟁이라거니 이러한 허울 좋은 명목은 아니었다.
진심을 다한 상대에게 올인하고 달리는 모습이 한시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으니까.
‘하지만 지고 싶진 않아.’
자신이 강준수를 알게 된 지도 더 오래 되었고.
적극적으로 더 많이 표현해왔고.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6시 50분.
한시아의 손에 서서히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이러지 않는데…….’
평소에 긴장이라고는 하지 않는 사람이다.
촬영이나 대본 리딩을 할 때도 떨어본 적이 없던 그녀가 긴장하고 있었다.
‘설마 안 오는 건가?’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하지만 긴장감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한시아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강준수와 나눴던 대화들.
그리고 한 번씩 같이 찍었던 사진들.
갤러리에 따로 폴더까지 만들어 보관했던 만큼, 그녀는 한 장 한 장 다시금 살폈다.
“푸훗.”
사진을 보다 보니 웃음도 났다.
‘이때는 강준수 PD님도 진짜 풋풋하셨구나…….’
옛 추억이 새록새록 스쳐지나갔다.
‘엇, 나도 완전 어렸네.’
그녀는 민망함에 볼이 붉어지기도 했다.
‘이 날은 화장을 왜 이렇게 촌스럽게 했었지? 이거 강준수 PD님이 찍은 것 같은데…… 앨범에서 지워졌으면 좋겠다.’
그러다 문득 사진 속에 들고 있는 휴대폰도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휴대폰 케이스도 바꿔 끼웠었는데…… 휴대폰 바꾸면서 버렸으려나?’
유나희가 미국에서 강준수의 휴대폰째 강물에 던져버린 것까지는 그녀가 알 수 없었다.
‘나는 서랍장에 보관하고 있는데…… 오늘 오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고 나서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하나, 그럼에도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아직도 약속 시간까지는 꽤 남은 상황.
“흠흠.”
그녀는 목울대를 가다듬다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다 못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선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오는데 차가 많이 막힐 것 같기도 하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생각에 은근히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길거리에 울려 퍼지던 캐롤은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으니까.
다행히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시간은 느리더라도 어쨌든 흘러갔다.
6시 57분.
6시 58분.
6시 59분.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은 조금씩 커져갔다.
혹여나 오지 않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만약에 오지 않으면…….’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 나쁜 생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7시 정각.
한시아는 살포시 의자에 앉았다.
언제 등장하더라도 긴장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때.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룸의 문이 열렸다.
* * *
“딸꾹.”
유나희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하나, 당황하기도 잠시.
“히끅.”
딸꾹질이 또 나왔다.
‘왜지?’
딸꾹질 자체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긴장한 탓이지만, 그녀는 부정했다.
‘아까 기침해서 그런 거겠지.’
유나희는 냉수를 들이켜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강준수에게 보낸 문자는 분명히 읽음으로 표시가 되어 있으나 답장은 없었다.
‘왜, 왜, 왜 도대체 왜?’
답장을 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면 온 다고 하든가, 오기 싫으면 못 온다고 하든가!’
지금까지 강준수가 이런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 고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지만 그런 건 아닐 터.
문자를 보내고 읽은 시간은 아침 일찍이다.
스튜디오 J의 SNS를 확인하면, 오후에 회사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다함께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으니까.
“이씨…….”
답답함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튀어나왔다.
‘아니, 진짜 사람 답답하게 하네.’
1년.
고백하고 나서 무려 1년이나 기다렸다.
‘싫으면 차라리 싫다고 하든가…….’
유나희의 얼굴에 답답함이 드러났다.
울상을 짓기도 하고, 분노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물론, 미소는 지어지질 않았다.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유나희는 눈을 한껏 찡그렸다.
‘아닌데. 나 팬 많은데……. 나 인기도 많은데……. 일등 신부감이랬는데…….’
제3자가 보면 귀여워서 입덕할 만한 생각들이었지만, 다행히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다.
유나희는 거울을 꺼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늘따라 화장은 또 왜 이렇게 안 먹는 거야?’
어제 긴장한 탓에 제대로 잠을 못 잔 탓도 있었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이상하리만치 오늘은 원하는 대로 화장이 되지 않았다.
머리 세팅도 마찬가지.
이상하리만치 고데기는 말을 듣지 않았고.
오늘을 위해 준비했던 옷은 오늘 보니 올이 나가버려서 입지 못했다.
“아, 진짜…….”
유나희의 입에선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안 되도 너무 안 되는 날이었다.
그렇게 고민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보낸 이 : 서혜나.
-언니언니언니언니언니. 지금 통화 가능??
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문자.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겨우 6시 40분.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꽤 남았기에 서혜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굉장히 다급하면서도 속삭이는 목소리.
어딘가에 숨어있는 듯했다.
“왜, 무슨 일인데?”
-나 지금 봉공 레스토랑이거든?
“어, 알아. 부모님이랑 같이 밥 먹는다며.”
-근데 나 여기서 누구 본 줄 알아?
“누군데?”
-한시아.
“……어?”
유나희의 표정이 꿈틀했다.
“걔를 왜?”
-왜는 모르겠고, 방금 전에 화장실 가려다가 프라이빗 통로에서 만났어.
“누, 누구랑 같이 왔어?”
유나희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담겼다.
-아니, 일단 혼자 온 것 같은데…… 모르겠네. 일행이 오지 않을까?
“…….”
-언니는 어떤데? 오늘 감독님 만나기로 했잖아.
“답장이 없어.”
-……어?
서혜나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묻어나왔다.
-아직도 없다고?
“……응.”
-바, 바쁜 거겠지.
“일단 끊을게.”
-어, 어. 알았어. 이따 봐.
“응.”
유나희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설마…….’
그녀의 손에 주먹이 꽉 쥐어졌다.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 때문일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6시 50분. 55분.
그리고 7시 정각을 넘겼다.
하지만 문은 열릴 기세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강준수에게 답장은 없었다.
“…….”
창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커플들을 축복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선물하기 위해서 용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차라리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그 와중에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7시 정각을 넘어, 7시 5분.
7시 10분.
7시 15분.
7시 20분.
어느새 유나희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 까인 건가?’
유나희의 얼굴이 푹 처박혔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서 눈물이 흐르는 것만은 참아냈다.
이런 날에 울기까지 하면 처량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것 같았으니까.
‘못 온다고 답장이라도 했으면 안 기다렸지…….’
유나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치아에 립스틱이 묻을 건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집에 가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더 있다가는 정말 눈물을 쏟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녀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을 다시 한 번 확인해봤으나, 원망스러울 정도로 연락은 없었다.
‘됐어. 이제 안 기다려.’
코스 요리는 미리 주문해놨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계산은 할 테지만, 이런 곳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서 먹는 건 청승맞고 궁상스러울 테니까.
그녀의 가방은 어느새 버튼까지 꾹 눌린 채로 잠겼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집에 어떻게 가지?’
매니저에게 데리러 와달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공 실장은 크리스마스라도 따로 약속이 없어서 괜찮다고 했으나, 유나희 본인이 이제 와서 돌아간다는 건 까였다는 걸 대놓고 증명하는 셈.
아무리 어렸을 적부터 함께 한 매니저라고 해도 자신의 청승맞은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유나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쯤 한시아는…….’
분명 한시아도 강준수 PD와 약속을 잡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크리스마스이브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약속을 잡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한시아가 여우같고 불여시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강준수가 오해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터.
그녀가 그에게 진심이라는 건 누구보다 유나희가 잘 아니까.
‘그리고 PD님이 여기 오지 않았다는 건…….’
그 뒤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체념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유나희는 온 힘을 다해 눈을 꽉 감았다.
‘고백하지 말걸.’
‘약속잡지 말걸.’
‘차라리 오늘이 꿈이었으면…….’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하려던 찰나.
드르르륵-!
문이 세차게 열렸다.
포기하고 있던 유나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희 씨.”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강준수.
“……PD님?”
강준수는 반쯤 들어온 채로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나희 씨.”
“네?”
“제가…….”